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종이 다르고, 조합원 수가 적다는 이유로 노동조합 만들기조차 힘들었던 중소영세비정규 사업장이 ‘지역일반노조’ 깃발 아래 하나가 되고 있다.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기치로 지난 2000년 4월 ‘부산지역일반노조’가 수면 위로 부상했다. 전국 최초였다. 노동계 주변에서는 많은 의혹의 시선을 던졌다. “산별로 가야 하는데 희한한 놈(?)이 나왔네?” “또 하나의 조직을 만들어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경계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후 6년여 활동을 통해 일반노조는 민주노총 산하 26개 노조 6천여명의 조합원과 전체적으로는 50개 노조, 1만1,719명(비정규센터 추산)으로 조직되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학생-노동-당’ 변하지 않는 운동의 일념

‘새 술은 새 부대에.’ 중소영세비정규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한 첫 단추를 꿴 장본인은 부산지역일반노조 정의헌(52) 지도위원이다. 지역노조 초대 공동위원장에 이어 연임을 계속한 정 지도위원은 올해초 경선에서 이국석 현 위원장에게 자리를 내줬다. 12월8일 오후 부산역 광장 앞 시국농성장을 붙박이처럼 지키고 있는 정 위원을 만났다. 일반노조, 민주노총, 민주노동당 등 3동의 천막은 정 위원의 이력을 설명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부산지역일반노조 전 위원장, 민주노총 부산본부 전 본부장, 민주노동당 부산시당 현 비정규철폐운동본부장 등등.

그는 1970년대 학생운동사의 한 획을 그었던 ‘77년 4월 서울대 시위’를 주도했던 장본인이다. 서슬퍼런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긴급조치에 반대했던 선후배들이 차츰 세월의 흐름에 따라 ‘부나방’처럼 권력과 명예를 쫓을 때 자기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정 위원은 80년초 경기도 안산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해고되면서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더이상 취업은 불가능했고, ‘이전팀’을 꾸려 1987년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왔다.

87년 부산지역 민주항쟁을 주도했던 인물로 잘 알려진 정 위원. 그는 매서운(?) 인상 덕에 ‘독수리 아저씨’로 통했다. 당시 정 위원이 맹렬한 활동을 한 부산노동자연합(부노련)은 노단협과 함께 부산지역 노동운동계의 양대 축이었다. 20년, 30년 숱한 위기와 곡절 속에서도 한결같이 현장을 지키며 노동과 진보의 한 길을 걷는다는 것. 그것은 거의 ‘수도승’의 경지에 가깝다.

투쟁의 현장에 올곧게 서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는 권력과 명예를 쫓는 이들과는 격이 다른 사람이다. 오랜 세월 운동의 고비마다 유혹과 흔들림도 있었을 텐데. “다른 일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사람이 변변치 못해서 어디 불러주는 데도 없던데요.” 겸연쩍은 웃음을 짓는 정 위원은 곧바로 형식적 민주화 이후의 운동의 과제를 설명하며 자신의 과제도 던졌다. “노동자 계급의 단결과 각성, 정치세력화를 위해 싸우지 않고서는 할 일을 다했다고 보기 어렵겠죠.”


‘부산지역일반노조’ 건설의 주역으로

주제는 이제 ‘부산지역일반노조’로 바뀌었다. “IMF 뒤로 정리해고가 일상화되고 ‘지역연대’가 허물어지면서, 비정규 투쟁이 본격화 되어야 한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20년 가까이 부산에서 운동을 하며 보고 느낀 부분을 정 위원은 이렇게 설명했다. 1년 내내 이웃하고 있는 노조간부들끼리 술자리 한번 가진 적이 없고, 조합원 총회를 해도 상급조직의 간부들은 초청받아도 이웃노조들은 배제되는 상황. 옆 사업장에서 파업이 일어나도 한번 들여다보지도 않는 ‘계급적 연대’의 부재. 극단적으로 중앙의 지침이 없으면 불이 나도 불끄기를 두려워하는 상황 등등.

