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질서의 존중이라는 미명하에 획일화를 강요받는 명문고교생들. 그들에게 야외수업과 책의 서문을 찢게 하고, 교탁 위에 올라가 다른 관점으로 사물을 보게 하는 등의 새 수업법으로 학생들의 눈을 뜨게 해준 키팅 선생의 등장은 파격이었다.

“현재의 삶을 즐겨라. 우린 자유를 찾아 숲 속으로 떠난다.” 학생들은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동아리를 만들었다. 자신의 신념으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겠다는 학생 닐. 그는 연극무대에서 강제로 아버지에게 끌려나와 집으로 가게 된다. 그의 꿈과 이상을 채워줄 수 있는 선택의 길은 죽음이었다.

이상과 정열을 상실한 채 부모의 대리 삶을 살아야 하는 고통, 그것으로부터 해방을 갈구하는 선택은 어쩌면 죽음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청소년의 죽음과 좌절에는 사회가 그 방조자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학교측은 키팅 선생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해직된 키팅 선생이 문밖을 나설 때 학생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 명 두 명 책상 위에 올라선다. 떠나는 선생님을 아쉬워하며 학생들은 ‘권위에 대한 도전’ 인사를 보냈다. “앉아. 앉지 못해!” 그러나 교장 선생님의 권위에 찬 말은 갈수록 힘을 잃은 채 사그라들 뿐이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는 황폐화된 학교교육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지난 1989년 전교조 결성과 함께 선생님과 학생들을 갈라놓은 뼈아픈 경험이 우리에게도 있다. ‘입시경쟁’, ‘체벌’, ‘두발규제’, ‘학생회 불인정’, ‘종교의 자유 박탈’ 등 청소년들을 옭죄는 사슬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황폐화된 학교교육 ‘희망’을 찾아서

오는 11월3일은 76돌을 맞이하는 ‘학생의 날’이다. 1929년 일제치하에서 광주의 학생들이 ‘식민지배 반대’, ‘조선어교육 실시’, ‘학생자치 보장’, ‘비인간적 대우 철폐’를 요구하며 싸웠듯 2005년 학생들도 그들의 목소리를 사회에 호소하고 있다.

서울 용산구 중앙대병원 인근에 자리 잡은 청소년공동체 ‘희망’. 후줄근한 건물 3층의 사무실로 접어들자 바깥 풍경과는 사뭇 다른 똘망똘망한 눈망울과 재잘거리는 학생들의 말들로 활기에 넘쳐 있다. 연극공연을 준비중인 학생들. 영상화면을 편집중인 학생들. 토론에 여념 없는 학생들…. 

곧이어 학교수업을 마치고 하나둘씩 모여드는 고등학생들. 교육문제의 대안을 찾아가는 청소년 모임 ‘더하기’의 구성원들이다. 서울 시내 각기 다른 학교의 고1부터 고3 수험생까지 골고루 모여 있다. 학생의 날을 맞이해 청소년들의 요구발표와 퍼레이드를 준비하기 위한 자리. 두발, 체벌, 입시문제 등에 대한 토론이 먼저 이뤄졌다.

“야자(야간자율학습) 빠진다고 교장 선생님이 ‘얘들, 죽여버리겠다’고 말하더라구요. 정나미 떨어지고, 분개했죠.” “시험문제 많이 틀렸다고 허벅지에 피 나도록 맞았어요. 그런데도 선생님은 ‘다 너희들 위해서’라고 하더군요. 참나.” “학교급식 문제제기 했다고 퇴학시키겠다는 상황에 화가 났어요.” 고등학생들이 ‘희망’의 소모임인 ‘더하기’에 들어온 이유들이다.

학생들이 공분하는 주제는 우선 ‘두발’ 문제였다. 옆머리, 뒷머리, 앞머리 몇 센티미터. 교복깃에 닿으면 안 되고, 여학생들은 어깨를 덮지 않아야 한다. 이를 어기면 '고속도로', '까까', '몽실이', '쥐 파먹은 머리' 등이 된다. 일률적이지도 않은 잣대로 학생들의 머리가 수시로 수난을 당하다 보니 반감도 그만큼 컸다.


‘학교폭력 근절’ 외치며 교사는 ‘체벌과 폭력’

“선생님. 왜 자꾸 자르라고만 하세요.”
“학업에 지장주기 때문이야.”
“다른 학교는 머리 찰랑거리면서도 공부 잘도 하던데요.”
“외고 애들과 니들이 수준이 같냐. 니들은 인문계 애들과 달라.”

