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 재보궐선거 당일 이런저런 판세 분석이 있었다. 낙관적 전망도 있었지만 과정이 결과를 말해주는 것. 결과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투표율 추이를 보며 신장식 비서실장에게 선거 결과를 보고 김혜경 대표께 책임 있는 결단을 우리가 먼저 말씀드리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선거 직후 마지막 브리핑을 한다는 생각으로 약간 떨리는 마음으로 선거결과를 수용하고 당을 새롭게 만들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지도부와 함께 사퇴하기까지

내 거취 문제 또한 선거 결과와 함께 결정하였다. 단지 선거 결과에 대한 책임이 아니라 당의 총체적 위기에 대한 지도부의 책임이 불가피하고 지도부와 함께 나 역시 책임을 지는 게 당 혁신의 출발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지도부 총사퇴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진행되었고 논의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주대환 정책위원장이 책임론을 제기했고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김혜경 대표를 개인적으로도 존경하고 사랑하는 내 마음에도 깊은 상처를 내고 대표님의 결단을 조용히 촉구했다. 복잡한 당내 구도에서 대표의 행보가 너무나 중요하기에 의견수렴과정이 길었다.

총사퇴를 결정하기 전날 자정을 넘기고 비서실장으로부터 대표께서 결단하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상황에 따라 공식적으로 사직서를 내고 총사퇴를 촉구할 생각을 굳히고 있던 터라 한편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대표를 제대로 보좌하지도 못하고 책임만 요구한 지난 과정을 생각하며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천사의 얼굴로 잠들어 있는 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남편과 밤새도록 당의 현 상황과 이후 진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날 최고위원회에서 총사퇴 결정을 하기까지 격론이 벌어졌다. 농민들의 생존이 걸려 있는 쌀 투쟁을 앞두고 총사퇴가 가져 올 공백에 대한 우려를 농민담당 하연호 최고위원이 가슴이 울리도록 절절하게 이야기했다. 현대 하이스코 노동자들의 목숨을 건 투쟁을 엄호하는 것을 최고위원의 마지막 업무로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오후 4시가 되어서야 총사퇴를 공식 결정하고 대표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기자석에서 눈시울을 붉히고 대표 기자회견을 바라보는 김종철 최고위원과 이정미 최고위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비대위 구성 일정까지 확정하고 최고위원회의 공식 논의는 마무리가 되었다.

당은 언론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기자회견 후 후속 언론 브리핑도 마치고 대변인실 회의를 했다. 이후 상황 점검을 하고 사직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다음날 천영세 직무대행께 사직의사를 밝히고 당원동지들께 사직의 변도 올렸다. 그 이후 대변인으로서의 공식활동은 하지 않고 11월5일 비대위가 구성될 때까지 비공식 활동으로 업무를 마무리하고 있다.

1년반 정도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대변인으로 활동하며 대국민 정치의 방향을 조금이나마 배웠다. 이것이 개인적 경험이 아니라 당의 자양분이 될 수 있도록 정리하고 재충전하는 시간을 당분간 가질 계획이다.

이번 총사퇴 결정까지 당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당 출입기자단은 한결같이 신속한 지도부의 책임 결정을 기대하고 있었다. 기자가 보는 시각으로 당은 여전히 언론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당원과 기자들의 시각을 늘 맞대왔던 과정에서 당원들이 바라고 기대하는 당의 방향과 기자들이 바라보는 그것이 때로는 일치했고 때로는 엇갈리는 것을 보아 왔다.

국가보안법 폐지 ‘올인’ 논란이 그랬고 비정규직문제와 쌀 개방 비준 저지 농성이 그랬다. 기자들은 늘 동의와 우려를 함께 표현했으며 당의 원칙적 행보를 지켜보며 조언도 하곤 했다. 그 과정에서 국민에게 비쳐질 민주노동당에 대해 당 지도부나 당직자보다 세심했던 기자들이 대부분이다. 당직공직 겸직금지 결정에 대해서 거의 대부분의 기자들은 다음 지도부 선거에 언론의 관심이 극도로 줄어들 것을 우려했고, 그래서 당원들보다 더 강하게 겸직금지가 풀려야 한다는 주장을 하곤 했었다. 10월8일 중앙위원회 이후 기자들과 환담을 나누는 자리에서 대변인으로서 겸직금지 원칙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일부 기자들은 심지어 원망스러워하기까지 했었다.


