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노조(위원장 김영훈)는 지난 8일 노조 창립기념일을 60년만에 복원해 창립기념식을 가졌다.

노조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대한노총운수부연맹이 창립된 1947년 1월18일을 창립기념일로 지정해 왔으나 이에 앞선 1945년 11월1일 철도노조가 출범했던 사실을 밝혀내고 노조 창립 60년만에 창립기념일을 복원하게 된 것이다.

이날 노조는 노조 창립 당시 조합원이었던 이수갑, 유병화, 두 분 선배 조합원을 초청하고, 명예 조합원으로 위촉했다. 이수갑 명예조합원이 말하는 철도노조 60년. <편집자 주>
 


이수갑 명예조합원이 일러준 대로 영등포에 위치한 민주노총 사무실의 뒷골목으로 쭉 올라가다 보니 오래된 한 건물에 '민족정기수호협의회' 사무실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조합원은 지난 1987년 민족정기수호협의회를 창립, 의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기자가 찾아갔던 지난 12일은 일본에서 손님들이 온다며 그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또 APEC 개최를 앞두고 있는 터라, 이래저래 바쁜 일이 많다.

마치 시간을 거슬러 잃어버린 기억 속으로 찾아간 듯한 느낌. 사무실은 아주 오래된 풍경을 펼쳐냈다. 이 명예조합원은 일회용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진 노란색 양철주전자에 물을 부어 손수 커피를 끓여 주며, 입을 연다. "예전에 운동하던 것에 비하면 요즘 노조들은 참 부자노조야." 사무실에는 책상과 의자 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다.


철도노조 출범, 너무도 자연스러운

이 명예조합원이 철도에 들어간 것은 1945년, 지금으로부터 딱 60년 전, 21살 때 일이었다. 당시 부산 철도국 용품사무소 수송계에 취직했고, 유일하게 자동차면허증을 취득하고 있어 수송계의 자동차 책임자가 됐다.

"어떤 날인가, 공장에 삐라(전단)가 흩어져 있는 거야. 읽어보니 노동자 농민의 참다운 행복을 위해 독립국가 건설에 앞장서자, 노동자는 8시간 노동제 실시, 실업자를 구제하자는 등 노조 조직을 위한 선전 삐라였어. 며칠 뒤 어떤 사람이 와서는 노조를 만드는 데 가입하라고 해서 당시 우리 직원이 70여명이었는데, 그때 바로 10여명이 가입하고, 나중에는 전부 가입했어. 그때 사람들이 나더러 분회장을 맡으라고 해서 분회장을 맡았지. 그후 5일 뒤에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이 출범했고, 철도노조도 전평에 가입했지."

이후부터 이 명예조합원은 전평 철도노조 활동가로 활동했다. 당시 전평은 부산지역을 남구와 북구로 나누고 있었는데, 이 명예조합원은 철도공장을 중심으로 한 북구책으로 활동했다.

"극심한 고생 속에서 자라온 탓인지 내가 해온 고생이 우리 민족들에게는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 그래서 철도에서 노동운동을 하고, 전평에서 이루고자 했던 강령들이 다른 사람들보다는 더욱 더 가슴에 와 닿지 않았나 싶어. 내가 3대째 머슴 집안에서 태어났거든. 아버지는 4살 때 중풍에 걸려서 어머니가 소쿠리에 밥을 얻어오면 그걸 먹고 살았어."

전평은 건설 이듬해인 1946년, 9월25일 총파업을 성사시켰다. 그에 앞선 23일 철도노조가 먼저 파업 투쟁을 벌였다.

"철도노조가 특히 부산철도국이 23일 제일 먼저 약 700~800명이 참가한 가운데 총파업을 시작했지. 그에 이어 서울 용산에서도 파업에 가담했고, 이후 출판노조 등이 가세해서 전국전인 전평 파업이 이뤄진 거야. 결국 그 투쟁은 대구 10월 항쟁으로 이어졌고…."

1946년, 해방 이후 혼란한 틈이었을 그때 철도노조가 먼저 파업을 벌였다. 그들은 왜 파업을 벌였을까?

"당시만 해도 전국민이 식량난에 허덕일 때였어. 미군정이 들어오면서 일제가 가지고 있던 모든 산업을 폐쇄했거든. 그렇지만 공장을 운영한 건 일본인이지만 그곳에서 일한 사람들은 모두 조선인이거든. 그래서 모두 실업자투성이가 됐지. 철도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실업자가 많아졌고, 미국에서 잉여농산물이 들어오니까 농민들도 이농을 했어. 그래서 미군정은 배급제를 실시했지. 그래서 당시 철도노동자들은 철도노동자에 대한 감원과 해고 절대 반대, 1인당 400~500원을 줄 것 등을 요구했지. 정치적으로는 당시 중단된 미소공동위원회를 재개해서 소수인민의 주권을 조선인민에게 넘겨달라는 거였어."

전평 파업, 전국민이 공감

그렇다면 당시에는 어떤 식으로 파업을 진행했을 지 궁금했다.

"지금처럼 집회도 하고 시위도 하고 그랬지. 처음 파업에 들어갈 때는 먼저 부산기관구에서 기적소리를 울리면 그것을 전체 파업을 시작한다는 신호로 했어. 부산에는 부두들이 서로 가까웠기 때문에 철도의 기적소리가 울리면 그것을 듣고, 전평의 해상노조가 뱃고동 소리를 냈어. 철도뿐 아니라 다른 곳까지 그렇게 해서 파업에 가세한 거지. 그때 시민들한테 전단도 나눠주고 시위도 했는데, 부산시민들은 철도노동자들 파업에 박수로 갈채하고 호응해줬어. 부산뿐만이 아니라 그때는 전국적으로 그런 현상이었어."

