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운(48)씨는 농촌에서도 보기 드문 ‘인간문화재’급 농민이다. 영운씨는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열여덟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 군복무기간 3년을 제외하고는 마흔여덟살이 될 때까지 김제에서 오로지 논밭만 일구어 왔다. 겸업으로 축산을 해본 적도 없다. 농촌이 어렵다 보니 영운씨같은 '농민'은 농민들 사이에서도 희귀(?)한 존재가 되었단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기자가 찾아갔을 때 영운씨와 부인 장정애씨(43)는 '추수'를 하고 있었다. '추수'라고는 하지만, 복장터진 지가 하도 오래라 별 감흥도 없는 그런…. “바쁘다”면서도 트럭을 몰아 김제 시외버스터미널까지 직접 마중을 나온 영운씨가 '서울손님'을 맞는다. “나는 농사 성공 못한 사람인디. 나같은 사람 야그는 뭐 할라고….” 기자가 쭈볏쭈볏하며 우물거리자, 영운씨는 대뜸 “몇시차 끊었냐”고 묻는다. 도시 손님들을 숱하게 대접한 눈치다. 농촌으로 누가 수학여행이라도 오나.


콤바인 3,400만원

‘그 끝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넓디나 넓은’(조정래 <아리랑>에서) 김제 만경평야에 영운씨의 논이 있었다. 영운씨가 농사짓는 논은 2만7천평으로 영운씨 소유의 논은 1만평, 나머지는 농업기반공사에서 임차한 1만2천평 등 남의 논이다.

들판은 콤바인 소리로 요란했다. 영운씨의 '지역후배'이자 전국농민회총연맹 전 사무총장인 박흥식씨가 콤바인을 몰고 논바닥을 돌고 있다. 영운씨의 아내 정애씨는 낫으로 콤바인이 훑어내지 못한 벼를 베어내고 있었다. 일하는 사람은 달랑 세 사람. 보통 두 사람이 이틀이면 끝나는 일인데 영운씨의 건강이 좋지 않아 흥식씨가 나섰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저 멀리 옆의 논에는 콤바인 한 대와 두 사람이 일하고 있다.

“저 콤바인이 3,400만원이야. 아파트 한 채 값이여”

영운씨가 홀로 되신 어머니와 농사를 짓던 70년대에는 논 한 필지(1,200평)에서 벼를 수확하는데 낫으로 벼를 베어내는데 3명, 볏단을 묶는데 2.5명, 탈곡해서 나르는데 9명 해서 십수명이 필요했다고 한다. 14명~15명이 하루 내내 했던 일거리를 콤바인으로 하면 1시간30분으로 끝난다. 이러니 빚을 내서라도 시골의 아파트 한채값과 맞먹는 농기계를 사야 한다. 영운씨는 지난해 농협에서 대출을 받아 3,400만원을 주고 콤바인을 샀다.

세 사람은 아무말 없이 일을 해나갔다. 흥식씨가 콤바인작업을 하고, 탈곡된 벼가 바로 포대에 들어갈 수 있도록 포대끝을 콤바인에 매다는 일은 정애씨가, 흥식씨는 트럭으로 김제농협미곡처리장까지 실어 날랐다. 트럭을 콤바인 가까이 붙여 놓아라, 포대를 바로 놓아라, 등등. 이런저런 말이 필요할 법도 한데. 눈도 마주치지 않고 각자 일을 하는데 손발이 척척 맞아 떨어진다.

웬 찝차 한대가 논바닥 안으로 쑥 들어왔다. 시내 식당에 주문했던 밥이 온 것이다. 아니 그런데 3인분이다. 영운씨가 4인분 시켰는데 왜 3인분이냐고 하니 식당집 딸 왈, 오늘 너무 바빠 정신이 없단다. 오늘 점심때만 해도 논으로만 15번 배달했단다.

'산천은 의구한데 새참은 간데없고'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고"가 아니라 "산천은 의구한데 새참은 간데없고"인 셈이다. 정애씨가 설명을 해준다. “농촌에서 밥 시켜 먹은 지 한 3~4년 됐어. 기계로 농사짓고부터는 여자들도 남자들하고 들일을 할 수 있으니까. 여자들이 밥해서 나를 형편이 안 돼.” 그럼 여자들이 편해진 게 아니네. 정애씨는 “남자들하고 똑같이 일을 하다보니 아무리 기계로 한다고 해도 힘에 부쳐. 나도 팔목, 어깨, 골병이 다 들었어.” 정애씨는 압박붕대 같은 것으로 감아 놓은 팔을 보여준다.