진보정당을 응원했던 언론노동자

대변인이 되고 난 후 처음 기자들과 사적인 이야기를 나눌 때, 나는 당원으로서 언론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고 있던 기억들을 이야기하곤 했었다. 대 언론활동을 하며 언론에 대한 적대감에서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로 비중이 옮겨졌다. 그것은 단지 역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당 기사를 쓰며 당원만큼 당의 행보에 관심과 애정을 기울인 기자들의 도움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여전히 언론 일반에 대한 나의 평가는 달라지지 않았지만 정치와 언론이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 우리 스스로 개척하고 변화시키는 것의 중요성을 체득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언론노동자들이 진보정당을 응원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을 것이다.

지난 여름 대변인으로 처음 당에 출근했을 때 대변인실에서 보관하고 있는 먼지 앉은 파일을 열어봤던 기억이 난다. 전부 보관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국민승리21 시절부터 당 대변인과 부대변인이 쓴 논평과 대변인실이 준비한 보도자료, 언론스크랩 자료가 보관되어 있었다. 민주노동당 창당 이후 이상현 대변인과 김종철 대변인이 쓴 논평을 훑어보며 당시 언론이 전혀 주목하지 않는 정당에서 당을 알리고 현안에 개입하기 위한 대변인들의 노고를 읽어낼 수 있었다.

15대, 16대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의 TV 토론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펼쳤던 여론전, 상가임대차보호법 제정 등 매회 기자회견마다 퍼포먼스를 준비했던 경제민주화운동본부의 활동들, 원외정당으로서 입법에 개입하지 못한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국민의 헌법상의 권리보장을 위한 비례대표 배분방식, 공무원교사정치활동자유, 이라크 파병, NEIS, 선거연령 하향 조정 등 여러 가지 헌법소원으로 ‘헌법소원당’으로 칭해진 뉴스, 소수정당의 한계에도 가끔 언론에 등장한 ‘진보정당의 젊은 입’으로 촌철살인을 칭송받았던 김종철 부대변인의 논평들….

8월22일부터 27일까지 치러졌던 역사상 초유의 남북정당교류 역시 2000년 권영길 대표 시절부터 추진해 왔던 노력 하나 하나가 이루어낸 결실이었다. 그 험난한 과정과 노력이 그 파일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운동권 단체 벗어난 정책논쟁으로

나 역시 창당 초기에 중앙당 활동을 했던 경험으로 당시 대변인실을 비롯해서 각 부서에서 당 출입기자도 없는 상황에서 언론에 민주노동당 이름 한 줄, 사진 한 장 반영하기 위해 보도자료를 뿌리고 기자들에게 직접 전화를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지도부 총사퇴 이후 언론은 ‘민주노동당 계파 갈등 우려’ 등 당의 행보에 어쩌면 과도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애정어린 관심이기도 한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내가 사직의 변에서도 밝혔듯이 당 대국민정치의 한계는 ‘왜곡된 대중조직과의 관계와 정파 결정에 전적으로 좌우되는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내 정파의 기능이 보수정당 계파 갈등과는 다른 민주노동당의 역동성으로 표현될 수 있는 ‘심도 깊은 논의와 선의의 경쟁’으로 보도될 수 있기를 바란다.

‘여전히 운동 단체에’ 머물러 있는 피상적인 NL-PD 논쟁으로서의 ‘정파 갈등’이 아니라 ‘진보정당의 건강한 정책 논쟁’으로 당 내부 논쟁이 국민의 관심과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도록 변화를 추구했으면 한다. 이제 대변인이 아닌 논의의 당사자로서 당원의 한 사람으로 언론을 바라보고 만날 예정이다. 예상보다 빨리 막을 내린 미흡한 연재기고를 읽어주신 독자들과 지면을 할애해준 <매일노동뉴스>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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