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PDATE : 2019.7.17 수 08:00
상단여백
HOME 피플ㆍ라이프 인터뷰
이소선 전태일 열사 어머님"단결해야 돼. 조합원이 백만이 넘어도 국회의원하나 못 뽑고 있잖아"
2000년 11월 4일 청계천 7가 평화시장 길목. 30년전 전태일 열사가 온몸을 불살랐던 그 자리에선 고사준비로 떠들썩했다.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그 자리에 "영원한 노동자의 벗"으로 기록된 표지석 묻는 날이었다.

어머님은 어떤 심정일까. 사실 기자는 표지석을 묻는 걸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어머님을 상상했었다.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 헤쳐온지 30년만에 역사적인 현장에 전태일이 다시 살아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풍물패의 길놀이에 이어, 표지석 묻는 작업이 다 끝나고 고사가 끝나도록 어머님은 나타나지 않았다.

* 애써 역사의 현장을 피해가는 어머님

왜일까. 기자는 한참 뒤에서야 어머님이 오질 않는다는 걸 전태일 열사30주년 기념식 관계자에게 들었다. 그시간 이소선 어머님은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사무실에 있었다. 그렇게 찾아간 유가협 사무실에는 이소선 어머님이 동그마니 앉아 있었다. 이웃집 할머니 같은 인상. 그 옛날 숱한 탄압에도 당당히 맞서던 모습은 별로 느껴지지가 않았다.

- 오늘 표지석 묻는 행사에 오시기로 했었다면서요?

= 오늘 거길 갈려고 마음먹고 가다가 이리루 왔어. 갈라다가, 갈려구 마음먹고 가다가...다른 분들이 다 하는데 내가 꼭 있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 그래서 안갔어. 그 자리에 가기가 너무 싫어. 거기가서 내가 눈물이라도 나면 다른 사람 보기도 않좋구. 그래서 안갔어.

- 그럼 최근에 그 자리에 가본적은 있으세요?

= 최근에는 안갔어. 그쪽에 무슨 볼일이 있으면 그 자리를 안갈려구 빙 돌아서 갔어. 모란공원에는 자주 갔어. 여기 유가협 사람들하구 행사가 있으면 가서 묘지에도 찾아가곤 했지.

이소선 어머님에겐 그 자리는 역사의 현장이기 이전에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장소로 기억되고 있는 모양이다. 그것은 아마도 '투사'가 아닌 '어머님'의 심정이리라. 그 아픔은 어쩌면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문제인지도 모를 일이다. 어머님은 그러면서도 자꾸 표지석을 어디에 묻었는지, 사람들이 밟고 지나 다니는 건 아닌지 궁금해 했다.

이날 표지석 설치행사에는 전태일 열사의 과거 동지들도 여러명이 참석을 했다. 역사에 '바보회' 멤버로 기록돼 있는 이들이다. 그들의 근황을 물어봤다.

= 늘 관심있게 찾아오고 그래. 어려울 때마다 찾아와서 같이 일해주고 그랬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와서 도와주고, 추도식할 때마다 뒤에 서서 있다가 가구 그래요. 자기 부모래도 30년동안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을거야. 30년동안 변하지 않고 그러는 거 보면 태일이가 친구들을 잘 만났구나 하는 생각을 해요

사실 전태일 열사를 아는 사람은 많아도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뒤에 청계피복노조를 일군 사람들의 눈물어린 기록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렇게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싸우다가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희미해져 가고 있는 이들의 얘기를 들어봤다.

*천 권은 족히 될 청피노조 이야기

= 태일이가 그렇게 되구나서 노조를 만드는데 엄청 고생했어. 노조가 설립되고 나서도 노조에 가입을 못하게 하더라구. 노조사무실에 와야 가입을 하는데 사무실 밖에 플랑카드를 붙여놔도 경찰에서 사무실에 올라오지를 못하게 하는 거야.

그때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했다. 어머님은 그때 고생한 걸 얘기하자면 밤새도록 얘기해도 안되고 책을 천 권은 써야 할 거라고 말했다. 그만큼 곡절과 고통이 많았다는 뜻이리라. 어머님은 가장 기억에 남는 일 하나만 얘기를 해주었다.