논바닥에 포대를 깔자 식탁이 되었다. 김치찌개와 생선구이, 달걀부침 등 식당에서 흔히 나오는 반찬 몇가지다. 수저가 모자라 서로 양보하다 두 사람은 숟가락만으로 두 사람은 젓가락만으로 밥을 먹었다. 흥식씨가 숟가락만으로 밥을 먹는 이들을 위해 생선에서 가시를 발라 놓자 정애씨가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데 참 잘 한다니까. 저 집은 부부가 잘 지내야.”

김제가 고향으로 도회지로 나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김제에서 농민운동을 하고 있는 흥식씨네는 부부 사이가 좋기로 소문이 나 있단다. 동네 아줌마들이 보기에는 흥식씨가 화를 낼 일인데도 흥식씨 아내가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다. 흥식씨는 여자가 남편한테 큰소리 안 치면 어디가서 큰소리 치겠냐고 들어준다는 것이다. 정애씨는 밖에서 큰일(농민운동)을 하는 사람이라서 생각을 크게 한다고 칭찬을 하는데, 부러운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식사가 끝나자 다시 일이 시작됐다. 콤바인이 논바닥을 구르고, 트럭은 실어나르고. 해가 질 때까지 일은 계속된다. 엉겁결에 새참 아닌 새참을 얻어먹은 기자는 콤바인 뒤만 종종 따라다니며, 말을 붙여본다. 

영운씨네는 논 2만 7천평, 반 3000평으로 농사를 짓고 있다. 논 2만 7천평 중 1만 2천명은 2002년 농업기반공사에서 빌렸다. 한 필지(1200평)에 80kg 10섬, 한 섬에 15만원으로 계산해서 150만원을 주는 것이 계약 조건이다. 영운씨 소유의 논 1만평 중 8,000평은 농업기반공사로부터 1994년 한 필지(1,200평)에 1,500만원을 주고 사 들였다. 19년 동안 갚아 나가야 한다.


2만 7천평에서 정상적으로 수확되면 벼 560섬 정도인데 올 해는 수해로 450섬 정도 수확하게 된다. 한 섬에 11만원으로 계산하면 4,950만원이다. 쌀 소득보전직불제로 보전을 받으면 한 섬에 5만1,000원정도, 2,295만원이다. 쌀로 인한 총수입은 대략 7,245원이다.


농업기반공사에 내야 될 임대료, 갚아야 할 돈, 농약 값 등 투자비용, 농기계 값, 등을 제하면 순 수입은 3천만원 가량으로 보면 된다고 한다.


밭 3000평은 형님과 친구의 소유로 영운씨가 무상으로 배 농사를 하고 있다. 1994년부터 배를 심어 4년 뒤, 98년부터 수확했다. 올 해는 수해로 15kg 박스로 800개를 수확했다. 추석 때 600만원어치를 팔았는데 봉지값 등 자재비 빼고 260만원이 통장에 들어 왔다. 동네 사람들과 만든 작목반에서 공동선별 공동 판매를 하고 있다.


집터는 600평으로 이 역시 영운씨 형님의 소유다. 10년 전 가축이라도 키워보려고 형님의 땅에 가건물을 지어 들어 왔는데 가축은 키우지 못하고 있다.


농기계는 콤바인, 트랙타, 경운기가 있다. 이양기가 있었는데 망가져서 쓸모가 없게 됐다. 내년 봄에는 이양기를 사야 된다.


현재 영운씨네 빚은 대략 1억 정도이다. 빚이 차츰 차츰 늘어서 언제 무엇 때문에 빚이 생겼는지도 모르겠고 화가 나서 계산도 안 하고 산다고 한다. 

이삭 놓고 한숨짓는 '이백석꾼'


영운씨를 따라 김제농협미곡처리장으로 갔다. 영운씨는 김제농협과 계약 재배를 하고 있다. 농협이 선정한 품종의 벼를 심어 수확할 때 품질검사를 받아 합격을 하면 농협에서 벼를 사들이는 것이다. 영운씨가 김제농협과 계약 재배한 분량은 40kg로 200섬(산물벼). 이 벼는 김제농협 마크를 달고 '야심작'이라는 상표로 시중에 판매된다.

