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콘 노동자들의 경고성 파업을 하루 앞둔 20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신길1동에 위치한 건설운송노조 사무실. 상근자들이 막바지 파업을 점검하며 소속 단위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점퍼 차림의 박대규(45) 건설운송노조 위원장<사진>도 연신 휴대폰을 잡고 통화를 하느라 분주하다.

“사람이 죽어야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곤 하지만 (건설운송 노동자들) 지금 보통 힘든 상황이 아닙니다.” 화물연대는 2003년 투쟁을 통해 리터당 210원의 유류보조금을 얻게 되었고, 덤프연대도 적지만 정부는 협상을 통해 수습하려고 한다. 그런데 레미콘노조는 건교부 등 정부부처에서 만나려고도 하지 않는다. “레미콘 문제만으로는 대화가 안돼요. 어느 관계부처도 만나려고도 귀담아 들으려고도 하질 않아요. 힘이 있어야 대화라도 되는 거죠.”

건설운송노조 산하 덤프연대 파업을 지지 엄호하기 위해서도. 2001년 레미콘 파업투쟁 이후 침체된 조직의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서도. “비조합사에서도 연락이 많이 온다. 지금 이후로 레미콘 동지들은 총파업의 각오를 다져야 한다. 한발 물러서는 순간 투쟁은 결국 헛수고로 돌아가고야 말 것이다.” 21일 전국건설운송노조 파업결의대회에서도 그는 한결같이 투쟁을 독려했다.

평범한 건설운송 노동자에서 노조활동가로

그는 평범한 현장 노동자였다. 경기도 파주의 우신레미콘에서 십수년 레미콘 운전을 하며 살아 왔다. 대기시간이 많은 업무의 특성상 박 위원장은 차 안에 앉아 틈틈이 책을 읽었다. 닥치는 대로 다양한 장르를 섭렵했다는 박 위원장. 당시에는 ‘전태일 평전’이나 철학책 등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각종 토론회 등에서 선보이는 논리정연함과 정곡을 찌르는 반박 등은 이때의 많은 독서량이 밑받침 되었으리라.

그러나 박 위원장은 “현장에서 먹고 살기 바쁜데 책 읽을 여가는 별로 없었다”며 “토론회에서도 현장에서 우러나는 소리를 한 것 밖에 없다”고 손사래를 친다.

레미콘 차량을 회사로부터 불하받기 전까지 그는 정규직이었다. 94년 7월, 차를 사지 않으면 제3자에게 매각되고 당장 일자리가 날아갈 판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산 차는 그에게 ‘지입차주’라는 허울 좋은 사장님 명함을 던져줬고, 경기의 하락과 함께 애물단지가 되어갔다.

“생계가 위협받다 보니 도저히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2000년 초 그는 상조회를 만들어 회사와 운반비 협상을 시도했다. 회사의 어려운 사정을 감안해 6개월 동안은 운반비 동결에 동의해줬다. 그러나 정상화 궤도에 오른 뒤에도 회사는 차일피일 협상을 미루기만 했다. 그해 8월 상조회는 일주일 동안 차를 세웠다. 대가는 해고였다. “너만 없으면 공장가동 한다는데, 다 굶어야겠냐.” 박 위원장은 할 수 없이 책임을 지고 혼자 잘렸다.

4개월 동안 복직투쟁을 전개했고, 그 기간 건설운송노조를 만들었다. 건설운송노동자들의 모임인 믹서트럭협회를 노조로 전환한 것이다. 9월에 설립된 노조는 연말에 2천여명의 조합원으로 늘어났다.

시련은 곧바로 또 닥쳤다. 2001년 초 유진레미콘 400여명의 노동자들이 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전원 해고됐다. “그대로 바라만 볼 수는 없었죠. 억눌려 있던 분노가 일시에 터져 나왔죠.” 4월부터 연말까지 7개월간 여의도에 레미콘 차량 수천대가 집결했다. 특수고용 노동자 문제의 여론을 환기시켰지만 노동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생계난과 해고, 수배였다. 2천800여 조합원은 350여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한동안, 아니 지금까지 후유증은 오래 지속되고 있다.

“패배한 싸움만은 아니지만 총파업 준비가 제대로 안된 상황에서, 당시 높은 요구안을 가지고 무리한 싸움을 벌인 측면이 있습니다.” 7개월여 투쟁을 통해 사업장마다 지난 7년여의 임금 수준을 상회하는 운송비 인상 등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상처는 깊었다.

