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강욱 위원장은 ‘전노협 세대’가 아니다. 1999년 6월25일 김대중 정부가 동종업종 빅딜정책을 추진하면서 진로쿠어스맥주(카스맥주의 전신)가 OB맥주로 팔려가기 전까지 그는 ‘잘나가는’ 영업팀 차장이었다. 광주에서 태어나 스무살에 겪은 ‘5·18’이 가슴에 '못'처럼 남아 있지만 대학에서 경영학을 배우고 마케팅을 전공하면서 MBA코스까지 밟으며 승승장구하던 그였다.

하지만 기아차가 현대차로 넘어가고 LG반도체가 현대전자에 팔리고 은행들이 하루아침에 문을 닫던 그 시절, 그는 처음으로 ‘단결투쟁’이라고 씌어진 머리띠를 묶고 거리에 앉았다. 외환위기 이후 거세게 몰아닥친 구조조정 칼바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동조합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화이트칼라’ 중 한 사람이었던 것. 그러나 그로부터 6년6개월이 지난 지금 민주노총 비상대책위원회의 안살림을 맡는 집행위원장이 됐다. 배 위원장은 스스로를 “계급적 깊이보다 객관적 정의감이 더 큰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구조조정으로 쉴 틈이 없다

화섬연맹에는 현재 14개 업종이 존재한다. 2003년 3만명이 넘던 조합원 수는 최근 2년 사이에 3,000여명이 줄어 현재 2만7,000여명에 그치고 있다. 특히 섬유산업 조합원의 경우 1997년 1만6,000여명에 이르던 것이 지금은 고작 3,000여명이 남아 있는 상황이다. 6~70년대 산업역군으로, 한국 노동운동의 불을 당겼던 노동운동 1세대들은 공장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서 저항도 해봤지만, 결국 뿔뿔이 흩어졌다.

“제조업 공동화라는 이름 아래 산업자원부, 민주노총, 제조업 사용자들이 모여서 대안을 제시하고 끌고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배강욱 위원장은 “섬유산업뿐 아니라 화학산업 역시 ‘중국의 성장’으로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다”며 제조업 노사정이 함께 이를 해결해야 한다고 밝혔다. 특히 “국가산업정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면서 “정부가 (사양산업을) ‘내팽겨칠 것이냐, 고부가치산업으로 재편성할 것이냐’를 빨리 판단해 노동자들의 살 길을 열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 대구섬유공단을 영화산업단지로 재조성하겠다고 그래요. 그러면 섬유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영화산업노동자가 될 수 없으니 정부가 보조금으로 직업훈련 등을 실시해서 노동자들이 이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해야죠. 그렇지 않고 섬유산업을 고부가치산업으로 간다면 세제혜택이나 장려금 등을 대폭 지급해서라도 이 산업을 끌고 가야 합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야기되는 구조조정에 대해서는 지금 같은 ‘실업기금’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죠. 사회재취업이 보장될 수 있도록 충분한 지원이 있어야 합니다”

배강욱 위원장은 또한 “자본가가 하기 싫다고 노동자를 사회보장장치도 전무한 상태에 내던지고 빠져버리는 것은 안 된다”고 지적했다.

“제조업 현장 대부분이 점점 더 상장보다는 내부적 비용감축을 통해서 경영수지를 맞추려 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최선을 다 해 막아야 하지만 이미 희망퇴직 등 상시적 구조조정이 일상화되어 버린 상황이죠.”

여수에서 또다른 미래를 꿈꾼다

약력
1960  광주 출생
1999  카스맥주노조 1대 위원장
2002  오비맥주노조 2대 위원장
2001  화학섬유연맹 부위원장
2004.2.  화학섬유연맹 위원장
2004.12.  화학섬유노조 위원장
2005.1  화학섬유연맹 위원장 재선(현)
2005.11  민주노총 비상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현)
정부와 자본이 노동자들의 바람대로 나서줄 리는 만무하다. 그렇다면 산업구조조정 앞에서 노동자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쇠파이프(를 들고 휘두른 것)도 한계가 있어요. 금강화섬처럼 570일 동안 잘 싸워도 결국엔 문을 닫을 수밖에 없고, 위로금 몇푼 더 챙기는 것 외엔….”