“중앙은 관료화 되고, 지역과 현장은 무력화 되었죠. 실종된 ‘지역연대’의 기풍을 회복하기 위해 ‘일반노조’라는 새로운 그릇이 필요했던 것 입니다.” 부산지역일반노조는 정규직 중심 노동운동의 제한성과 업종·연맹별로만 단결하고 있는 현실을 극복하자는 지역 활동가들의 의지가 배경이 되었다. 부산지역일반노조는 2000년 조선비치호텔 룸메이트 비정규직 투쟁과 지난해 롯데 비정규투쟁을 통해 지역 중소영세 비정규직의 단결 투쟁의 중심으로 우뚝 섰다. 이러한 헌신적 활동은 일각의 불신과 오해를 씻고 민주노총 부산본부 내에서도 지역일반노조가 ‘운동적 정당성’을 인정받게 되기에 이르렀다.

“지역일반노조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데 부산지역일반노조는 개척자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지금은 좀 민망하지만.” 그렇다. 사업장 규모의 영세성과 1년 내내 개별교섭과 투쟁이 끊이질 않으면서 활동가들은 지쳐가고, 반듯한 노조활동의 여력은 점차 떨어지는 상황. 일반노조의 일반적인 어려움과 한계지점으로 인식되고 있는 내용들이다.

부산지역일반노조도 마찬가지다. 현재 부산지역일반노조는 500여명 안팎의 조합원으로 정체 상태이며, 40여 사업장(현장위원회)에 평균 10여명의 조합원이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절박한 요구 때문에 찾아왔다가 투쟁이 끝나면 우수수 빠져 나가는 ‘긴급피난형’ 유형이 많습니다.” 한 직종의 신망 있는 사람이 들어오면 ‘고구마 줄기’처럼 조직이 확대되다가도 투쟁이 끝나면 사업장과 함께 조합원들이 탈퇴하는 상황.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우선 활동가 대오를 구축하고, 더디고 힘들더라도 현장 간부를 육성해야 합니다.” 그래야 안정적 회의구조, 정기적인 교육, 연대투쟁 등 반듯한 노조활동이 가능하다는 설명이었다.

부산지역일반노조 규약에는 ‘공동위원장제’, ‘집행위원 선출제’, ‘현장위원회’ 등 기업별노조의 부정적인 유산을 깨기 위한 조직운영 방식을 도입하고 있다. 그러나 이상과 현실은 늘 충돌하며 ‘부정의 부정’ 과정을 밟는 것일까? 올해 공동위원장제는 단일위원장 체계로 변경되었고, 현장위원회도 규약에서 빠졌다.

일반노조 ‘전국단일노조’ 건설을 향해

일반노조는 ‘전국일반노조대표자회의’를 통해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있다. 2003년 두달에 한번씩 회의를 하던 것도 올해부터는 한 달 주기로 바뀌었다. 그만큼 일반노조의 전국단일조직 건설을 향한 움직임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을 반증한다. “지역연대를 확대하자는 문제의식에 동의하는 단체라면 상급단체와 업종에 관계없이 모이자는 것입니다.”

정 위원은 가칭 ‘전국(지역·업종)일반노조협의회(준) 조직위원장도 맡고 있다. “네 땅 내 땅 구분할 것 없이 누가 조직하던 미조직 사업장을 조직하면 그것이 잘하는 것 아닙니까.” 산별노조로 가지를 뻗기에는 현재 노조 조직률 10%는 미흡한 상황이라는 것. 미조직 노동자의 확대가 민주노조 진영의 핵심 과제인 것을 부인할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조직률 20%, 조합원 3백만명 가량은 되어야 산별로 50만명씩 분화하더라도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거죠.” 산별조직과의 관계에서 발생했던 불필요한 구획다툼을 뛰어 넘어 계급적 지역연대를 통해 전국 중소영세비정규 노동자의 전국조직을 세우는 일. 전국일반노조협의회는 내년 2월 출범을 목표로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대중의 열정 불러올 당원 ‘헌신성’ 절실

민주노동당 부산시당 비정규철폐운동본부장을 맡고 있는 정 위원에게 당의 각 지역위원회의 ‘비정규센터’ 전환에 대한 입장을 물어봤다. “이해삼 중앙당 비정규본부장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공단지역은 비정규센터를 구축하고, 도심지역은 주민공동체 공간으로서 역할을 해야겠죠.” 노조와 당이 어우러져 민주노동당 각 지역위원회가 노조지부사무실과 비정규센터, 당원의 활동공간 및 주민·노동자의 공동체로서 ‘사통팔달’ 역할을 해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정 위원은 조심스레 서울지역비정규노조연대회의(서비연)가 하나의 지역노조로 나아가는 것도 제안했다. "통합해서 2~3천명의 지역조직으로 함께 가면 활동가는 결집되고, 권역별 사업집행 책임을 나누면 조직활동이 훨씬 효율적이지 않을까요.” 서울의 경우, 조합원 기백명 수준의 업종별 지역노조들이 굳이 각자 조직을 유지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비정규운동을 대중적 운동으로 확산시키는 데 있어 서울이 핵심이고, 관건입니다.”