건송운송노조는 2001년 파업 이후 후유증에서 아직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2001년 2천800여명에 이르는 조합원이 350명까지 줄기도 했다. 레미콘 현장의 현재의 조직력도 이를 잘 보여준다. 레미콘 노동자 2만3천여명 가운데 조합원은 현재 2천여명이 채 안된다. 10%도 미치지 못하는 수치다. 손배, 가압류 금액도 58억7천만원에 이른다. 박 위원장의 친정이라 할 수 있는 경기북부지부의 경우도 11개사 440명의 조합원이 현재 4개사 100여명으로 줄었다.

조직을 확대, 강화하는 것이 가장 큰 급선무인 것이다. “현장은 비조합원과 도급업체로 분열되고 있고, 노동조건은 원점으로 회귀하고 있습니다. 투쟁이 없기 때문이죠.” 덤프연대의 힘을 빌어야만 건교부장관 얼굴이라도 한번 볼 수 있는 처지. 박 위원장은 조직 확대와 함께 비조합사를 추동해 투쟁의 대오를 넓힐 각오다.

한국노총에 소속된 레미콘노조와도 연대투쟁을 이끌어내기 위해 박 위원장은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11월 국회가 열리는 시점에 특수고용 비정규직의 ‘노동3권’ 문제를 쟁점화시킬 계획입니다. 덤프연대가 안되더라도 레미콘 노동자들이 앞장서야죠.” 이미 10월말과 11월초 주말집회신고도 미리 해놓았다. 조직 상황이 어렵다고 투쟁을 멈출 수는 없는 일. 투쟁을 결의하는 박 위원장의 눈빛은 이글거렸다.

“정파를 떠나 대의에 따라 움직여야”

“비정규 당사자들이 아우성쳐야 움직입니다. 그것은 정부든 노동계든 마찬가지입니다.” 정부는 그렇다 치고, 노동계는 왜일까? “비정규직 문제 해결의 주체는 비정규직입니다. 그런데 양노총 간부들 중에 비정규 출신이 없어요. 비정규직의 현실을 알고 있는 지, 의심스러울 때가 한두번이 아니에요.”

지난해 열린우리당사와 타워크레인 점거농성을 하면서도, 아니 일상투쟁에서도 민주노총과 정규직노조에 대한 아쉬움과 서운함은 크기만 하다. “비정규 주체들이 협상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줘야 합니다. 정규직노조가 사내하청 임금협상을 대신해 주는 것처럼 잘못된 것은 없어요. 정규직 시급 100원 올릴 때 비정규직 80원 올리고, 그러면서 ‘공동투쟁’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죠.”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의 사퇴와 전재환 비대위원장 구성 소식은 박 위원장의 입술을 바짝바짝 타들어가게 했다. 비대위가 꾸려지더라도 당장의 건설운송 관련 대정부 교섭력이 현저히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현실적인 우려였다. 또 안정적이지 못한 구조는 하반기 레미콘, 덤프 등 건설운송 노동자들의 투쟁에 득이 될 게 없기 때문이다. “지도부의 사퇴와 새로운 지도부의 구성 등 선거체계로의 돌입은 하반기 싸움을 이미 물 건너가게 하는 것입니다.”

민주노총의 요즘 상황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강도가 더욱 높아졌다. “밥그릇 싸움 아니냐. 누구 한 사람 비정규 노동자, 건설운송 노동자 문제 생각하기나 하나. 고민도 대안도 없으면서 말이야. 맨날 입으로만 투쟁이지.” 거침없이 튀어 나오는 욕과 직설적인 말들. 건설노동자 출신답게(?) 그는 자기표현에 솔직하다. 때론 지나치다가 할 수 있는 말도 박대규 위원장이기에 비정규운동가들 사이에선 오해 없이 듣고 이해한다.

내친 김에 박 위원장은 이야기를 더 이어 나갔다. “관변단체들조차 평상 시 이권과 자리싸움을 하다가도 위기상황에서는 똘똘 뭉쳐요. 그런데 민주노총은 내분과 감정 싸움으로 치닫고 있어요. 지금의 민주노총 판은 자본과 정권의 전술에 놀아나고 있는 겁니다. 아마 그들은 쾌재를 부르며 이 사태를 즐기면서 노동계를 언제든지 통제가능한 집단으로 볼 것 아니겠어요?”