산업구조조정 앞에 무력하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뿐일까. 배 위원장은 석유화학산업이 집결해 있는 여수산업단지(여수산단)에서 ‘다른 미래’를 개척해보려 했다.

“섬유도 무너지기 직적까지 고임금 제조업 사업장 중 하나였어요. 현재 여수산단도 현재 상당한 고임금 사업장에 속하죠. 중국 내 석유화학공장들이 거의 다 완공됐다고 하더군요. 석유화학쪽은 내수의 한계가 있어요. 중국이 공장을 가동하기 시작하면 수출길이 막힐 겁니다. 석유화학이 장치산업이라 섬유보다 시간이 좀더 걸렸을 뿐인 셈이죠. 그래서 섬유산업의 길을 석유화학이 재연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작년 여수산단 투쟁을 조직했었습니다. 노조가 산업구조조정에 대응할 수 있도록 조합원 의식구조부터 바꾸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배 위원장은 여수산단에 걸었던 기대만큼이나 여수산단 투쟁에 대한 아쉬움도 많은 듯 보였다.

“태광, 효성, 등 섬유노조가 무너져가는 과정을 보면 구조조정이 일어날 때 조합원들이 나는 거기에 끼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사용자 쪽에 편승하기도 합니다. 구조조정이 거론되면 노조 중심으로 단결해야 하는데 그런 구조를 갖고 있지 않는 거죠. 정말 오판하지 말아야 할 것은 현실적으로 회사와 노조가 힘겨루기를 할 때 이길 수 있는 노조가 별로 없어요. 평상시에 조합원 교육과 일상 활동, 지속적인 경영 개입이 이뤄졌어야 조합원들을 투쟁에 동원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지는데 당시 여수산단에는 그러한 것들이 전무했죠. 의식있고 훌륭한 간부들도 많았지만 현장에 먹히지 않았어요.”

배 위원장 등 화섬연맹 지도부는 지난해 여수공동투쟁본부가 구성되기까지 여수에 방을 얻어 석달간 생활할 정도로 많은 공을 들였다. 실제로 지난해 여름 여수의 GS칼텍스(당시 LG정유)를 비롯한 15개 노조가 지역사회발전기금 출연, 비정규직 차별철폐 및 정규직화, 주5일제 실시 등 공동요구를 들고 공동쟁의조정신청을 하고 공동파업을 결의했다.

GS칼텍스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 그 꿈은 단단하게 무르익어 가는 듯 보였다. 여수투쟁의 성과를 발판으로 삼아 획기적인 산별 전환을 이루려 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고, GS칼텍스 사태는 여전히 조직에 큰 상처로 남아 있다. 배 위원장은 “올해는 숨 고르는 시간일 뿐”이라며 “내년초 석유화학 전망에 대한 연구용역이 나오는 대로 다시금 전열을 가다듬을 생각”이라고 전했다.

“노조는 갈등관리를 잘 해야 한다”

“구조조정에 노조가 대응하기 위해서는 조합원 의식부터 바꿔야 한다”는 배 위원장에게 그 방법을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뜻밖에도 행정학 이론 중 하나.

“노조는 ‘갈등관리’를 잘 해야 합니다. 적당한 정도의 위기감과 적당한 정도의 승리감이 반복돼야 느슨해지지 않고 망각하지 않아요. 이를 위해서 작은 규모의 구조조정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 갈등구조를 유지하면서 조합원들의 의식이 싹터나갈 수 있으니까요.”

연맹위원장의 입에서 ‘작은 규모의 구조조정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괜찮다’라는 말을 듣게 될 줄이야!

“연말연초가 되면 성과금 300~400%는 기본으로 나오는데 싸울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러다가 어느날 회사가 대규모 구조조정을 툭 던지면 따라오는 조합원들은 없고, 맥없이 당할 뿐이죠.”

