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현재 노동운동가 고 민한홍 동지가 세상을 떠난 지 14일이 지났다. 지난달 22일 토요일 오전에 민 동지의 부음을 듣고 한동안 얼이 빠져나간 듯했고 속이 메슥거려 한참을 토해야 했다.

김태환 열사 관련 투쟁상황실에 있을 때 “교문담당자회의 언제 하느냐”, “퇴직연금 자료 좀 달라”, “로드맵 정리자료 좀 달라”며 거의 생떼를 쓰고, 해고를 당한 후에는 아침마다 1인시위를 하면서 마주치던 그 인간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갔다는 소식은 참으로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다.

고 민한홍 동지 해고대책위와 명예회복대책위를 거쳐 슬픈 비를 동반하며 추모제를 거행하던 날까지 동지를 보낸 슬픔과 애도 속에서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빙빙 떠도는 의문이 있었다.

노조 내에서 활동하는 상근간부라는 것의 정체성에 대한 부분이다. 민 동지가 경험하였듯이 1991년 금속노련 입직(27세)과 2002년 이후의 화학노련 입직 후 사회생활을 노동운동으로 시작하고, 노조 내 노조를 설립하고 노조 내에서 대기발령을 받고 우두커니 사무실 중앙 조그만 탁자에 한달이 넘도록 아무 하는 일 없이 앉아 있어야 하고, 노조 내에서 해고를 당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그 동지에게 부여되어 있는 상근간부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들의 지위와 역할은 무엇인가? 그들의 신분은 무엇으로 봐야 하는가?

상근간부의 정체성은 도대체 무엇인지

학교를 졸업하고 흔히들 뛰어드는 사회의 직장생활을 마다하고 노동조합으로 들어오는 노조간부들이 노조 ‘상근간부’들이다. 물론 직장에 입사해서 노조활동을 하다가 파견 형태로 활동하는 ‘상근간부’들과 함께 통칭한다.

민 동지와 같이 ‘노동운동이 좋아서 일한다’는 것이 그들의 정체성일께다. 부를 좇고 명예를 높이고자 하는 것은 이미 포기한 지 오래다. 꿈이라면 이 사회에서 절대적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가 좌절과 분노의 삶을 살지 않고 세상의 주인으로서 자유의지로 노동을 하고 희망을 찾아가는 것,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닌 쟁취하고 확보해내려는 노력의 단결과 연대의 모습일 것이다.

이를 위해 상근간부는 정책, 조직, 홍보선전, 교육문화, 산재활동 등 노조활동과 노동운동 전망 등에 관하여 고뇌하고 적극 활동하고 있으며, 물질적인 보상보다는 자신의 실천과 노조조직의 활동성과에 더욱 큰 의미를 부여하면서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죽어라 신명을 바치는 것이고 그것을 조합원과 함께 공유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중요한 삶이요, 희망인 것이다.

이러한 상근간부가 활동하는 공간으로서의 장소는 노동조합이다. 그 노동조합이 단위조합이든 지역본부(지부)든 산별이든 총연맹이든 마찬가지다. 이러한 노동조합이라는 공간은 이윤을 확보하기 위하여 경쟁하는 기업과는 다른 성격이지만 하나의 조직체로서의 성격과 규율이 있는 것은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상근간부에게는 노조라는 공간이 전체 노동자의 권익과 근로조건 개선, 정치경제사회적 지위향상을 위한 스스로의 활동공간임과 동시에 한 가정을 책임지는 생계원천의 공간이기도 하다.

비록 노조 내 상근간부들이 전체 노동자를 바라보며 조합활동을 한다는 핑계(?) 하에 시간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생계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라 할 수 있지만 그들의 조합활동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은 높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근간부가 활동하는 노조조직에는 한 가지의 상반된 양태가 존재하고 있다. 하나의 노조조직체계 하에서 임원과 상근간부로 크게 대별된다고 볼 때, 양자는 노동운동의 발전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갖는 동시에 사용자/피용자 관계 하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동운동의 발전이라는 동일한 목표와 사용자/피용자성에는 근본적인 가치체계가 존재하여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내부민주주의의 실천에 대한 양자의 기본적인 인식이 갖추어져야 하고 발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노조활동이라는 명분이 ‘면죄부’는 아니다

