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실망을 드릴지 모르겠지만….” ICEM(국제화학에너지광산일반노조연맹) 주최 비정규 국제세미나 참석차 한국을 찾은 3명의 유럽 각국 노조 비정규 담당자들은 유럽의 경험을 토대로 한국의 비정규 문제를 푸는 아이디어를 달라는 질문에 이런 말을 먼저 꺼냈다.

지난 28일 저녁, 기자와 만난 이들은 유럽에서의 비정규직에 대한 이해가 한국과 너무 다른 데다 강력한 산별노조와 사용자단체가 있고, 법이나 단체협약 등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질서’가 형성돼 있기 때문에 사회 전반적인 틀에 대한 이해 없이 단순 법 조항이나 단체협약 내용만 갖고 해법을 찾기는 어렵다고 했다.

ICEM에서 비정규 부문을 담당하는 제리 비아트(전 영국GMB노조 사무총장)씨는 “지금 내 딸도 대학을 졸업한 뒤 파견업체를 통해 임시직으로 근무하고 있는데 영국에서 비정규직은 정규직이 되는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고, 또한 육아나 학업 등의 이유로 비정규직 취업을 원하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물론 영국에서도 정규직이 되고 싶지만 시장 상황에 따라 비정규직이 된 경우도 있다”며 “이들에 대한 낮은 임금, 사회보험 혜택 배제, 단체협약 적용제외 등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 경우가 바로 영국의 파견노동자인데, 우리나라 비정규직 일반적 상황과 비슷하다. 그런데 영국에서 차별받는 파견노동자는 전체 노동력의 4%에 불과하고 늘어날 가능성도 별로 없다. 제리 비아트씨는 “파견노동자를 많이 쓰는 청소, 경비 등의 업무가 힘들어 젊은층이 취업하려 하지 않고 주로 이민자들이 하기 때문에 그 규모가 더 늘어나지는 않을 것이고, 오히려 파견노동자보다 더 취약한 자영업자 문제가 크다”고 말했다.

다른 유럽국가들의 상황도 비슷하다. 네덜란드FNV제조업노조 파견노동 담당자인 한 베스터호프씨는 “영국의 상황과 같고, 덧붙이자면 네덜란드의 경우는 방학기간 3개월여를 일하려고 폴란드 등에서 건너오는 학생들, 즉 단기계약 이주노동자와 시험과 시험 사이에 학비를 벌려고 하는 네덜란드 학생 등이 파견업체 등을 통해 일자리를 찾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네덜란드에서 파견규모는 정확히 잡힌다. 파견업체는 정부에 등록돼 있어 정부로부터 규제를 받기 때문이다. “파견노동자 가운데 여성이나 장애인, 소수민족이 몇명인지 셀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덴마크도 그러하다. 조르겐 주울 라스무쎈 덴마크전기공노조 사무차장은 “일시적인 생산량 증가 등과 같이 파견노동자 사용의 불가피성도 있다”며 “그런데 현대사회의 기술발전 속도에 따라 노동자들의 기술훈련도 함께 이뤄져야 하는데 파견업체에서는 안정적인 훈련이 불가능하니까 사용자들이 파견을 통한 단기채용을 원치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덧붙여 그는 “대부분 유럽국가들에선 경기변동 등 불가피한 상황에 비정규직을 쓰는 사례가 많다”며 “인건비를 절감하기 위해, 해고를 쉽게 하기 위해 비정규직 사용을 남용하는 한국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사회적 약속’은 지켜진다

EU 국가들 평균 파트타임 고용비율이 1991년 13.9%에서 2000년 17.7%까지 늘어나는 등 유럽에서도 비정규노동의 규모가 증가하자 EU는 파트타임 지침(97년), 기간제노동 지침(99년)을 채택했다. 물론 이 지침은 유럽연합의 사회적 동반자인 ETUC(유럽노동조합총연맹)와 UNICE(유럽산업사용자총연합단체연합) 간 협상을 통해 채택됐다.

이 지침의 핵심은 ‘동등대우’인데, 유럽 각국들은 이 지침의 내용을 법이나 단체협약을 통해 반영하고 있다.

네덜란드FNV노조의 한 베스터호프씨는 “노동자들 간 동등대우를 자발적으로 알아서 해주려는 사용자는 없지만 법이나 사회적으로 강제가 되면 지켜진다. 거기엔 이견이 없다”며, 법이 있어도 ‘탈법적 우회로’를 찾기 급급한 한국의 상황에선 ‘부러울 수밖에’ 없는 얘길 해줬다.

