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정위원장, '노통' 만나다
‘사회적 대화’의 대명사격인 노사정위가 양대노총 모두 불참하면서 사실상 실질적 기능이 정지된 채로 운영된 지도 벌써 100일을 넘겼다.
지난 99년 2월 노사정위를 탈퇴한 민주노총은 올 초 세차례에 걸친 대의원대회가 연거푸 무산되면서 사회적 교섭 방침을 결정하지 못했다. 이어 3월18일 이수호 위원장이 “위원장 책임 아래 노사정을 포함한 정당 등과 대표자회의를 시작하겠다”고 결단을 내림에 따라 뭔가 새로운 기류가 형성되는 듯한 양상을 띠었지만 결실을 맺는 데는 실패했다. 4월 국회 환경노동위 주도로 진행된 비정규법안 협상이 ‘결렬’되면서 민주노총의 노사정위 복귀는커녕 노사정위 개편방안에 대한 노사정 간의 의견도 최종 조율되지 않는 등 더이상의 진전을 보지 못한 상태다.
그런 상황에서 고 김태환 충주지부장 사망사건 이후 ‘노동부장관 퇴진’을 내걸었던 한국노총마저 7월7일 노사정위를 탈퇴했고, 이달 들어서는 사회적 대화의지가 강했던 민주노총 이수호 집행부가 강승규 수석부위원장의 비리 혐의로 총사퇴해 노사정위 복원 전망을 더욱 어둡게 하고 있다.
지난 100여일, 노사정위도 이런 상황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노동계는 물론 노사관계 전문가들과 접촉하면서 대화 복원을 위한 다양한 방안을 모색했고, 지난 8월에는 성균관대 임종률 교수를 위원장으로 하는 ‘전문가그룹회의’를 꾸려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 대화가 필요한가에서부터 갈등의 원인, 운영의 효율성 담보를 위한 방안 등을 검토했다.
김금수 노사정위원장은 지난 20일, 전문가그룹회의 논의를 요약, 정리한 보고서를 들고 대통령을 만났다.
'파트너'(노동계)를 의심하는 대통령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면 이 보고서에 대해 대통령은 “이대로 추진하라”든가, “이 부분을 수정, 보완해 다시 보고하라”든가 하는 지시는 구체적으로 내리지 않았다. 대신 '파트너'인 노동계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부터 쏟아냈다.
이날 보고와 관련, 몇몇 핵심 관계자들은 대통령의 최근 심경을 이런 발언들에 빗대 전해줬다. “내가 정말 잘못했다면 사과할 뜻이 있다”, “노동계는 ILO 아태총회를 무산시키는 등 일을 그르치고 있다”, “(노동계에) 이대로 끌려갈 수는 없다”, “(노동계는) 정부를 협상에 활용할 뿐 실제로는 대화할 생각이 없는 거 아니냐”….
한마디로 “노동계를 못 믿겠고, 노동계 태도에 절망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렇기 때문에 현존 노사정위 개편방안에 대한 관심은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이를 두고 한 노사관계 전문가는 “예전엔 ‘노동’이 ‘정부’를 못 믿었는데, 이젠 ‘정부’가 (자신의 지지기반이기도 한) ‘노동’을 못 믿는 이상한 상황”이라고 비꼬았다.
사회통합 진정성 있나
그런데 또다른 관점에선 “그만큼 애정이 있다는 얘기를 노 대통령 특유의 화법으로 전달한 것일 뿐”이라며 “다양한 통로로 사회적 대화에 대한 진정성은 확인이 된다”고 분석한다.
이 전문가는 대통령의 화법은 사회적 대화 중단이 정부 책임보다는 노동계 내부 문제에서 기인한 측면이 더 크고, 노동계가 반전의 카드를 스스로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노동계 요구대로 ‘노동장관’이 아닌 ‘총리’까지 나섰음에도 상황변화가 없는 것에 대한 ‘아쉬움’의 발현이라고 본다. 이런 분석대로라면 지난 12일 대통령이 밝혔던 ‘국민대통합 연석회의’ 역시 대화 복원을 위한 ‘진정성’ 있는 제안인 셈이다.