그 이유는 노동운동의 발전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두고 동일 공간 내에서 조합활동에 대한 일방적인 지시와 권위라는 비민주적 요소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재정적인 면에서 노조 내에서 활동하는 상근간부라는 지위가 당연히 가정과 가족의 생활을 외면하고 조직적 결의에 따른 주면 받으라는 면죄부의 증표가 아니라는 것에서 출발하여 임원과 상근간부라는 사용/피용자 간의 관계에서 양자간 아무런 소통(협의)가 없는 비민주적 요소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역사발전의 모습은 민주주의가 확대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노동운동이 한명의 노동자로서는 경제사회적 우위에 있는 자본에 대등한 지위를 확보하지 못하고 하나의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켜내지 못하며 일방적 지배종속을 당하는 폐해를 방지하고자 머릿수를 늘려 노조를 건설하고 공장과 산업과 국가단위의 전체 노동자에 대한 주인의식으로서의 민주주의를 확대하고자 하는 것은 같은 이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노동조합의 조직체계는 많은 사람들의 여론을 모으고 집약해가는 민주주의에 대한 효율성을 견지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기업-지역-산별-총연맹의 조직체계를 갖추고 민주집중성을 효율적으로 집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직체계 내의 직급을 두고 지휘체계를 두는 것은 민주성에 대한 의사전달의 매개와 집행력의 파급효과를 증대하고자 하는 수단으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조직체계나 지휘체계를 갖추는 것은 민주주의라는 가치의 확대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의 의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존중과 민주주의에 대한 보편적 가치실현은 노동조합의 조직체계 내에서도 특별한 것은 아니다. 자본과의 대척점과는 달리 계급장 떼면 하나의 노동자임을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수단’으로서의 계급장이 ‘가치’로서의 인간존엄과 민주주의를 훼손하거나 선을 넘어버려서는 안되는 것이다.

민한홍 동지가 가장 어렵고 힘들게 느꼈던 것은 스스로 하고 싶어 했던 ‘일’을 못하게 하면서 한달이 넘게 소탁자에 앉아있으라는 비인간적 지배질서요, 노동판에서 사람 자르는 것에 대한 죄책감 없는 무소불위의 숨 막히는 권위주의에 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에게는 무단결근과 지시불이행이라는 죄목이 노조활동이나 노동운동 본연의 ‘가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조직체계 내의 ‘수단’에 의하여 해고결정이 내려진 것에 좌절하고 생을 포기할 만큼 중압감에 짓눌렸다는 것을 뜻한다.

민주주의가 무너질 때 집단적 이해대변 기구 생겨나

‘권위’는 스스로 생겨나는 것이요, ‘권위주의’는 권력이 되어 일방적으로 행사하는 것이다. 노동조합 내의 모든 일상활동이 인간존엄의 가치 하에 의사소통과 존중의 문화가 확대될 때 지도자는 권위가 생겨지는 것이며, 지배와 복종의 문화가 확대될 때 민주적 요소는 사라지고 권위주의가 판치게 되는 것이다.

전체노동자가 주인이요, 이러한 주인을 섬겨야 하는 본질적 목적을 위하여 활동하는 노동판에서 임원과 상근간부라는 것으로 편을 가르거나 분할구도가 형성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본다.

또한 조직의 의사결정이 상층에만 집중되어 결정되거나 지배와 복종의 문화가 노동운동 조직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말도 안 되는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 것이다. 노동조직이 민주성을 놓치는 순간 비록 집권(당선)은 가능할 수 있었으나 통치(조직운영)는 불가능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조 내 민주성이 지켜지지 못하는 경우 조직 내부의 집단적 이해대변 창구가 필요하다는 역설의 역설이 통용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상근간부들의 신분보장과 활동조건 개선 등을 위해 스스로의 이해 대변창구를 만들고 조직 또한 이를 보장해주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 어느 조직보다도 민주주의의 학습도량이요, 가장 인간적이고 평등을 지향하는 곳이 노동조합이라는 당연한 명제 앞에서 전체 노동조합 조직운영의 민주주의 실현과 확대는 물론이고 노동조합 조직 내부의 민주주의의 실천은 같은 목적을 갖고 있는 노동자들끼리 활동하는 운동조직이라는 이유로 비민주성이 허용되고 눈감아주어야 한다는 것은 정녕 아닐 터이다.

노동운동 조직인 노동조합 내부의 비민주성이나 잘못된 운동관행이 있으면 바뀌어져야 한다는 것은 차치하고 상근간부들의 개별적 고충과 집단적인 개선요구사항들을 수렴하기 위하여, 상근간부 대표와의 정례적 만남이나 내부 민주주의를 통하여 통합적인 조직문화의 유지·발전을 위한 조직체계는 반드시 필요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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