영운씨가 농사짓는 땅 2만7천평에서 나오는 쌀은 80kg짜리로 560여섬 가량 된다. 올해는 수해로 450섬 정도 나올 수 있다. 나흘 동안 논이 물에 잠겨 있었다니 이만저만한 손해가 아니지만 수해보상도 되지 않는다. 수해 피해가 80%는 되어야 보상이 된다는데. 이건 완전히 망해야 보상을 해주는 법이다.

농협과 계약재배한 분량 외에 나머지 350섬은 이후 농협에서 시가매입을 할 때 팔 예정이다. 올해부터 정부에서 수매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농협에서 사준다니 다행이지만 영운씨는 농협 걱정을 한다. “쌀 소비가 안 되는데 사들여 놓으면 워째. 농협 망하는 것 아닌지 몰라.” 어이구 착한 영운씨.

정부에서는 수매를 하지 않으면서 쌀소득보전직불제를 내놓았지만 이것도 영판 문제가 많다. 지역별로 쌀값이 다른데 정부에서는 어느 지역이나 할 것 없이 똑같이 80kg 한섬에 17만70원으로 책정해서 판매한 쌀값의 차액 85%를 보전해준다. 전라도지역의 쌀값은 낮다. 현재 11만원대. 경기도지역 쌀은 14만원대. 호남평야에서 쌀이 많이 나기 때문에 경기지역보다는 질이 떨어진다고 한다는데. 영운씨는 이것도 이해가 안 되지만 어쨌든 쌀값이 싼 전라도 지역은 이래저래 손해다.


그래, 논귀신이 붙었다!

“국민들은 쌀소득보전직불제다 뭐다 해서 농민들이 혜택을 보고 있다고 생각들을 하시것지만 정부에서 하는 일이 농민들에게 도움이 안 되는겨. 지역 실정에 맞지도 않고…. 쌀값이 자꾸 떨어지는데…. 차라리 재배를 조금만 해라고 하든지.” 오늘은 다른날도 아니고 수확하는 날이다. 월급쟁이가 월급받는 날이 기다려지듯이 농부들은 이날을 기다린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이 좋은날, 한숨 섞인 넋두리가 절로 나온다.

미곡처리장에서 만난 동네사람이 영운씨의 낯빛을 슬쩍 본다. 지난해 영운씨는 간암3기 진단을 받았다. 영운씨 말대로 농사지어 성공도 못했는데 큰병까지 왔다. “처음에는 일찍 왔다고 원망도 많이 했지. 이게 실은 군대 가서 생긴 거라고 봐야 돼. 나가 군대서 폐렴에 걸려 입원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B형 간염이 생긴 것 같아. B형 간염이 있으면 군대를 못 가잖어. 그전에는 없었다는 야그지. 폐렴 걸려 누워 주사를 맞았는데 그때는 1회용 주사기도 안 썼응께. 나라 원망도 했는데. 올 것이 일찍 왔다고 코빠뜨리고 앉아 있어 봤자 무슨 수가 나는강.”

남의 말 하듯이 무덤덤하게 말하는 영운씨지만 트럭을 보채 바삐 몰아댄다. 논귀신이 붙었나? 잠시라도 틈을 두지 않고, 논으로 가는 영운씨.

어떤 책에서 본 이야기지만, 암이나 중병에 걸린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 외에 세상에서 버려진다는 느낌, 충분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 사랑받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영운씨는 사는날까지는 죽어가는 대한민국 농업이 버려진다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충분히 보살피려 하고 있다. 그래서 남들이 다 쉬어야 된다고 해도 올해도 농사를 짓고, 정부를 향해 농업을 포기하지 말라고 투쟁까지 하고 있다.

영농후계자 영운씨

“아프고 봉께. 살아온 것을 죽 생각하게 되잖어. 성공을 못 했어.” 그런데 농사를 지어 성공을 할 수가 있기는 있나. 영운씨는 농사를 지어 성공하기를 감히 꿈꾸었나 보다.