민주노동당은 지난해 중앙위를 통해 ‘비정규 사업’을 전당적으로 벌이기로 결의한 바 있다. 정 위원은 비정규 사업이 잘 되지 않는 것과 관련 지도부에 대한 비판보다는 노동자, 활동가 당원 스스로의 책임이 더 크다고 강조했다. “정파 문제와도 관련이 있지만 ‘조합권력’에 치중한 활동으로 협소한 범주에 자신을 가두고 있지는 않는 지 반문해 보아야 합니다.”

민주노조 운동의 사상·이념적 내용과 지평을 심화·확장하는 것. 대중의 열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헌신성’이 매우 절실하다는 정 위원. 그의 끊임없는 화두는 ‘지역’, ‘현장’, ‘연대’, ‘헌신’으로 모아졌다. 민주노조 운동의 복원을 통해 노동해방, 인간해방 세상을 향해 달려가야겠다는 열망. “민주노동당의 일꾼들이 민주노조 운동을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해야 합니다. 지금이 80년대 초기 활동가들의 역할을 수행할 시점입니다.”

87년 노조운동 경험도 없는 상황에 견줘 지금은 민주노동당도 있고 여러 경험과 사례가 축적이 되어 있다는 설명이었다. 제대로 된 노동운동, 민주노조의 앞날과 민주노동당의 전망과 관련 지금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기라는 정 위원. ‘마지막 불꽃’을 태우기 위해 책임있는 자세로 임하겠다는 정 위원의 결의 속에는 꺼지지 않는 청년의 열정이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정의헌 부산지역일반노조 지도위원은 1992년 서른아홉의 나이에 늦깎이 결혼을 했다.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 김영숙씨(49)와는 울산의 전교조 선생님 노옥희씨의 소개를 통해 91년 여름 첫 만남이 이뤄졌다. 당시 정 위원은 부노련 상근자였고, 아내는 울산에서 전교조 사무국장을 맡고 있었다. 일에 파묻혀 지내던 나날. 91년 연말 대봉고무 노동자 권미경 열사가 ‘30분 일 더하기 운동’ ‘구사운동’에 항거하며 신발공장 옥상에서 투신했다. 당시 정 위원은 권 열사 장례투쟁위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권 열사가 팔뚝에 쓴 유서를 정 위원은 잊지 않고 있었다. “사랑하는 나의 형제들이여! 나를 이 차가운 땅에 묻지 않고 그대들 가슴 속에 묻어주오. 그때만이 우리는 완전한 하나가 될 수 있으리.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 더이상 우리를 억압하지 마라.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다.”


운명 같은 만남이었을까? 아내가 장례식장에 찾아오면서 속도는 급진전되었고, 다음해 결혼식을 올렸다. 정 위원은 이를 “열사가 맺어준 인연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결혼해서 아내는 집안 생계뿐만 아니라 올 5월 돌아가신 노모의 병수발에 정성을 다했다. 5남매의 장남인 정 위원의 아내에 대한 믿음과 사랑은 각별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을 이해해주고, 불효자란 마음의 짐도 덜어 주고 무조건, 무조건 고마울 따름이에요.”


정 위원에게는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이 있다. 아토피가 심해 고생하는 아들을 위해 정 위원은 단식수련원까지 갔다. 일주일 단식의 효과로 아들의 병은 많이 좋아졌다. 백약이 무효였는데 참 신기한 일이었다. 정 위원이 틈틈이 보고 있는 <녹색평론>을 통해 ‘생태근본주의’를 의미있게 받아들이는 것도 이 때문일지 모른다. “자본주의 체제의 극복과 함께 문명사적 대안을 고민해야 합니다. 삶의 양식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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