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경규 민주노총 투쟁단장을 비롯 WTO 반대 한국민중투쟁단 11명에 대해 지난 19일 홍콩법원은 구속을 결정했다. 이에 23일 2차 심리 재판을 앞둔 지난 22일, 민주노총 공공연맹, 국제노동자교류센터 활동가들과 함께 홍콩으로 향했다.

"당신들이 WTO 반대투쟁 한 한국인들의 친구냐? "

홍콩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 택시를 타고, 우콰이샤 청소년 수련관(Wu Kwai Youth Village)으로 향했다. 택시 기사는 우리가 목적지 근처인 지하철역 이름을 대자마자 숙소이름을 이야기했다. 우콰이샤 수련관으로 가는 게 맞냐며, 한국인이면 WTO 각료회의 저지 투쟁을 했던 사람들이 당신들의 친구냐고 물었다.


우리가 "Yes"라고 하자 그 택시 기사는 "Thank you"라고 다시 인사했다. WTO를 막으려는 투쟁에 한국인이 앞장서줘 고맙다는 뜻이다. 한국 민중투쟁단의 활약이 홍콩민들에게 절실히 다가갔음을 현지에서 처음 느낀 순간이었다.

새벽1시께 도착한 숙소는 철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숙소에 있는 투쟁단에 전화를 걸었더니 현관 앞에서 "We are Korean. WTO!!"라고만 얘기하면 된다고 했다. 현관 앞에서 "We are Korean. WTO!!"이라고 얘기했더니 마치 '열려라 참깨'라는 주문처럼 철문은 활짝 열렸다.

숙소에는 활동가 1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모두 홍콩 시내인 SOGO 백화점 앞에서 구속자 석방을 위한 촛불집회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촛불집회 참가자들은 새벽3시께가 되서야 숙소로 돌아왔다.

돌아온 투쟁단은 영사관에서 여전히 신원보증을 거부하고 있으며, 홍콩검찰은 11명 구속자에 대해 경찰폭행 및 폭력행위를 추가 기소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분위기는 그야말로 침울했고, 투쟁단들의 얼굴에는 피곤이 적나라하게 묻어났다.

DOWN DOWN WTO!!


2차 심리 재판이 열리는 23일에는 오전10시부터 홍콩 쿤퉁(Kwun Tong) 법원 앞 집회와 재판 방청이 예정돼 있었다. 23일 오전10시, 쿤퉁 법원앞에는 홍콩민중동맹(HKPA)과 시민들이 나와 "DOWN DOWN WTO", "release(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외쳐댔다. 또 "지지합니다"라는 한국말로도 구호를 외쳤다. 한국민중투쟁단의 WTO 반대 투쟁을 지지한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오후2시께까지 지치지 않고 구호를 외쳤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자국의 언어로 부르는 등 집회를 이어갔다.

홍콩 현지인에 따르면, 한국 민중투쟁단이 홍콩의 집회문화까지 많이 바꿔놓았다고 한다. 홍콩의 노동시민사회단체들의 집회는 집회 예정 시각까지 자리만 지킨 채 구호 몇개 외치는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민중투쟁단의 홍콩 집회 이후, 시민들이 저절로 집회에 참석하게 됐고, 줄기차게 구호를 외치는 것은 물론, 노래를 부르고, 집회 참가자들이 스스로 플랭카드, 북, 탬버린 등의 악기를 들고 나와 집회에 이용한다고 전했다.

재판 예정시간인 오후 2시30분, 재판정은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참관자들로 가득찼다. 갑자기 재판장이 소란스러워졌다. 열린우리당 의원 3명이 신원보증을 서주겠다며 재판장에 들어왔고, 홍콩 현지 언론들이 이들 의원들에게 인터뷰를 시도하자 참관자들이 분노한 것. 참관자들은 그들은 농부를 죽인 사람들(쌀비준안 통과)이라며 인터뷰를 할 필요가 없다고 외쳐댔다. 결국 열린우리당 의원에 의한 신원보증은 이뤄지지 않았다.

2시50분께 구속자 11명에 대한 재판이 시작됐다. 재판장이 입장하자 참관자들은 또다시 "release", "지지합니다" 등의 구호를 외쳐댔다. 재판이 시작되자 검찰쪽은 경찰이 가진 집회 현장 사진과 비디오테잎 등이 수천개에 달해 조사를 위한 물리적 시간이 부족하다며, 1주일간 추가 조사 기간을 더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변호사쪽은 불구속 상태에서의 추가 조사를 위한 보석을 신청했다. 이에 재판부는 한국 농민들의 집회가 경미한 수준이었고, 검찰이 요구하는 시간까지 구금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길다며 각 개인당 홍콩달러 2,500달러(약 33만원)의 보석금으로 보석을 허가했다.

석방된 11인을 기다리는 11송이의 장미


보석이 받아들여지자 재판정은 환호를 지르는 참관자들로 또다시 들썩였다. 이에 따라 구속자 11명은 홍콩 법원에 여권을 반납하고, 유치장을 나설 차비를 했다. 불구속 수사가 결정되자 법원 밖 역시 환호와 기쁨으로 뜨거웠다. 법원 정문 앞에는 홍콩 현지 신문, 방송사 등 취재 열기가 뜨거웠고, 홍콩민중동맹과 홍콩 시민들 역시 "DOWN DOWN WTO"를 외치며, 구속자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한 홍콩시민은 꽃 11송이를 준비해 정문 앞에서 한국 민중투쟁단을 기다렸으며, 홍콩민중동맹의 한 시민은 구속자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한국어로 '석방을 환영합니다'라는 글자를 써줄 것을 한국 민중투쟁단에 부탁하기도 했다.