늦깎이 노조활동가 박 위원장은 활동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을 ‘정파’ 문제라고 했다. “계파간에 나뉘어 싸울 때, 내 뜻과 관계없이 네편, 내편하며 사람을 평가할 때 다 때려치우고 집에 가고 싶은 심정이다.” 지난해 국회 앞 타워크레인 점거 당시에도 ‘계속해야 한다, 내려오라’며 정파간의 입장이 대립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파를 떠나 대의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 있으면 찾아가 절이라도 하겠어요.”

“싸움이 장난이냐. 죽기 살기로 하는 거지”

정규직노조, 민주노총 활동가들이 비정규 문제에 소홀하다는 비판 속에서도 박 위원장이 칭찬을 아끼지 않는 정규직 운동가들은 많다. 그 가운데 첫 손가락에 꼽히는 이가 이남신 전 민주노총 서울본부 부위원장이다. 현재 민주노총서울본부 비정규연대회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이남신 국장은 이랜드 정규직 출신이면서도 비정규운동의 일선에서 투쟁해 왔다. 박 위원장은 비정규직 운동에 애정을 가지고, 조언을 아끼지 않는 이남신 국장을 누구보다 좋아한다고 애정공세(?)를 펼쳤다.

박 위원장은 스스로를 ‘노동운동가’가 아닌 ‘노조활동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내가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활동이고, 현장의 제반 여건이 좋아지면 그것이 최고입니다.” 거창한 이념과 노선을 들먹이는 것을 그는 좋아하지 않는다.

“오직 욕심이 있다면 건설현장을 일시에 세워보고, 운수노동자들이 한날한시에 확 들이받아(총파업) 보는 겁니다.” 억눌리고 짓밟혀온 노동자가 이 세상의 주인임을 당당히 선포하는 그날. 자본과 정권에 맞서 한번 제대로 싸우기를 희망하는 통 큰 노동자. 박대규 위원장의 인터뷰 마무리 발언이다. “싸움이 장난이냐. 죽기 살기로 하는 거지.”

박대규 위원장은
박대규 위원장은 민주노총 건설산업연맹 건설운송노조 위원장으로서 민주노총 특수고용대책회의 의장, 전국비정규직노조대표자연대회의 부의장 등을 맡고 있다. 비정규 운동가의 대표적 인물로 꼽히는 박 위원장은 화통한 성격으로 현장노동자는 물론 운동가들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다.


“언제든지 현장으로 돌아갈 준비와 자세가 되어 있다.” 그는 현장을 사랑하고, 현재의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높은(?) 자리가 어색하게 다가올 지도 모른다. ‘고공농성, 당의장실 점거, 삭발·단식’ 비정규 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면 어떤 투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말보다 실천이 앞서는 사람. 그는 거창한 ‘노동해방’이란 단어보다 800만 비정규직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그날을 향해 달려가는 투사이다.


전국의 파업현장을 돌고, 조직활동을 하는 데 필수적인 차량. 박 위원장은 10년 된 애마 ‘티코’를 몰고 다니다가 최근 중고 ‘세피아’로 바꿨다. 이미 10만 킬로미터를 넘긴 차량이다. 운전을 누가 하느냐는 질문에 “내가 운전기사 출신인데”라며 생뚱맞다는 표정을 짓는다.


대다수 비정규노조가 재정난에 허덕이다 보니 비정규 활동가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다. 박 위원장도 우신레미콘에 소속은 되어있지만 전임비가 별도로 나오는 것은 아니다. “노조도 인정하지 않는 판에 회사에서 전임이라고 월급 주겠어요.” 박 위원장은 건설운송노조에서 받는 상근비의 일부를 생활비로 집에 보낼 뿐이다. 얼마를 보내는지는 비밀(?).


집 살림살이는 어떨까? “집에서 알아서 하는 거죠. 뭐.” 빠듯한 집안 살림의 책임은 아내의 몫이다. 쌀과 반찬 걱정하지 않을 정도의 농사를 아내가 짓고 있다. 시골이라 생활비가 많이 들어가지는 않는다지만 아이들 교육 문제는 늘 걱정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아이들 학원 보내는 일은 일찌감치 접을 수밖에 없다.


박 위원장은 집에 자주 들르지 못한다. 이달에는 파주의 집에 두번 찾아갔다고 했다. “아빠! 밥도 굶으면서 그게 뭐야? 하지마!” 3남매 가운데 둘째인 중학생 딸 이야기를 하며 무뚝뚝한 박 위원장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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