최근 진보정치연구소에서 한국위기의 10대 주범을 발표하면서 대기업노조를 거론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보수언론들도 인용보도 하면서 ‘봐라! 역시 대기업노조는 문제가 있다’고 신이 나서 떠들어대고 있다.

진보정치연구소에서 대기업노조를 거론한 이유는, 첫째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 민주주의에 전혀 기여하지 못하고 있고, 둘째 각종 비리와 부정부패 사건, 정파갈등으로 노조운동의 중요성을 훼손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근거도, 설득력도 없다


어떤 절차를 거쳐 이런 선정을 했는가에 대해 우선 확인을 할 필요가 있다. 최소한의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서이다. 어떤 매체든 이런 것을 발표할 때 전문가 설문조사를 한다. 그러나 이번 발표에는 그 어떤 근거도 설득력 있게 제시되지 않았다.

절차 뿐 아니라 이런 주장의 근거가 사실관계에서나 계급적 관점에서나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첫번째 이유로 거론한 ‘대기업노조가 실질적 민주주의에 전혀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황당하기 그지없다.

한국 민주주의는 지금 공장의 문 앞에서 멈추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른바 실질적 민주주의는 현장민주주의이고 노자관계에서는 경영권의 접근 정도에 의해 판단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 대기업노조들은 실질적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고 있고, 지금까지 임금·단협의 단골메뉴가 바로 경영권 개입이다. 진전이 더딘 것은 바로 정권과 자본의 완강한 저항 때문이다. 노조가 경영참가를 외칠라치면 온갖 공권력과 언론을 동원해 노조를 탄압하는 것이 최근의 일이다.

다시 말해 실질적 민주주의가 잘 안되고 있는 것에 대해 ‘노조의 노력이 부족하다’고 비판하는 것은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지만 실질적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주범으로까지 몰아가는 것은 완전히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비리구조의 주범은 자본…정파 문제 대기업노조에서 비롯된 것 아냐

둘째, 각종 비리와 부정부패 사건에 대해서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필자가 실제 조사해 본 바에 의하면 거의 사측의 적극적인 노무관리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즉 그동안 군부독재 시절의 탄압적 노무관리가 여러 한계를 드러내자 개별 노조간부의 회유방식으로 전환하였다. 그런 구조에서 발생한 비리 문제의 주범은 명백히 자본이다.

노조 내 오염된 간부들이 있다고 해서 노동조합이나 현장조직 자체를 매도하는 것은 계급적 판단도 아니고 이성적 판단도 아니다. 대기업노조들 역시 이런 사태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자체 정화노력을 최대의 과제로 삼고 있다. 적어도 민주노총에서는 비리와 관련되어 있다면 더이상 간부자격을 상실하는 것이 하나의 기풍으로 되어가고 있다.

노조비리가 생겼을 때 보수언론들은 집중적으로 노조 죽이기를 시도했다. 이른바 ‘도덕성’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역사상 언제 보수언론들이 민주노총을 도덕적이라고 했던 적이 있었던가? 과거에는 ‘빨갱이’ 아니면 ‘체제전복세력’으로, 최근에는 ‘귀족노조’로 바뀐 채 국민들로부터 고립시키려고 해 왔지만 이제 ‘비리노총’이라는 호재가 더 붙었을 뿐이다.

솔직히 어느 집단이건 부정이 없는 집단이 있는가? 최고 도덕성이 요구되는 종교집단도 예외는 아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무균집단을 원하는 것은 좋지만 현실성은 없다. 뼈를 깍는 혁신을 해나가야 한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인정하지만, 가증스러운 보수언론들의 위선적 호들갑에 대해 같이 맞장구칠 일은 아니라고 본다.

또한 정파 문제를 거론했지만 사실 정파 문제의 뿌리는 대기업노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과거 변혁적 지식인들이 현장에 들어가면서 정파가 발생했고 대기업노조 간부들이 영향을 받으면서 파생한 것이다. 정파 문제 자체도 초기에는 '보안' 문제나 '재생산' 문제를 고려한 유일한 운동조직 형태였다.

단지 이념적 분화가 생산적으로 발전되지 않으면서 분파적 경향을 띠게 되었고, 그것이 현장의 갈등을 초래한 부작용은 극복돼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대기업노조의 책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파운동 핵심지도자들의 겸허한 자기반성과 노력이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대중조작 정치의 성공작(?)

셋째, 진보정치연구소의 이번 발표는 근래 유행하고 있는 귀족노조론과 궤를 같이하고 있지 않나 하는 우려이다.

다 알다시피 신자유주의정책의 필연적 결과로 사회 양극화와 소외계층의 발생, 노동운동에 대한 무차별적 공격이 필연이다. 문제는 이러한 불만을 해소할 경제적 토대가 없는 노무현 정권은 대중조작의 정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과거 전두환 때의 3S 정책(섹스, 스포츠, 스크린), 노태우의 올림픽, 김대중의 로또복권, 노무현의 월드컵과 최근의 황우석 신화 만들기까지 정권은 절박한 민중들의 불만을 마비시킬 환상과 신화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런 류의 환상만으로도 부족하다고 느낀 정권과 자본은 이제 이이제이(以?制?)의 조작을 시도하고, 비정규직과 실업자들의 불만을 정규직으로 돌리는 대대적인 대중조작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나온 것이 ‘대기업노조 이기주의론’과 ‘귀족노조론’이다. 현대자동차가 그렇게 당했고 아시아나항공, 대한항공을 비롯한 거의 모든 대기업노조의 생존권투쟁이 그런 대중 여론조작에 의해 뭇매를 맞고 처참하게 무너졌다.