영운씨 아버님 역시 농부셨다. 논 2천평과 밭 700평을 부치며 김제에서 사셨다. 8남매를 두셨다. 영운씨는 일곱번째. 영운씨가 아홉살 되던 해 아버님께서 병으로 돌아가셨다. 그때는 무슨 병인지도 몰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질인 것 같기도 하다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영운씨.

아버님 살아계실 때 고등학교까지 마친 맏형은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고, 둘째 셋째형은 초등학교만 마치고 도시로 나가 노동자가 되었다. 어린 영운씨는 맏형의 도움으로 고등학교를 다니다 2학년 때 중퇴를 해버렸다.

아버지 돌아가신 뒤 어머님 혼자 농사를 지으시는데 그게 너무 애달파 농사를 거들다 보니 그만 학교는 영원히 쉬게 되었다. 맏형이 집안을 보살펴도 아버지께서 남겨놓으신 빚 갚느라 허리가 휠 지경이기도 했고. 쌀 한섬 빌려오면 가을에 반섬을 이자로 내야 하는 장리빚 때문에 매해가 보릿고개.

영운씨 열여덟살 때, 농사를 본격적으로 짓기 시작하던 때가 1973년이었다. 진짜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로 넓히자던 시절. 영운씨네는 이때 초가집을 슬레트지붕으로 바꾸지 못하고 함석지붕으로 바꿨다. 마을길은 '전두환 대통령'이 되고 나서야 마을당 지원금이 100만원씩 나와 넓히고 포장을 할 수가 있었다.

영운씨는 농촌 청년으로 농사에 상당히 매력을 갖고 있었다. 4-H 활동을 열심히 하며 농사기술을 도입하는데도 앞장섰다. 요즘이야 고추육모재배가 일반적이지만 그때만 해도 아무도 하지 않았는데 영운씨가 시작을 했단다.


순수했던 부부…그러나 순진했던 부부

1977년 군대를 가서 1980년 제대를 한 뒤, 잠시 고민을 하기는 했다. 다들 농촌을 떠나던 시기였다. 70년대 말 80년대초 이농현상이 가장 심했던 때다. 영운씨도 도회지 나가려다 홀로 농사짓는 어머니가 걸려 마음을 접었다. “시골에서는 여자가 혼자 농사지으면 좀 그래. 괄시도 하고…. 그렇거등.”

어머니와 농사를 짓다 1986년 중매로 김제에 사는 정애씨와 결혼했다. 정애씨는 농부의 딸이기는 해도 3남1녀 중 외동딸이라 농사일을 하며 커지는 않았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근처 쌍방울공장에 다니던 꿈많은 아가씨였다.

선을 봤는데 영운씨의 순수함에 반해 결혼하기로 했다. 순수라는 말이 영 꺼림칙한 요즘 세상이지만, 정애씨 눈에 비친 영운씨는 정말 순수한 농촌청년이었다. 정애씨 생각은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렸다. 영운씨는 순수했지만, 농사와 농촌은 무대책이었던 것이다.

농촌에서 살았지만 농사일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고, 농촌에 대해서 막연히 낭만적으로 생각했다는 정애씨. 그네 역시 농부의 딸인데 어찌 이런 일이. 그러나 농부의 아들인 영운씨도 마찬가지였다. 농사를 열심히 지으면 선진국가의 농부들처럼 잘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이 젊은 부부를 온통 사로잡았으니까. 이때 영운씨는 농어민후계자였다.

결혼해서 3년 뒤 논 1천평으로 분가를 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고생 아니 고행이 시작됐다. 논농사 지으면서 밭농사를 지어 돈을 더 벌어보기 위해 남의 밭을 빌리기도 하고 또 논농사 지은 돈으로 밭을 사기도 하며 감자와 대파를 심어놓고 정성들여 키워놓았더니 가격폭락으로 갈아엎기를 몇번. 거저 주다시피 감자를 내놓기 몇번. 이번에는 대파나 감자보다는 가격이 더 나간다고 해서 수박을 키운다고 영농자금대출 받아 땅을 늘리고 시설투자해 7년을 지었지만 제가격 받은 해는 딱 한 해뿐. 빚만 안은 셈이다.

