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떤 나라, 어떤 경제를 바라는가. 물론 우리는 평화의 나라를 원한다. 그래서 휴전 선 위 아래로 갈라져 서로 총부리를 겨누던 남과 북이 화해 협력을 이루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탈분단의 시대를 누구보다 희망하고 환영한다. 그렇지만 남측의 “내부 냉전”은 내부 평화로 가고 있는가. 민주 없는 평화가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1987년을 전환점으로 한 개발 독재로부터 민주주의로의 이행에 환호했다. 그리고 한 때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병행 발전하는 길로 가자는 말에 귀가 솔깃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어떤 민주주의, 어떤 시장경제인가, 시장의 포로가 된 민주주의인가 아니면 인민 주권이 관철되고 민주주의 속에 뿌리 내리는 시장경제인가, 다시 말해 삼성의 공화국인가 공화국 속의 삼성인가 하는 것이다. 

재균열의 시대가 왔다
 

우리는 1987년을 분기점으로 분명 민주화의 시대로 들어왔고 탈냉전 ‘정상국가’로 나아가는 도정에 있다. 그렇지만 ‘정상국가’로 가는 길은 동시에 ‘두 국민’으로의 분열 국가로 가는 길이다. 이 이중성을 직시해야 한다. 냉전 반공의 분단국가 건설과 개발 독재의 돌진적 근대화 시대에 이어 이른바 ‘정상국가’로 가는 탈냉전 자유민주주의 시대는 통합의 시대인 동시에 다시금 재균열의 시대다.

우리 경제는 지금 다면적인 파행적 양극화의 함정에 빠져 있다. 이 땅에 애착을 갖고 인간답게, 시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살아가고자 발버둥치고 있는 보통 사람들은 생존권의 위기에 내몰리고 있고 그 삶의 근거와 터전은 뿌리 뽑히고 있다.87년 체제 초기 10년의 최대의 과실은 돌진적 산업화 시대 온갖 특혜와 특권으로 성장한 바로 그 재벌에게로 돌아갔다. 97년 위기와 구조조정 이후 경제권력의 ‘공(ball)’은 다시 국제 금융 자본과 재벌 연합의 수중으로 옮아 갔다.

이는 지난 날 국민 대중이 경제 근대화의 비용을 가장 무겁게 떠안았던 사실에 이어서 해방 60년 한국현대경제사상 최대의 구조적 모순으로 손꼽아야 할 사건이다. 민주화 시대 새로운 정당성의 위기에는 산업화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정당성의 위기가 중첩되어 있다. 민주화의 사회경제적 실체를 채워 넣은 자유화, 양극화 시대 무책임 자본에 대한 국민 대중의 분노와 저항의 뿌리에는 이 중첩되고 누적된 모순이 존재한다.

가히 “자본의 정치적 해방”의 시기라 불러도 좋을 오늘 민주화 이후 한국 자본주의에서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증시는 전례 없는 호황을 구가하고 있는 데도, 아니 바로 그 때문에 투자의 부진과 양극화가 지속되고 있다. 천문학적 공적 자금을 투입하여 금융 구조조정을 단행하였으나 은행은 헐가로 외국 투기 펀드에 처분하였고 산업 금융체제는 붕괴되었다. 개발 연대 이래 고질병인, 국내 산업 연관이 얕은 가공 조립형 성장 방식이 재생산되고 있고 대기업에 의한 하청 중소기업의 수탈은 여전하다.

삼성과 같은 슈퍼 재벌의 무법, 무책임의 횡포가 국가권력의 비호 아래 자행되고 있다. 한강의 기적과 세계 속의 한국경제를 일구는 데 가장 무거운 부담을 져온 근로 대중은 고용 불안과 생존권 위기 상황에 내몰려 있다. 재벌의 부는 근로 대중의 생활 향상으로 확산, 균점되는 것이 아니라 주로 국제 금융 자본이 뜯어 먹고 있다. 세계 속의 경제 대국과 복지 후진국의 비대칭 구조가 지속되고 있다. 