약간의 독이 오히려 큰 병을 막을 수 있다는 말이다. 배 위원장은 특히 ‘노조위원장’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최근 들어 노동운동이 흔들리는 데는 단위노조 위원장이 회의 집중성도 떨어지고 교육받기 싫어하고 경향에도 원인이 있다”며 “위원장이 달라지면 그 현장이 느슨해질 틈이 없다”고 덧붙였다.


“민주노총 총파업 투표도 못하면서 무슨 노조냐”

배 위원장이 연맹위원장으로 당선되면서 했던 세 가지 약속이 있다. 첫번째는 ‘투쟁하는 화섬연맹’, 그리고 ‘결의된 약속은 지키는 화섬연맹’, 마지막으로 연맹-지역-단위로 이어지는 시스템의 구축.

하지만 현실에 급급한 지금의 노동운동은 현장 조합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지 못하고 그러다 보니 현상적 투쟁에는 조합원들이 모이지만 정작 일상적 노조활동은 싫어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민주노총 총파업 투표마저 진행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배 위원장의 노동운동관은 ‘관리적 개념’이 아닌 ‘변화적 개념’에서 끊임없이 고민한다는 것. “현재 대다수가 관리적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조합원 수나 회의체계를 유지하면 그만이죠. 현상유지식 노조활동부터 바꾸지 않으면 세상을 바꿀 수가 없죠. 그러니까 상층에서 결의해도 밑에서 그것을 받쳐주질 못하지….”

배 위원장은 민주노총 중앙연수원이라도 만들어서 초급 위원장 필수 교육코스, 간부 필수 교육코스 등 의무교육제를 도입해서 이를 바꿔야한다고 주장했다. “위원장 폼만 잡고 공부를 안하니까 발전을 못하는 겁니다. 관리적 개념으로만 접근하면 결국 그게 관료가 되는 거죠. 저는 처음 위원장 자리에 앉았을 때 솔직히 주변에서 우려를 많이 했어요. 하지만 3년 지난 지금 사람들이 그래요. ‘정말 많이 달라졌다’고….”

“500인 이상 사업장 불법파견 조사해 일시에 고발할 것”

화섬사업장 역시 여느 제조업과 마찬가지로 사내하청 문제로 심각한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러나 “신호제지 비정규투쟁이나 금호타이어 비정규 정규직화투쟁 등 굵직굵직한 ‘모범사례’는 있지만 비정규투쟁이 활발하지는 못하다. 배 위원장은 ”정규직 현장도 무너지고 있는데 비정규직 현장을 챙길만한 여력이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배 위원장은 털어놓았다.

하지만 코오롱 구조조정 사례가 보여주듯 퇴출당한 정규직이 다시 비정규직이 되어 공장에 돌아오고 있는 상황이다. 배 위원장은 “내년에 500인 이상 사업장에서 불법파견과 관련된 문제를 조사해 일제히 고소고발에 들어갈 것”이라며 “불법판정이 날 경우 정규직화투쟁을 벌이겠다”고 밝혔다. 이같은 배 위원장의 구상이 현실이 될 경우 제조업 사내하청 문제가 또 다시 비정규투쟁의 도화선이 될 것으로 보인다.

“산별은 환상이 아니다. 산별은 결단이다”

배강욱 위원장은 지난 1년간 화섬노조 과도체제 지도부를 겸했다. 이달초 정희엽 위원장이 선출됨에 따라 연맹과 산별노조 간 지도부를 분리했다. 그러나 아직 금호타이어 등 대공장들의 산별 미전환으로 연맹의 몫이 더욱 크게 남아 있는 상황.