체벌을 넘어선 선생의 ‘폭력’을 이야기하는 학생들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고통스런 기억들에 학생들은 치를 떨었다. 성적이 1점만 떨어져도 무조건 매타작이다. 물론 학생들 잘 되라는 의미의 ‘사랑의 매’ 명목이었다. 머리가 길어서, 지각해서, 성적 떨어져서, 실내화 신지 않아서, 스승의 날 꽃 안 드린 죄(?) 등 맞는 이유도 많았다.

“몽둥이로 반 학생 전원을 풀스윙으로 20대씩 때릴 때 선생님이라기보다는 ‘악마’처럼 보였어요. 진짜 무서웠어요.” “모든 학교 선생님들이 다 저런가. ‘절대권력’의 폭력처럼 느껴져요.” “선생님 차 타이어 펑크 내고, 백미러에 락카칠하며 복수하기도 해요.”

이유 여하를 떠나 없어져야 할 폭력이, 학교에서 아직도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 현실. 선생님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폭력과 체벌은 상상을 초월했다. 실내화를 착용하지 않았다고 옆차기가 날라 오고, 그것이 오리걸음으로 운동장을 몇바퀴나 돌아야 하는 그렇게 큰 죄인지 학생들은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쟤, 오늘도 꼴등했냐.” 공부 못하는 학생을 소외시키는 선생님의 상습적인 언어폭력. 3년 내내 지속이 되다보니 그 아이는 “그래 난 어쩔 수 없는 꼴찌야”를 되뇌이며 자괴감에 빠져 들어야 했다.

머리를 툭툭치며 약 올리기, 출석부 모서리로 울 때까지 때리기, 실실 웃으면서 때리기 등 놀부가 울고 갈 선생들의 폭력은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고1 여학생이 들려주는 초등학교 때의 기억은 귀를 의심케 했다. “정신지체가 있는 학생이 수업시간에 존다고 당구큐대로 온몸을 때리고, 급식을 남겼다고 해서 토한 것까지 먹이게 했어요.” 몰상식한 선생이다.

서예시간에 실수로 먹물이 옷에 튀겼는데 학생의 뺨을 후려치고, 빨간펜(그 선생만의 필기규정)을 들고 오지 않았다고 얼굴이 퉁퉁 붓도록 때리는 상황. “너희가 잘하면 나는 선생이고, 너희가 못하면 나는 깡패다.” “내가 소싯적에 3~4명은 골로 보냈다.” 그런데도 폭력을 행사한 교사는 적군의 목을 벤 전장의 장수처럼 무용담을 늘어놓기도 한다. 얼빠진 선생이 아닐 수 없다.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일방적인 모욕과 폭력을 당해야 할, 그것을 지켜본 학생들에게 더이상 선생님은 존경의 대상이 아니었다. “애들은 패야 한다는 선생님을 보면 시대흐름에 적응을 못하는 것 같아요.” “학교폭력을 근절하자고 캠페인을 벌이지만 정작 선생님들이 더한 걸요.” “학교에서 뭘 배웠냐고 물어보면 선생님들이 때리는 것 배웠다고 얘기하고 싶어요.” 체벌과 폭력은 반감만 부를 뿐이다.

“선생님은 말하셨죠. 대학뿐이라고”

두발제한과 체벌 등이 아직도 횡행하는 이유를 학생들은 ‘입시문제’에서 비롯된다고 판단했다. “모든 것이 대학을 가기 위한 공부잖아요. 대학 못가면 너희에게 미래는 없다고 말하죠.” “이 세상은 승리자와 패배자만 있어요. 일류대학 나오면 좋은 놈이고 나머진 다 나쁜 놈이에요.” “공고에 들어가 기술을 배우고, 자격증 따고 싶었는데 부모님 때문에 할 수 없이 인문계로 왔어요.” “대학 안 가고 사회복지사의 길을 찾고 싶은데 부모님이 ‘어느 대학 출신이냐고 물으면 넌 어떻게 할래’라며 반대하시더라구요.” 시인이나 사회복지사의 꿈을 키우고 있는 고2 학생에게 주변에서 해주는 말은 실망스러울 뿐이다. “둘 다 돈벌이가 되겠니?”

실업계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불만은 더욱 높았다. “맨날 대학, 대학 하면서 수업도 별로 안해요. 단축 수업하는 이유도 안 가르쳐주고 선생님들은 탁구치고 계시더라구요.” “국·영·수 위주의 수업인데 왜 도덕을 안 가르치는지 모르겠어요.” “4년제 대학 중에 직탐(직업탐구) 보는 학교 별로 없잖아요.” “아! 공고 다니니…. 실업계는 노는 애들 간다는 (기성세대의) 차별의 시선이 크죠.”

과연 ‘교육’은 뭔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 학생들. “좀 제대로 가르쳐봐.” 선생님들에게 따지고픈 마음이라는 실업계 고등학교 3학년 한 학생의 이야기가 머리 속을 내내 맴돈다.