농사지어 돈벌겠다는 꿈은 사라지고…

80년대, 90년대 정부가 농업기계화정책을 내놓으면서 논농사 하는데도 돈이 들기 시작했다. 농촌에 일손은 없고, 농사를 지으려면 기계를 구입해야 일이 되니 어쩌겠는가. 농기계구입자금 대출 받아 경운기부터 트랙타, 이양기, 콤바인까지…. 물정 모르는 녀석이 보면 기계화니 뭐니 하며 선진농민 어쩌구 할지 모르겠으나, 쌀값이 오르지를 않으니 이게 순 빚덩이고 웬수다.

정부에서는 마을농업기계화사업이다 뭐다 해서 농기계를 공동으로 구입할 수 있도록 보조를 했지만 이건 현실적으로 맞지 않았다. 농기계라는 게 1년 쓰고 나면 고장이 나기 시작해 수리비가 만만찮게 들어가는 데다, 여러명이 쓰다 보니 '시장 좌판의 곤 달걀만치로' 관리가 되지 않는다.

부지런하고 농사솜씨 좋기로 소문났던 영운씨. 그 영운씨는 끝내는 농사지어 성공하겠다는 장밋빛 꿈을 포기하고 그저 농산물 제값만 받고 빚만 안 지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끔 되었다.

그저 원하는 건 '제값'만 받게

나락을 내려놓고 다시 논으로 가니 정애씨가 배나 깎아 먹잔다. 그러니까 이게 진짜 새참인 셈이다. 배가 실하다. 몸이 아파 제몫을 다 못한 영운씨가 논두렁에 쪼그리고 앉아 배를 깎는다. 깎다 말고 문득 고개를 들며 김영삼 전 대통령 얘기를 꺼내는 영운씨.

“그 양반이 우리 농산물 중에 세계화 적응하는데 배가 유망하다고 난리를 쳤어야. 각 지자체에서도 배 심으면 지원한다고 해주고. 내가 원래 밭을 개간을 해서 소를 키우려 했는데 전경환이 땀시 생긴 소값 파동 때문에 겁이 나서 배를 심었는데….”

영운씨네는 밭이 3천평이 있다. 94년부터 이 밭에 배를 심어 놓았는데 애물단지다. 배농사는 일단 손이 많이 간다. 봄에 봉지 씌워주고 솎아줘야 되고. 일손이 없어 품삯을 주고 사람을 써야 된다. 20일 동안 5~6명 일꾼이 필요한데 품삯도 문제지만 사람 구하기가 힘이 여간 드는 게 아니다.

영운씨는 배 농사를 잘 지어보려고 수원농업진흥청으로 다니고, 원예박사를 초빙해서 기술도 배우고, 온갖 정성을 기울였건만, 이번에도 배값이 좋지 않아 재미를 못봤다. 더 열불이 나는 것은 이제 배에 대해 알 만하니까 몸이 아파 캐내야 하게 생겼다는 거다. 영운씨네는 내년에는 500평만 남겨 놓고 나머지는 배나무를 캐 낼 예정이다.

“정부에서 권장하는 게 1년이 지나면 변해. 시설채소도 뭐가 좋다고 해서 시설투자하고 한 겨울에 보일러 틀어서 재배를 해도 가격이 맞아야지. 툭하면 똥값 되지. 정부에서 아무래도 농업에 신경을 덜 쓰다 보니까 이게 자꾸 안 맞는 것이여.”

영운씨가 정부의 농업정책에 갖는 불만은 딱 하나다. 가격이 맞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쌀값도, 과일도, 시설 채소도. 투자한 만큼 나오고 인건비가 나와야 된는데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우리 농민들 정부 보고 도와 달라고 안 혀. 제값만 받을 수 있게 하라 이거여.”

농사로 망한 농민, 아들을 농업전문대로 보내다

일찌기 '순수한 농심'으로 4-H 활동을 했고, 또 농어민후계자 되어 김제농어민후계자회 회장까지 맡았던 영운씨. 농어민후계자회가 농어민경영자회로 간판을 바꿔 달았지만, 영운씨는 여전히 회원이다. 그러나 영운씨 마음은 딴쪽으로 기울었다. 영운씨는 농민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 김제농민회 회원인 영운씨가 이제 마음을 둘 곳은 농민회다. 농민운동을 하는 '지역후배' 흥식씨의 영향도 있었지만 애써 지은 농산물이 제값을 받지 못하는 데다 우르과이라운드를 시작으로 자연스럽게 투쟁에 나서게 됐다.