“산별전환을 놓고 4년간 논의를 했지만 작년에 전환할 당시에도 이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일단 날짜를 10월30일로 못 박고 밀어붙였습니다. 심지어 산별전환 논의 동안 단위노조 위원장이 3번 바뀐 경우도 있었어요. 작년에 띄우지 못하면 산별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강박관념이 크게 작용했죠”

배 위원장은 산별노조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의 기업별 구조보다 낫다면 산별로 가는 길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또한 논의를 아무리 오랫동안 해도 결단이 없으면 산별은 이뤄지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배 위원장은 “추후 사업은 고민해서 풀어가더라도 새로 노조를 결성하는 마음으로 일단 간판부터 바꿔달자”고 주장했다고 한다.

때문에 여전히 산별전환의 후유증도 남아 있다. 일단 산별로 갈아타기는 했지만 내실 있게 사업이 진행되지 못했다는 게 지난 1년에 대한 배 위원장의 평가다. “화섬연맹처럼 조직이 크지 않은 상황에서 중앙임원 4명이 산별사업까지 끌어가다 보니 당초 생각하고 달리 너무 무리가 갔죠. 그리고 올 연맹 중앙사업의 목표가 장기투쟁사업장 문제를 정리하는 데 무게를 두고 있어서 지난 9월로 예정됐던 산별전환 투표가 무산됐어요.”

현재 배 위원장이 그리고 있는 산별전환의 밑그림은 민주노총 차원의 산별운동 활성화에 편승해 대공장 산별전환 공동투표와 제조산별 건설 논의를 동시에 진행하는 것. 하지만 이수호 지도부의 낙마로 민주노총 산별전환 논의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더불어 제조산별과 관련된 논의 역시 진척이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비록 지난해 GS칼텍스의 산을 넘지는 못했으나 여수산단 공동투쟁의 소중한 성과가 있고 산별노조 지도부가 구성됨에 따라 다시 한번 전력투구 할 생각이다. 더불어 산별 중앙교섭 추진도 고민하고 있다. 배강욱 위원장은 “현재 화섬노조의 조직형태는 금속노조의 모델을 따랐지만 교섭형태는 중앙교섭과 지회교섭으로 진행되는 2단계 교섭구조를 고려하고 있다”면서 “지부가 대각선교섭 지회교섭을 지도해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민주노총 비대위 집행위원장을 겸하며 배 위원장의 하루는 눈코 뜰 새가 없다. 그는 비상시기의 집행위원장으로 ‘무엇보다 정파적 문제로 인한 조직적 상처를 봉합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민주노총 위기를 만들어낸 정파적 문제를 최소한이라도 통합해나가는 것을 가장 중심에 놓고 있다. 그래야 힘이 나오니까….”


특히 그는 “민주노총이 곧 무너질 것처럼 비춰지고 있는데 ‘비상대책위원회’로도 민주노총은 이만큼 해낼 수 있는 조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바람을 갖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비대위 위원장을 제대로 보필하는 집행위원장’이 필요하다고 배 위원장은 강조했다. ‘정치적 입장은 달라도 사업은 이렇게 해나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그렇다면 전재환 위원장과 궁합은 잘 맞을까? 배 위원장으로부터 돌아온 대답을 살짝 공개한다. “아직까지 한번도 안 싸웠으면…. 뭐… (맞는다고 봐야 하겠지)”


이와 함께 집행위원장으로 가장 고민하는 부분은 사무총국 일꾼들의 화기애애한 표정(?)을 지켜나가는 것.


“요즘 민주노총 분위기가 좋아졌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지. 여러가지 일을 겪으면서 사무처가 침체될 수도 있는데 솔직히 요즘이 이석행 총장 때보다 더 좋아졌다는 말도 들었어.”


그런 말 못 들어봤다고 기자가 대꾸하자 배 위원장의 표정이 금새 딱딱해졌다. 정말 많이 신경을 쓰는 부분인 듯.


“연맹 위원장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꿈꾸는 노동운동을 연맹 내에서 실현하는 한편, 연맹을 경영하는 CEO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밝힌 배 위원장은 화섬연맹이든 민주노총이든 일꾼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그들이 즐겁게 일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최선을 다 해야 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다. 더불어 항상 ‘급한 불을 끄기 위한 소방관’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밝힌 그는 민주노총이 재도약하는 데 앞으로도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을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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