정치 무관심 조장, ‘아직 어리다’ 편견

26일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처음으로 선거연령이 20세에서 19세로 낮춰졌다. 그러나 이 나이는 대학1년생에 해당한다. 아직도 선거권과 정치참여는 성인의 권리와 동일시되고 있는 것. 18세 선거권 문제와 정치에 대한 고등학생들의 인식을 들어봤다.

“생각해 본적 없어요.” “정치에 관심 없는 아이들이 많아요.” “개나 소나 다 똑같고, 거짓말쟁이로 인식되니까요.” “지루하고, 고리타분하고 어려워하죠. 정치를 접할 계기가 없는데, 쉽게 받아들이도록 교육할 필요가 있어요.” 학생은 학생일까? 아직 영글지 않은 생각의 파편들.

만약 투표권이 주어지면 어떤 공약을 내세우는 정치인에 투표할 건지 희망의 임선재(24) 활동가가 물었다. 어려운 이들을 도와주는 사람, 투명사회 만드는 사람, 국토의 균형발전과 통일을 이룰 수 있는 사람, 말만 하지 않고 차근차근 공약을 풀어나가는 사람 등 다양했다. 학생들 사이에 제일 호응이 좋았던 말은 단연 교육문제였다.

“대학평준화요.”
“오~오. 와.” 일제히 환호성이다.
“프랑스처럼 1, 2대학 번호를 붙였으면 좋겠어요.”
“수업시간도 줄이고요.”
“대학 진입은 쉽고, 졸업은 어렵게 그런 제도….”

국민의 4대 의무를 지게 되는 나이 18세. 그러나 성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권리는 멀리 있다. “고3 일부에 투표권이 주어지면 정치인들이 ‘두발제한 폐지’ 등을 공약하지 않을까하는 긍정적인 기대도 합니다.” 인문계 고등학교 3학년인 한 학생의 고민이 깊어 보였다.

1학년 때의 기억. 수업시간에 쌀 개방의 당위성을 주장하던 선생님의 말에 ‘쌀 개방이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며 반대의견을 피력했다. 돌아오는 답은 면박이었다. “넌 공부나 하지, 왜 쓸데없는 곳에 관심을 쏟냐.” 이 학생은 올해 민주노동당 당원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었다.


자유를 찾아 숲속으로 떠나는 학생들

다음날 저녁 민주노동당 한 지역위원회에서 이 학생을 다시 만났다. 수능시험이 한달도 채 남지 않았는데 불안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중상위권은 유지하고 있어요. 성공회대 NGO대학에 갈 생각하고 있고요. 앞으로 ‘대안교육’ 관련한 연구자나 사회활동가가 되고 싶어요.” 지역위에서 만난 또다른 학생 당원. 고등학교 2학년인 이 학생도 자신의 생각을 키우고, 실천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마치면 청소년인권운동이나, 비정규운동을 하고 싶어요.”

학교에서 배우는 사회과목은 특히 ‘노동자 중심’이 아닌 ‘사용자 중심’이라며 문제의식을 펼친다. “근로자는 ‘일하는 사람’ 노동자는 ‘시위하는 사람’ 정도로 인식하고 있어요. 청소년 노동인권교육에서도 인권위 강사께서 ‘근로자’와 ‘노동자’의 차이에 대해 설명을 잘 못하시더라구요.”

손에 들고 있는 책도 예사롭지 않다. ‘자본론 1-1권’ 독서량도 꽤 많아 보였다. 어떤 계기가 있었을까? 그는 중학교 때 집안사정으로 학원 공부를 중도에 포기했어야 했다. 아버지는 건설현장에서 어머니는 식당에서 일하는 있는 ‘비정규직’이었다. “사고 싶은 것 못 사고, 말을 해도 안되고, 부모님 원망 많이 했죠. 왜 이리 돈도 못 벌고 그러실까, 그러다가 문득문득 사회구조의 문제를 느꼈죠.”

올해초 최순영 의원실에서 주최한 ‘청소년 입시제도 문제’ 토론회를 통해 입당하게 된 이 학생은 여러 청소년단체에도 가입해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부모님은 처음에 민주노동당에 가입해서 활동하고 있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반대만 하는 당’으로 비췄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모님도 이제 “(당에 가면) 잘 갔다 오라”고 말씀하실 정도다.