덴마크전기공노조 라스무쎈씨도 “합의사항을 지키지 않는 업체는 노동법원에 고소하고, 그래도 안 지키면 또 고소하고…, 이런 것이 축적되면 합의는 지켜지게 돼 있다”고 한다. 실제 덴마크는 산별노조도 강하고 사용자단체의 대표성도 강하다. 단체협약은 체결되면 지켜야 한다는 질서의식도 강하다. 라스무쎈씨는 “만약 사용자단체에 가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단체협약을 지키지 않는 업체는 노동법원에 고소하면 지게 돼 있다”며 “또한 그 업체를 상대로 하는 단체행동도 합법”이라고 말했다.

ICEM 비아트씨말도 의미심장하다. “그건 사회성숙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만약 합의사항이나 법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사회는 아나키(무정부) 상태로 간다. 단기적으로 사용자한테 득이 될지 모르지만 결국 부메랑이 돼 돌아온다는 걸 사용자도 안다.”

동등대우가 왜 사용자에게도 유리한지에 대해 네덜란드FNV노조의 베스터호프씨는 축구강국답게 축구에 빗대 이렇게 말했다. “축구는 11명의 선수가 뛰는 게임이지만 현장에는 언제나 벤치를 지키는 후보선수들이 있다. 후보선수들이 당장 게임에 투입되지 않는다고 출전선수들과 대우를 달리한다면, 그 후보들은 출전을 하더라도 제 실력을 십분 발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결국 구단의 손해로 돌아간다. 비정규직에 대한 동등대우 원칙도 그렇다.”

이런 사회적 의식이 전제돼 있기 때문에 유럽의 노조들은 불가피한 유연성을 인정하는 대신 더많은 안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따라서 78주(1년6개월)간 고용과 해고가 자유로운 임시계약을 체결하고, 이어 2년간 파견업체와의 기간제 근로계약을 한 뒤에도 계속 고용할 경우에 대해서만 ‘무기근로계약’으로 인정하는 네덜란드의 사례를 “우리도 3년간 기간제를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하자”(정부안)는 근거로 제시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 ICEM(국제화학에너지광산일반노동조합연맹) = ICEM은 113개국, 410개 노동조합, 약 2,000만 명으로 조직된 국제노동단체다. 사무소는 벨기에의 브뤼셀에 두고 있다. ICEM의 조직대상 산업은 △에너지 산업 △석탄 산업 △채석장을 포함한 기타 광업 △화학 산업 및 바이오 과학산업 △펄프, 제지 산업 △고무 산업 △유리산업 △요업(窯業) △시멘트 산업 △환경 서비스 산업 △서비스 및 기타 산업이다.


ICEM은 지난 1996년 1월 ICEF(국제화학에너지일반노련)과 MIF(국제탄광광산노동자연맹)이 합병된 조직인데, 노동자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이익 옹호 및 신장, 모든 형태의 노동착취에 대한 가맹조직의 투쟁 지원, 노동자의 국제적 연대 증진 등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합병대회의 방침인 ‘통일과 조직의 힘’ 첫머리에서 ICEM은 이렇게 쓰고 있다. “국가의 경제 국경은 없어지고 산업부문의 경계도 사라지고 있다. 대규모의 다국적기업이 세계를 법인화할 때 세계의 노동자는 다시 뼈저린 교훈을 배우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의 상처가 모두의 상처가 된다는 교훈이다. 이런 발상에서 명백해지는 결론은 노동자는 국경을 초월해서, 그리고 더 나아가 종전의 산업부문의 경계를 넘어서 스스로 새로운 연대 체제를 조성하여야 한다.”


◇ 네덜란드FNV제조업노조 = 모든 민간부분의 제조·서비스 업종 노동자들을 조직대상으로 하는 이 노조는 조합원 50만명으로 네덜란드에서 가장 큰 노조다. 물론 정규직의 40% 수준의 임금을 받는 파견노동자, 연금수급자, 병가 중인 노동자들도 가입돼 있고, 이들이 전체 조합원의 15%를 차지한다. 빔 콕 네덜란드 전 총리가 이 노조 출신이다.


◇ 덴마크전기공노조(DEF) = 공공, 민간, 건설, 전력 등 모든 분야에서 일하는 숙련전기공 3만여명이 조직된 노조다. 직업별노조인데, 덴마크에 있는 숙련전기공의 90%가 조직돼 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