“지금의 노사정위가 안 되니까 연석회의를 통해서라도 사회적 대화를 살리려고 하는 것이다. 대통령은 노동계를 여전히 의심하고 있지만, 총리에게 그 일을 맡겨 밀어주고 있다.” 또다른 노사관계 전문가의 말이다.
이와는 반대되는 분석도 있다. 이미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는 ‘실종’됐고, 정부는 ‘포기’하는 쪽으로 방향을 정리했다는 것이다. 한 전문가는 “정부가 지난해 9월 비정규법안을 내는 순간 사회통합이니 사회적 대화니 하는 말은 끝장났다고 봤다. 정부는 포기선언을 했을 뿐 아니라 사회적 대화를 방해하는 행위까지 서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아주 단적인 예로 지난 1월31일 이해찬 총리 주재 당정간담회를 거론했다. 그날 당정은 노동계의 강한 반발을 사고 있던 비정규법안 2월 임시국회 처리 방침을 재확인하는 한편 ‘로드맵’을 조속한 시일 안에 입법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런데 이날 회의 결과가 조간신문을 장식한 2월1일은 민주노총이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어 ‘사회적 교섭’ 안건을 본격 논의키로 한 날이었다. 이미 1월20일 정기대의원대회에서 정족수 미달로 이 안건이 다뤄지지 못했던 터라 내외부적인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았다.
이 관계자는 “당연 당정간담회 결과는 민주노총 대대에 부정적인 영향을 줬다. 그렇게까지 일정을 잡았어야 했나. 정말 (노사정위에 민주노총이) 들어올까봐 겁먹은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이어 “이런 방해공작에 대한 반성도 없이 어떻게 연석회의를 거론하는지 모르겠다. 얼마나 공허한가”라고 혀를 찼다.
연석회의 실험, 아직은 뜬 구름?
그런 가운데 지난 12일 노무현 대통령은 경제·사회적 의제를 다룰 사회적 협의의 틀로서 (가칭)‘국민대통합 연석회의’ 구성을 제안했다. 참여주체는 노사는 물론 시민단체, 종교계, 농민, 전문가, 정당 등을, 의제 역시 국가경쟁력 제고, 양극화 해소, 일자리 창출, 저출산·고령화 사회, 노사관계, 남북협력문제 등 경제·사회적 문제를 총망라 하겠다고 했다.
연석회의 제안이 ‘소모적 정치실험’, ‘단순 이벤트’라는 비난도 있지만, 빠르면 11월말께 꼴이 갖춰지고 실제 가동이 된다면 기능정지 상태인 노사정위 활성화에도 기여를 할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어차피 각계각층에서 다수의 사람이 참여할 연석회의에서 구체적인 합의사항을 도출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선언’적 의미의 합의를 이끌어내면 세부 정책방향을 논의하는 자리는 노사정위가 될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서다.
이와 관련 한 전문가는 “어떤 형태로라도 연석회의가 가동되면 노사정위 활성화라는 성과로 귀결될 것”이라며 “정부가 사회적 대화 정책을 완전 포기하지 않은 상황에서 노사정위를 먼저 폐지하게 되면 때가 됐을 때 죽은 놈을 살려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아직은 부정적 견해가 적지 않다. 노사관계 한 전문가는 “연석회의냐, 노사정위냐가 중요치 않다. 누가 참여하든 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정부인데, 노정갈등이 현재 수준까지 악화된 것에 대한 자기 책임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에서 6자회의든 30자회의든 이벤트 이상의 효과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계에서도 연석회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보면서도 조심스런 입장이다. 한국노총은 ‘환영’한다고 하면서도 “정부정책의 들러리 세우기라거나 다른 정략적 이해관계와 결부돼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해 정부의 사전 조치가 필요하다”며 노정관계 회복을 위한 가시적 조치와 노동정책 기조 변화를 요구했다.