고등학생들의 정치참여, 당 활동에 대해 30~40대의 당원들조차 ‘기대반 우려반’이다. 그러나 고등학생들은 이제 자신의 머리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데 이른 나이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입시교육, 실업계차별, 체벌 및 학생인권, 급식 등 환경문제, 학생회 법제화 등 그들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청소년들은 기자회견도 갖고 ‘청소년 자유선언 퍼레이드’ 등 각종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자유를 찾아 숲속으로 떠나는' 학생들의 발걸음은 당당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선거연령 18세, 젊은 생각·신선한 선택 존중해야
                                                                        김대유 교육개혁시민운동연대 공동대표(서문여중 교사)


유엔에서 1989년에 제정되고 우리나라가 1991년에 비준한 ‘어린이 청소년 권리조약’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청소년은 사랑의 대상이자 권리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청소년은 이 사회의 그린벨트이며 동시에 공동체의 당당한 일원으로서 권리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정신에 입각하여 서구의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국가들은 일찌감치 청소년의 권리에 대해 그 통로를 열어놓고 있다. 스웨덴은 학생들이 학칙 제정 등 학교운영과 지역사회 교육구조에 이르기까지 참여할 수 있는 길을 확보하고 있고, 미국은 학생대표가 주교육위원으로 활동하며 청소년의 교육·복지·인권에 대한 정책을 제출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다.


고등학생이 선거에 참여하고 운전면허를 획득하는 등 사회활동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다. 이들 국가에서 청소년의 주체적 활동을 장려하는 또다른 측면은 국가경쟁력에 있다. 청소년은 정서적으로 민감한 시기다. 열정과 상상력이 넘치는 시기이기도 하다. 청소년들의 주체성은 창의적인 교육력 창출, 문화선택권으로 이어진다.


교복을 입지 않고 사복을 입게 되면 자신에게 맞는 옷을 고르면서 컬러와 패션에 대한 안목이 생긴다. 그 선택의 안목은 곧바로 21세기 문화산업의 자산으로 이어진다. 학생회를 법제화 하여 학생들이 자신의 두발, 신체, 인권, 복지에 대해 학칙 제·개정에 참여하게 한다면 그 즉시 정치적 판단력과 공동체성 확립이라는 두 개의 주제를 덤으로 얻을 수 있게 된다.


OECD 국가들이 학교자치를 도입하고 청소년 인권을 보장하는 것은 바로 이 문제가 미래 국가경쟁력의 핵심코드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다. 영상세대(TV age)라 불리는 지금의 청소년들은 옛날의 청소년들과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뚜렷한 획을 긋고 있다.


먼저 ‘경제적 측면’에서 신세대들은 어느새 우리 사회의 주요 소비자 계층으로 부상된 ‘소비에 대한 헤게모니’를 장악한 집단이다. ‘문화적 측면’에서도 대중문화의 소비자이자 향유자로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매스미디어의 여러 징후들을 통해 반추해 볼 수가 있다. 가요 프로그램의 인기 분포도, 차별적인 TV 광고 전략, 드라마의 급격한 전개 속도와 감각적인 화면은 청소년들의 민감한 문화적 감수성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는다. 청소년을 대상화시키기면 소비의 노예로 전락할 뿐더러 소비 선택권 등 미래산업의 실종을 자초하게 된다. 청소년들의 자율성은 그만큼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한 사회의 권력분점은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그중 가장 선명한 것은 아무래도 ‘선거권’이다. 선거권의 확보는 정치적으로는 왕정과 민주정의 분기점이며, 사회적으로는 성(Zender)과 연령을 가르고 나누는 금기(taboo)를 얼마만큼 불식시키는가를 판가름하는 잣대다. 선거권이 만19세로 낮춰지기까지 걸린 세월은 자그마치 반세기다. 사실 19세 선거권은 정치권의 아전인수(我田引水)격 황금분할일 뿐 상식적인 수준과는 거리가 멀다. 19세의 의미는 단순히 대학생 연령을 겨우 포함시키는 수치에 불과하다. 그 의미를 제외하고는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만18세를 주장하는 동기(motive)는 명징하다. 18세는 초·중·고의 청소년을 대표하는 고등학교 3학년 연령대를 포괄한다. 청소년을 모두 선거연령에 포함시킬 수는 없지만 초·중·고 연령대별 청소년의 의견과 미래에 대한 선택을 부분적으로나마 수용할 수 있는 통로는 그들을 대표하는 연령대인 고등학교 3학년 시기를 선거에 참여하게 하는 방법이 가장 원칙적이고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의 시선과 선택을 통해 본 정치권력의 확보는 우리 민족의 미래상을 예측하는 중요한 요소다. 그들의 젊은 생각과 신선한 선택을 존중하고, 그 코드를 반영할 수 있는 사회는 건강하다. 선거권을 18세로 낮추는 문제는 저출산 노령화 시대를 극복하고 국가경쟁력을 확보하는 일이다. 단순히 여당과 야당의 표심을 가르는 용도로 치부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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