= 언제는 집회를 하고 다 잡혀가고 남은 사람들이 아예 죽어버리자고 한 적이 있었어. 그래서 밥이라두 실컷 먹구 죽어버리자고 그랬지. 배고프고서 맞으니까 도저히 못참겠드라고. 그래서 가진 것 다 털어서 먹고 죽어버리자고 그랬어, 밥이라도 실컷 먹고 죽어버리자고. 태일이하고 약속을 해서 죽을 수는 없는데. 그래도 죽어버리자고 설렁탕인가 뭔가를 시켜먹고 죽을라고 작정을 하구 그랬지. 그래서 석유를 네 통을 사다놓았어. 그때 마침 이영희 교수가 왔더라구. 교수님이 와가고 우리도 먹고 죽으니까 교수님도 잡수세요 하니까. 이영희 교수가 사태가 심각하니까 말을 못하더라구. 그런데 다 먹지도 않았는데 경찰이 들어 닥친거야. 문을 확 열어 제끼더니 이만큼 한 호스를 들이대는거야. 왜그러냐 그랬더니 나부터 빨갱이 두목이라구 잡아 갔지. 그때 이영희 교수님도 중부경찰서에 같이 잡혀갔어.

*여섯번의 구속, 스물여섯번의 구류

- 그럼 지금까지 몇번이나 구속됐었는지 기업이 납니까.

= 잘 기억이 안나는데 이번에(민주화운동보상법 관련) 판결문 떼려고 가보니까 또 나오고 또 나오고 그래서 다 합해보니까 여섯번이드라고. 그때는 구류를 살아도 정식재판하는게 있는지를 몰라서 29일 꼬박 살았지. 들어갔다하면 깍아주는 게 없었어. 29일씩 그렇게 들어갔다 나오면 일년이 금방 지나갈 정도였지 뭐. 이번에 뭐 한다고 두드려 보니까 그렇게 구류를 산게 26번이나 되더라구.

26번의 구류생활. 다합하면 2년 넘게 유치장 생활을 했다는 얘기가 된다. 어머니는 그외에도 수없이 많은 감시와 수배생활을 했다. 지금은 수배되고 그런거까지 합하면 기억도 안난다고 했다. 그렇게 험난한 투쟁을 해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였을까.

= 밥을 못먹어서 배고플 때가 가장 힘들었지. 라면 여섯 개를 사다가 16명이 먹을라니까 어떻게 푹푹 끓여서 퍼지도록 해가꼬 나눠 먹는거지 뭐. 그때는 연탄불이 없어서 동대문에 가서 박스 주어다가 끓여먹고는 했어. 내가 중앙시장에 가서 헌옷장사 해다가 보리쌀 그것도 납작보리쌀을 사다가 끓여먹었어. 그때는 태일이 친구들이 죽도록 얻어맞고 왔는데도 먹을게 있어야 주지. 한번 붙으면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몰라.

어머니는 수없이 맞은 얘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징글징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시 노조운동을 하던 사람들에게 정권의 폭력은 무한대였다. 한번은 잡혀갔는데 주머니에서 김근태씨의 전화번호가 나왔다고 죽도록 엊어맞은 얘기부터, 일만 생기면 얻어맞는 나날들의 연속이었다고 했다.

* "뭉쳐야 해"

그래도 행복한 날이 있지 않았을까. 어머님에게도 그런 보람을 느낄 때가 있었다고 한다.

= 그렇게 고생고생해서 전노협이 출범할 때 마음이 참 좋았어. 그게 발전해서 민주노총이 만들어질 때도 참 좋았구. 그렇지만 IMF가 터지구 노동자들이 쫓겨나는 걸 보니까 정말 마음이 아프더라구. 그땐 정말 속상했어.

- 그때와 지금을 비교해보면 세상이 많이 변했잖아요.

= 먹는 것도 그때보다는 많이 나아졌고, 노동조합도 의식이 많아 나아졌지.

- 지금 노동운동을 보면서 뭔가 해주고 싶은 얘기는 없으세요?

= 있지. 노동운동이 하나로 단결을 해야 된다는거야. 지금 조합원이 10만이 된다 백만이 된다 해도 국회의원 하나 못뽑고 있잖아. 노동자들이 하나가 되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저잘났다고 할 일이 아니라 노동자 전체를 위해서 하나로 뭉쳐야 해. 그래야 살길이 생기는 거야.

어머님은 요즘 감기몸살로 거동이 불편하다고 했다. 실제로 인터뷰를 하면서도 때로는 힘든 표정을 짓곤 했다. 그러나 전태일 열사의 얘기를 할 때면 조용한 어조에도 생생함이 깃들어 있었다.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후 그 숱한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정태일 열사의 정신을 현실속에서 뿌리내리게 한 힘. 그 어머님의 힘이 거기에 서려 있는 듯 했다.

이성희 편집국장  labortoday@labortoday.co.kr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성희 편집국장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