민주노총은 “양극화 해소 등을 위한 연석회의 기조에는 긍정적이지만 제안 내용이 구체적이지 않아 가늠하기 힘들다”면서 “연석회의를 통해 양극화 해소를 위한 예산배정과 법제도 개선 등 실질적인 조치가 가능한지 검토해 본 뒤에 명확한 입장을 낼 것”이라고 밝혔다.
경영계 역시 그렇다. 경총은 “노사정위에 물을 타서 되는 것 없이 뜬구름만 잡게 만들 것 같다”는 회의적 시각도 전하면서 “새로운 논의 틀로 혼란을 야기하기보다는 기존의 대화채널(노사정위)을 복원해 실질적인 논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급선무”라고 밝히기도 했다.
공은 넘어갔다, 누구에게?
논의는 무성하다. 그러나 ‘실천’은 어디에도 없다. 대화를 하려면 당사자가 ‘만나’야 하는데, 대통령은 노동계에 대한 불만만 토로하면서 될지 안 될지 모를 그림을 그려놓고 “다 오라”고 외치고 있고, 노동계는 노동계대로 그 그림이 뭔지 살피고 전제조건을 얘기하면서 갈지 말지를 재고 있다.
이를 두고 한쪽에서는 공은 노동계에 넘어갔다고 하고, 또 한쪽에서는 정부가 더욱 전향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한다.
어떤 노사관계 전문가는 “노동계가 연석회의에 참여한다고 해서 불리한 것은 없는 만큼 이를 잘 활용해 노사정위를 복원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는 “만약 연석회의도 실패한다면 더이상의 방법은 없고, 각종 노동정책 입안·집행과정에서 형평성의 문제만 없다고 판단되면 정부 방식대로 밀고 나가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네덜란드가 그랬다. 바세나르 협약을 체결하기 1년 전에 네덜란드 정부는 법으로 임금을 동결했고, 그 다음해에야 협약이 체결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길이 없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에 선택의 옵션이 던져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노동계 한 관계자는 “양대노총 모두 노사정위에 불참하고 있는 것은 현존 노사정위 기구에 대한 불만도 있지만 그보다는 정부 정책기조에 대한 문제제기”라며 “한국노총마저 탈퇴한 지 3달이나 지났지만 정부 내 기류 변화는 어디에서도 감지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또다른 노사관계 전문가 역시 “자꾸 생뚱맞은 그림만 내놓을 것이 아니라 ‘왜 지금은 안 되는지’에 대한 성찰이 우선돼야 한다”며 노사정위 파행운영에 대한 정부 책임론을 제기했다.
이렇게 입장이 엇갈리고 있는 가운데 한편에서는 한국노총만이라도 노사정위에 참여해 ‘죽어가는’ 사회적 대화를 살려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정부 노동정책에 대한 항의표시로 노사정위, 노동위원회 탈퇴를 했지만 10월 ILO 아태총회도 무산시키는 등의 소기의 성과를 거둔 만큼 이젠 명분보다는 실리로 접근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판단에서다. 민주노총은 비대위 체제에서 당분간 사회적 교섭방침을 결정하기 어려운 만큼 한국노총이 먼저 결단을 하고 참여할 수 있는 열린공간을 활용, 노동계에도 득이 되는 합의를 하고 사회적 대화의 불씨도 계속 지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노동부장관 퇴진’이라는 요구가 유효한 상황에서 선뜻 한국노총이 그런 결정을 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설사 결정을 한다고 해도 민주노총은 여전히 불참상태일 것이기 때문에 참여정부 차원에서 노사정위에 다시 힘을 실어줄 지도 미지수다.
허나 어쩌랴, 길은 가야 한다. 누가 먼저 길 위에 설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