이런 여론조작은 같은 노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 노동자들을 비난하는 것을 당연시 한다. 이것은 일부 진보진영에게도 영향을 미쳐 지금 대기업노조를 어떻게 잘 비판하는가가 하나의 유행처럼 되었다.

‘노동당 안에서 성역이 두 개가 있고 그 중 하나가 민주노총’이라는 이야기는 별로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런 식의 어법은 보수 기득권층을 만나면 자주! 더 격하게! 나오는 이야기이다. 마치 민주노총이 거대한 권력인 것처럼 상정해놓고 비판하는 자신은 대단히 용기있고 양식있는(?) 사람이 되는 어법이다.

그러나 실상은 어떠한가? 민주노총 간부직은 구속·수배를 항상 감수해야 하고 재산상의 불이익을 감수해야 할 뿐 아니라 조합원의 의지를 조금이라도 반하면 바로 자리를 내놓아야 하는 자리이다. 간혹 위원장실을 점거 당하기도 하고 회의가 방해받는 것은 예사이다. 어떤 때는 참 이래도 되는가 할 정도의 조직이다.

보수언론들이 그렇게 높이 평가하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니다. 뒤에 비수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부 진보진영에서조차 그런 어법을 흉내내는 것은 노동계급에 대한 난폭한 언어폭력이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진보정치연구소의 이번 발표는 정권과 자본의 대중조작정치에 또하나의 성공작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대기업노조들, 나름대로 준비된 만큼 실천하고 있어

넷째, 노동운동의 계급적 원칙을 버리고 있다.

잘 보아야 할 것은 지금 현실은 노조가 뭘 더 얻겠다는 투쟁이라기보다는 노조를 지키고 기본적인 생존권적 요구를 지키겠다는 것이 대부분이다. 다시 말해 아직 초보적 수준의 요구에 그치고 있는 것은 신자유주의 공격을 막아내기 급급한 상황의 반영이다. 그 자체가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니고 노조의 기본 목적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기업노조가 좀더 전체 사회구성원을 위한 목표를 세우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또 현실적으로 그렇게 움직여가고 있다. 기대에 못미치고 미흡한 것은 있지만 대중조직은 그렇게 한발 한발 전진하는 것 아닌가?

비정규직투쟁 관련하여 지금 당장 총파업을 안한다고 비난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대기업노조들은 나름대로 준비된 만큼 실천하고 있다. 그들에게 준비된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것은 대중운동이 아니다. 진정 반성해야 할 것은 총파업 아니 그이상의 것을 할 수 있는 조직적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노동운동의 지도부들이 만들어가고 있는가이지, 현재 상태에서 대기업노조의 소극성을 비난하는 것은 일반인이라면 몰라도 지도부에 있는 사람은 책임회피가 될 수 있다.

설령 그렇게 해서 무리하게 대기업노조가 준비 정도를 넘어서 투쟁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에는 오히려 보수화되기 쉽다는 점에서 유해한 주장이기도 하다.

비난과 비판은 구분해야

지금 진보정치연구소는 비난과 비판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대기업노조에 대한 비판은 필요하고 또 혁신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위기의 10대 주범’처럼 제기할 문제는 아니다. 계급의 적들인 자본과 동일한 선상에 대기업노조를 놓는 것은 더더욱 어불성설이다. 대기업노조는 나름대로 열심히 일하고 자본으로부터 잉여이익을 쟁취해 소비를 통해 사회환원하고 있다. 또 실력만큼 사회민주화에 나서고 있다.

민주노동당의 부설연구소에서 조선일보식 참주선동을 따라하고 있다는데서 이번 사건이 주는 충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의도의 순수성을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지나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단지 뼈저린 반성을 촉구한다는 취지에서 충격요법을 고안했다면 이해할 수는 있으나, 지금처럼 대기업노조, 민주노총을 아무나 때려대는 사회적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그런 유행을 따라할 때는 아닌 것이다. 그것은 용기있는 행동이 아니라 현실 인식의 천박성을 드러내는 부끄러운 짓이다.

사실 민주노총의 활동이 민주노동당에 부담이 될 경우도 있을 것이다. 시위를 하면 그 불만은 민주노총에도 오지만 당에도 파장을 미치게 된다. 격렬한 시위는 당의 지지도 하락으로 바로 연결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보자. 민주노총 역시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로 인해 각종 입법활동에서 정치적 활동의 제약이 있는 것을 감수하고 있다. 그럼에도 배타적 지지방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계급적 운동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껀 올렸네'라니…!

대중적 인기만 생각한다면 보수언론과 영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진정 계급운동을 한다면 선택을 해야 한다. 다소 어렵고 힘들더라도 계급적 원칙을 지키며 미래를 보고 운동하는 것이 진보정당의 방향이다.

지금 민주노총 때리기는 진보정당의 연구소가 선택할 길이 아니다. 좀더 전면적인 정권과 자본의 음모를 폭로하고 노동운동의 과학적 활동계획을 내오라고 만든 것이 진보정치연구소이다.

진보정치연구소가 발표하고 나서 어떤 의원이 ‘한껀 올렸네’라고 했다고 한다. 당에서 주선한 민주노총과의 간담회 자리에도 진보정치연구소 책임자는 불참했다고 한다. 참 안타까운 현실이다.

당이 더 성장하도록 또 노동계급이 더 성장하도록 서로 돕는 방법은 ‘10대 주범’식의 ‘한껀식’ 비난이 아니라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는 정확한 비판이다. 좀더 혁신을 바라는 진보정치연구소의 충정이라고 이해하고 싶지만, 그전에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 질 필요성이 있다. 좀더 성숙한 모습을 기대한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