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영순 지부장은 얼마 전부터 TV 코드를 아예 뽑아버렸다. 노조활동 덕택에 TV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늘어나게 된 초등학생 딸아이와의 타협의 산물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좀더 다른 차원의 고민이 담겨 있기도 했다.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하기 힘든 세상, 단순히 2% 부족한 게 아니라 20% 이상 훌쩍 부족해 보이는 이 세상을 향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한 개인의 작은 저항이라면 너무 거창한 표현일까. 적당한 경쟁은 발전을 위해 불가피하지만 지금의 경쟁은 생존을 위한 경쟁이고 더 나아가서는 모두를 낙오자로 만드는 경쟁이다. 그런 교육이 싫어 딸아이 대안학교를 물색하기도 한 우리의 차 지부장님. 노조활동을 하는 이유도 단순하다.

“우리 딸 때문이에요. 딸이 앞으로 살아갈 세상이 더 험악하지 않길 인생 선배로서 바랍니다. 힘 없고 가진 것 없어도 잘 살 수 있는 인간적인 세상 말이죠.”

많은 조합원들이 그렇듯이 차 지부장의 내면에도 각종 ‘부채의식’이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가난한 농군의 막내딸로 태어나 8남매 중 유일하게 대학을 졸업했다. 전남대 사대 생물교육학과 82학번으로 80년 5월 광주민주항쟁 직후의 엄혹한 시대 속에서 친구들이 노동운동에 투신하고 있었지만 정작 자신은 그런 가족에 대한 채무감 때문에 운동권 언저리를 맴돌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졸업은 무사히 해 전남 진도의 한 고교에서 교편을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부임 시절부터 일기 시작한 전교조 활동이 차 지부장의 양심을 콕콕 쑤셔댔다. 차지부장은 전교조를 택했다. 공무원노조가 교육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차 지부장의 신념은 이때의 경험이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런 가운데 교사생활 5년만에 공무원노조와의 인연이 싹틀 일이 생겼다. 대학시절 원예동아리 친구의 권유로 1992년 농촌진흥청의 농업연구사 공채시험을 치러 합격한 것이다. 갑자기 경기도민이 됐고 연구원이 됐다. 발령 첫날 만난 동기와 눈이 맞아(?) 결혼식도 올렸다. 이후 10여년 동안 차 지부장은 공무원노조와는 전혀 무관한, 벼멸구 염색체의 유전자 지도 만들기에만 몰두했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 자리한 ‘부채의식’은 그를 직장협의회 교육선전국장으로 이끌었고 올 6월에는 농촌진흥청의 지부장까지 이끌었다. ‘열 사람의 한 걸음’보다 ‘한 사람의 열 걸음’에 가까웠던 전임 집행부가 단일직급 추진 과정에서 총사퇴하는 일이 발생했는데 차마 나마저 못하겠다는 말이 안나오더란다.

그렇게 현 집행부가 출범했다. 지금 농진청지부는 직협까지 포함해 중앙행정기관본부 수십개 조직 가운데 조직력과 화합력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분위기가 좋다. 조합원들의 의견에 항상 귀를 기울여 사업화시킨 덕분이다. 기능직 제도개선위원회를 만들어 꾸준히 사업을 추진하고 있고 단일직급 추진 마무리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찐쌀 파동’ 및 ‘통계조작 사건’과 맞닥뜨리면서 원칙적인 대응을 선택, 자칫 노조의 근간이 뒤흔들릴 수도 있는 상황을 집행부의 하나된 마음으로 돌파하고 있다. 찐쌀 파동이란 중국산 찐쌀에서 이산화황이 나왔을 때 농진청이 제대로 된 통계 및 조사도 없이 각 식당에 ‘찐쌀에 문제가 없다’는 스티커를 배부한 것으로 노조가 조직 보호를 앞세워 모른 척 할 수도 있었지만 ‘공직사회 개혁’이라는 공무원노조 본연의 임무를 잊지 않고 전격 문제를 제기했다. 통계조작 사건 역시 ‘벼 품종의 도열병 통계자료가 정치적 의도에서 조작됐다’는 의혹을 노조에서 먼저 제기해 신뢰성이 생명인 연구조직의 명예를 찾고자 했다.

조합원들 중 일부는 노조가 복지에만 신경을 쓸 것을 주문하기도 하지만 차 지부장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대국민 행정서비스가 공무원 본연의 임무라면 국민 전반의 복지가 곧 노조원의 복지라는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쌀협상 국회비준 문제도 결코 남 얘기가 될 수 없다. 농촌이 살아야 안정적 식량공급이 가능하고 국토의 폐허화도 막을 수 있다. 농촌이 살아야 농진청도 살 수 있다.

차 지부장은 그렇게 나와 별개일 것 같은 문제를 나의 문제로 만드는 일에 골몰하고 있었다. 딸을 위한 좋은 세상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기 위해, 시골서 농사지으며 고생하는 오빠가 생계 걱정 안할 수 있는 세상을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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