참여정부 집권 후반기와 ‘깨어진 약속’

집권 후반기를 풀어 가는 참여 정부의 모양새를 보면서 나는 이제 20년을 내다보는 한국 민주주의의 한 순환이 끝났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우리는 진작부터 김영삼 정부의 어설픈 ‘세계화’ 전략, 그리고 김대중 정부의 ‘디제이노믹스’와 대면하면서 한국이 시장주의적 ‘리틀 아메리카’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보았고 또 이에 대해 항의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노무현 정부는 참신하기도 했고 어디 빚진 것도 없고 하니 이 정부의 국정 운영의 비전과 전략은 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를 걸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기대와 민주 정부의 약속은 깨어지고 말았다.

노무현 대통령이 무력하게 “이미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간 것 같다”고 말했을 때 우리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참여 정부”를 문패로 내세운 이 국정 최고 책임자가 한나라당과 대연정을 하자는 희극적인 제안을 내어 놓았을 때 또 그런 생각을 했다. 10.26 재보궐 선거에서 국민들이 참여 정부에 배신감을 느끼고 한나라당이 표를 싹쓸이하는 참담한 결과를 보았을 때 다시 그런 생각을 했다. 안기부 X 파일이 적나라하게 폭로한 정관언재(政官言財) 4자간의 더러운 유착 사건 그리고 금산법 위반 사건으로”슈퍼 무법, 무책임 재벌 총수 이건희를 국회와 시민 공론의 장으로 불러내고 삼성 재벌을 길들일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는 것을 보고 확실히 그런 생각을 했다.

복잡한 “고등 수학”을 빌릴 것 없이, 헌법과 관계 법률에 의거하여 대통령이 결단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삼성 재벌을 국민의 기업으로 거듭나게 하고 이를 통해 민주적 시장경제로 가는 디딤돌을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을 보고 확실히 그런 생각을 했다. 이같이 재벌 앞에서는 자진해서 강력한 민주적 권위를 내던지는 정부가 노동과 대면해서는 지금 마치 연말 정산이라도 하려는 듯이 이제 비정규직 법안 통과를 강행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정부가 주장하는 바 “국민 대통합 연석회의”라는 것이 무엇을 의도하는 것인지는 불문가지라 할 것이다.

참여 정부에 대한 기대의 붕괴와 동시에, 대략 20년 동안 문민 자유주의 정권이 이끌어 왔던 탈냉전 ‘정상국가’로의 도정에서 나타난 87년 민주화 체제의 모순적이고 분열적인 이중성, 즉 한편으로 정치적 자유민주주의의 원리와 다른 한편으로 자본 권력과 시장 효율성의 명령이 지배하는 경제적 과두제 간의 모순, 나아가 후자에 의한 전자의 지배체제가 낳은 부조리, 그리하여 한국사회의 진보에 있어 그것이 갖는 한계를 뚜렷이 직시할 때다. 

경제대국과 복지빈국, 그리고 대안의 길

한국 사회 경제의 중장기 미래와 관련하여 성장과 복지에 대한 두 개의 추계가 우리의 눈길을 끈다. 정부의 비전에 따르면, 한국은 첨단 제조업의 경쟁력을 키워 잠재 성장률을 높이면 2015년에는 GDP가 세계 10위, 1인당 GDP는 3만5천 달러에 진입할 것이라고 한다. 또한 한국은행에 따르면, 한국의 1인당 GDP는 2015년에는 2만5천 달러에, 2040년경에는 약 4만5천 달러에 달할 것이라고 한다.

2003년 현재는 미국 및 일본의 약 1/3 수준에 그치고 있으나 2040년이면 미국 및 일본의 약 2/3 수준으로 그 격차가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이다. 한편 사회복지 발전에 대한 다른 한 추계에 따르면, 한국은 사회보험의 역사가 매우 짧고 복지 제도가 시장의존적이며, 자산 조사에 기반을 둔 복지 프로그램을 갖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앞으로 한국의 복지는 영미형에 접근하리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한다.

2015~2027년 사이 한국의 사회복지 지출은 15% 내외에 이를 것이라고도 한다. 이상 두 장기 전망을 합성해 보면 성장은 그런대로 지속이 되고 미국, 일본과의 격차도 줄어들지만, 복지의 기본틀은 영미형으로 굳어질 것이라는 말이 된다. 한국호가 이같이 대중의 생존권 위기를 강제하는 경제 대국과 복지 빈국의 양극화 성장 경로를 가고 있다는 상황 인식을 가지고 대안의 길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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