2003년 한-칠레 FTA 투쟁 때는 겁나게(?) 나섰단다. 트럭에 앰프시설하고 마이크 달고 틈만 나면 국회 앞으로 가자고 선전선동을 해대는 통에 영운씨가 농민회 동책으로 있는 검산동에서는 농민들이 관광버스로 6대나 나눠타고 서울로 출발을 했다고.

해가 떨어졌다. 일도 끝났다. 영운씨와 정애씨는 트럭을 타고 밑둥 잘린 논 위를 지나 집으로 향한다. 가로등이 켜질 만큼 어둑할 무렵 일을 마쳐 놓고는 영운씨는 오늘 요량했던 것만큼 일을 다 하지 못했다고 한마디 한다.

이런 영운씨를 쳐다보는 정애씨의 눈빛은 ‘대체 아픈 사람 맞나’ 하는 표정이다. 성한 사람도 피곤한데 중병에 걸린 사람이 일을 더 못해 난리니…. 그러나 영운씨는 아프고 나서부터는 마음이 급하다. 남은 시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건 정애씨도 마찬가지다. 정애씨는 올 생일 처음으로 영운씨에게 금반지와 목걸이 선물을 받았다.“해 달라고 땡깡을 부렸지 뭐.” 남편한테 사랑받는 것을 뒤로 미루고 싶지 않은 정애씨.

집에 들어서자 강아지가 컹컹 짖어대며 반긴다. 영운씨와 정애씨는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고 있다. 아들은 수원농업전문대에 다니느라 집에 없다. 딸은 고3이라 학교에서 아직 오지 않았다. 정애씨는 시골이라 학원도 못 보낸다고 한마디 한다. 늦게까지 하는 학원이 없단다. 전북대학교 경영학과를 목표를 해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걱정하는 정애씨. 농어촌지역 학생들은 특별전형이 있을 텐데…. 기자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농촌지역에서는 특별전형이 경쟁이 더 세서, 이건 사실 도움이 안 된단다.

기적을 꿈꾸는 농민들

아니 그런데 농사지어 성공 못했다면서 어떻게 아들을 농업전문대에 보낼 생각을 했을까. 영운씨가 싱긋이 웃으며 답한다. “첫째가 공부를 못해서고, 둘째가 우리 애기가 나마냥 어리숙혀. 도회지 나가 살믄 사기 당하기 십상이랑께. 그래서 농사시키려고.”

실은 세번째 이유가 더 기가 막히다. 기적을 바라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농사지어서 잘 먹고 잘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 희망을 놓칠 수 없어서. 기적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부처님이라고 해야 할지, 곰이라고 해야 할지. 이 사람이 바로 농민이다.

김제를 다녀온 다음날, 국회 농해수위에서 쌀협상 비준안이 통과됐다. 잘 도착했다는 인사도 할 겸 심정도 들을 겸 전화를 드렸다. 영운씨는 KBS 9시뉴스팀에서 나락적재투쟁 때문에 취재를 한다기에 흥식씨네 나가는 길이란다. “나가 아프고 난 뒤에는 서울로 투쟁을 안 갔는데 올해는 가야 쓰것구먼. 나 하나 간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질 것은 없는데 그래도 호소를 해야지. 귀 막힌 놈들이 호소를 듣겠나만은…. 전 농민이 연중 파업을 하믄 그때 정신을 채릴랑가?”

정애씨는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의 투혼에 감동을 받은 듯하다. “그분이 참 처절하게 하드만. 하기야 우리 농민 대표니까 그렇게 안 하믄 이상한 것이지. 농민들도 정신을 차리고 단결을 해야 되는데….”

560섬 농사를 하는 영운씨는 옛날말로 하면 2백50석꾼이다. 자기논으로만 계산해도 1백석꾼이다. 해방전만 하더라도 백석꾼이라면 농촌에서는 정말 하느님도 안 부러운 존재였다. 그러나 지금 영운씨와 정애씨를 부러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도시의 네온사인은 오늘도 불야성이다.

자식을 농업전문대에 보낸 농민 영운씨와 정애씨가 곧 있을 국회 앞 농민집회에 참여를 한다. 이미 세상은 농업을, 농촌을, 농민을 버렸는데, 아니라고 고개를 흔드는 영운씨와 정애씨에게 정부는 물대포로 환영을 할 것이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