이 명예조합원은 전평의 투쟁이 조국의 독립국가 건설 투쟁과 더불어 민중의 생활을 보장하고, 노동자의 기본권을 보장하라는 것이었기 때문에 전시민, 전국민들의 공감대를 불러왔다고 설명했다.

"공장에서 파업 시작하자마자 중심 본거지를 습격한다는 설이 나돌았어. 당시 부산의 중심은 철도였거든. 그래서 레일에 꽂는 핀(지금의 스파이크)이랑 스프링 동가리 같은 걸 준비해놓고 기다리다가 대한노총이랑 철도경찰들이 습격해오는 것을 보고 싸움을 벌였지. 결국 그쪽에선 공장 진입은 못하고 철도공장 주변을 두르고 있는 담에서 기관총을 난사해댔어. 그때 대한노총 사람들은 전부 가죽잠바를 입고, 허리띠에 권총을 차고 있었어. 늘 그걸로 노동자들을 위협했지. 처음 철도가 파업에 들어갔을 때도 그사람들이 우리를 연행하려고 몰려들었는데, 처음에는 시민들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경찰이 물러가는 양상이었지."

결국 10월 대구항쟁에서 미군의 총탄에 노동자들이 죽어나가면서 전평의 파업은 중단되는 상황이 됐다.

이 명예조합원은 이번 철도노조의 60년만의 창립기념을 복원을 역사적인 일이라고 치하했다.

"일제 식민통치 하에서부터 노동자들이 조국을 찾는다는 생각으로 들고 일어났고, 1945년에 일본이 물러간 뒤에 그 정신을 이은 게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야. 당시 전평의 막중한 사명은 조국의 독립국가 건설이었지. 그런데 해방이 되니까 조선총독부 대신 미군정이 들어왔고, 과거 친일파들과 관리들, 모든 문화와 산업에서 민족반역행위를 했던 사람들이 등용돼 전평을 탄압하고, 학살했어. 그 과정에서 철도노동자가 하나로 뭉쳤고, 전평이 총파업을 벌인 거지. 이를 말살한 것이 미군정과 친일파였고, 이중 가장 전평을 박해한 것이 서북청년단을 위시한 민족테러단이었던 거야. 이들이 미군정의 지령 하에서 전평을 파괴하고, 학살해 결국 전평이 무너지고 쇠하게 된거야. 이 민족테러단이 바로 대한노총이야. 대한노총은 미군정이 만들어낸 친일파의 테러단인 거야. 그런데 철도노조는 이제껏 그 대한노총의 창립기념일을 기리는 행사를 해온 거니 이 얼마나 치욕적이냐 그말이야."

노조역사 복원, 직선제 도입 시급

이 명예조합원은 "민주노총이 참다운 민주노총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각 산별이 해방 직후의 전평의 역사를 계승, 복원하는 작업을 먼저 해야" 된다고 강조했다.

60년 앞서 노동운동을 한 '대선배'는 최근의 노동운동에 대해 이렇게 조언했다.

"민주노총의 사회적 협의주의는 반대야. 사회적 협의가 물론 어용과 자본에 굴복하는 것은 아니지만 투쟁일변도가 아니라 '우리는 타협할 용의가 있으니 사용자나 권력, 자본도 기본권 인정하라'는 것이 가능한가. 무한 착취와 무한압박이 그들의 본질이자 본능이야. 이제까지 교섭을 통해 성공한 역사는 없어. 있었다면 그것은 노동자의 기본권을 팔아 넘기고 그 희생을 안고 얻은 것이지 교섭의 대가가 아니야. 사회적 교섭 그 자체는 본질적으로 나쁜 게 아니지만 권력과 사용자의 본질이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 교섭을 노선으로 택할 경우 많은 노동자들의 투쟁력이 전반적으로 약화되게 돼 있다구. 민주노총의 중대한 오류인 거야."

이 명예조합원이 특히 주문한 것은 각 조직의 직선제 도입.

"민주노총 위원장을 비롯 각급 대표자들을 조합원의 의사가 반영되는 직선제를 통해서 뽑아야 돼. 그렇지 않고 지금처럼 대의원에 의해서 선출하면 그건 대한노총화 되는 거야. 대한노총에 어용 간부가 왜 오래 지속될 수 있었는지 알아? 바로 대의원제도 때문이야. 조합원의 의사와 상관없이 대의원들이 어용을 계속 선출하니까 노조가 노동귀족 생활을 수십년 동안 해온 거라고. 그러니 조합원들이 직접 위원장을 뽑고, 언제든지 위원장을 교체할 수 있어야 돼."

나이 80을 넘겼다고 하지만 이 명예조합원은 현재 노동계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고, 신념도 뚜렷했다. 전평의 노동자 의식이 이렇게 투철한 것이었을까. 전평에 대해 얘기를 더 듣고자 했으나 이 명예조합원은 말하는 것을 주저했다.

"전평의 투쟁과 구체적인 전술, 전략의 수립, 실천 방법 등에 얘기해 주길 바라는 사람이 많아. 하지만 그것들이 현 단계에서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극히 필요한 것들은 아니니야. 또 전평의 투쟁방향에 접근할 수 있는 의식이 아직 발전돼 있지 않다고 봐. 전반적으로 역사를 제대로 볼 줄 알아야 하고, 민주노조운동을 무력으로 학살한 역사를 이어가는 한 전평 선배들의 투쟁 과정을 알겠다는 것은 무의미한 거지. 나도 자꾸 나이가 먹기 때문에 하루 빨리 역사를 드러내고 싶지만 현재의 민주노총 현실이 접근할 수 있는 태세가 못 되네. 민주노총을 민주화하는 것이 급선무이고, 기회가 되면 아낌없이 다 얘기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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