한편 구속자들은 아이덴티피케이션 퍼레이드(Identification parade, 범인 확인을 위해 구속자들과 비슷한 여러 후보들을 일렬로 세우고 증인 또는 피해자가 범인을 지목하는 제도)에 대비해 취재진을 피해 얼굴을 가리고 법원을 나갈 방침을 정했다. 민중투쟁단 11명은 아이덴티피케이션 퍼레이드 수사를 거부하고 있지만 취재진들에 의해 얼굴이 알려질 경우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원 밖에서 구속된 투쟁단 11명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홍콩시민들과 취재진들을 그대로 따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에 양경규 민주노총 투쟁단장은 짧게 기자회견을 진행할 것을 약속했다.

양경규 위원장은 "어렸을 때는 브루스 리(이소룡)를 통해 홍콩을 알았고, 나이가 들어서는 영화배우 등을 통해 홍콩을 알았다. 그러나 이번 WTO 투쟁을 통해 진정 홍콩에 대해 자세히 이해할 수 있었다"며 "홍콩을 자세히 안 것은 홍콩 민중들의 마음과 시민들의 생각을 통해서였다"고 밝혔다. 양 위원장은 "홍콩민중동맹을 비롯한 농민, 노동자, 시민들의 연대와 성원에 깊이 감사한다"며 "홍콩 민중들과 함께 한 투쟁이었기 때문에 WTO 홍콩각료회의가 성과없이 끝난 것"이라고 밝혔다.

양 위원장은 기자회견을 마친 뒤 홍콩민중투쟁 농성대오에 참가해 "동지들의 연대와 지지로 풀려났다. 이번 WTO 저지 투쟁을 통해 홍콩의 동지들이 한국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고 했으나 사실은 우리가 홍콩민중들로부터 많이 배웠다"며 "세계 자본주의로부터 홍콩을 지키려는 여러분들의 투쟁의지가 너무 순수해 감동을 받았다"고 밝혔다. 양 위원장은 "WTO를 반대하려는 세계 민중들의 투쟁을 어떤 식으로든지 막아 자본 마음대로 하려고 해도 민중들의 투쟁은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홍콩민중동맹은 담요와 옷가지 등을 민중투쟁단에 전달하고, 이후 투쟁에도 함께할 것을 밝혔다. 홍콩민중동맹은 그간 촛불집회 등을 통해 모금한 금액을 민중투쟁단의 보석금에 보태기도 했다.

민중투쟁단 11명은 이후, 다음 재판까지 주거해야 할 쉼오이교회(Shum oi church)로 향해 서로를 격려하며, 앞으로 남은 재판과 이후에도 계속될 WTO 저지 투쟁에 함께 할 것을 결의했다.

한국인 신원 보증 거부한 한국 정부
결국 홍콩 천주교 대주교 및 시민활동가 신원보증으로 풀려나
WTO 홍콩 각료회의 반대 투쟁으로 홍콩경찰에 의해 11명의 한국민중투쟁단이 구속됐음에도 한국 정부가 오히려 신원보증을 거부하는 등 이들을 외면하고 있어 비판의 목소리가 고조되고 있다. 홍콩주재 영사관은 지난 19일 열린 1차 심리에서도 한국민중투쟁단 11명에 대해 도주의 우려가 있다며 신원보증을 거부해 구속이 결정된 바 있다.


이에 홍콩에 잔류한 민중투쟁단들과 홍콩민중동맹, 홍콩 시민들은 쿤퉁 법원 앞에서 집회 및 노숙 농성 등을 벌이며, 한국 정부의 책임 방기와 구속자 석방을 촉구했다. 한국에서도 중국대사관 앞에서 구속자 석방과 한국정부의 태도를 비판하는 집회를 잇달아 개최한 바 있다.


그러나 영사관은 지난 23일 열린 2차 심리에서도 또다시 신원보증을 거부해 물의를 빚었다. 특히 외교통상부는 신원보증을 서라는 지침을 내려보냈다고 밝혀 홍콩에 남아 있는 민중투쟁단 및 구속자들이 희망을 가졌으나 영사관에서 구체적인 지침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원보증을 서지 않아 혼선이 빚어졌다.


결국 신원보증은 홍콩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자격을 갖추고 있어 조셉쩐(陳日君) 천주교 홍콩 대주교와 장대업 AMRC(Asia Monitor Resource Center) 활동가의 신원보증으로 보석이 결정됐다.


이에 대해 박민웅 전국농민회총연맹 사무총장은 "우리의 투쟁은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투쟁으로 홍콩의 노동자, 농민, 시민들의 성원과 지지로 함께 한 투쟁이었다"며 "그럼에도 구속된 농민과 노동자들을 철저히 외면한 한국정부는 국민을 버리는 태도를 보여줬다"고 비판했다. 박 사무총장은 또 "한국정부의 태도에 대해 이후 입장을 정리해 투쟁으로 분명히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WTO 반대 한국 민중투쟁단은 오는 26일 오전11시 외교통상부 앞에서 민중투쟁단 구속사태를 수수방관하고 책임을 회피한 정부를 규탄하고, 조속한 석방을 위한 노력을 촉구하는 집회와 기자회견을 가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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