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호 집행부가 퇴진했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집행부 총사퇴로 이제 민주노총 혁신에 대한 진지한 논의의 장이 열릴 수 있게 되었다. 이번에도 민주노총이 스스로를 총체적으로 혁신하지 못한다면 노동운동은 지금보다도 훨씬 후퇴할 것이다. 그렇다면 총체적 혁신의 핵심 내용은 무엇인가? 필자는 두 가지를 들고 싶다. 하나는 제도의 혁신이며, 다른 하나는 기풍의 혁신이다.

제도혁신, 간접민주주의에 메스 대라!
"이로써 참여 확대하는 계기 만들어야"


제도혁신의 초점은 노조관료들의 잔치로 되어버린 노동운동에 대한 노동자 대중의 참여와 통제를 확대하는 것이다. 연맹·총연맹 사업에 있어서 조합원 총투표제를 도입하고 임원선거에 있어서 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꾸는 것이다. 기풍의 혁신은 사상적으로 노동해방정신을 명확히 하는 것이며 실천적으로는 평조합원 노동대중 스스로 떨쳐 일어나서 자본과 권력, 부패한 노조관료들과 투쟁하는 것이다.

지금의 연맹, 총연맹의 주요의사 결정과 임원선거는 대의원대회에 의한 간접민주주의로 결정된다. 간접민주주의도 제대로 작동되면 평조합원 대중을 소외시키지 않는 구조로 갈 수 있다. 즉 현장에서 파견대의원이 제대로 선출되고, 파견된 대의원들이 사사로운 이해에 얽매이지 않고, 자본과 권력에 맞서 노동운동의 자주성을 수호하기 위해서, 현장 평조합원들의 요구를 반영하기 위해서 당당하게 자신의 투표권을 행사한다면 무엇이 문제겠는가?

그러나 1997년 IMF 이후의 우리 연맹과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는 엇나가도 한참 엇나갔다. 절대다수의 대의원들은 중요한 선거와 의사결정에 있어서 현장 조합원의 요구에 부응하여 자본과 권력에 맞서기보다는 자기 정파의 우두머리들이 요구하는 대로 소중한 투표권을 행사하였다. 박정희 유신독재시대에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박정희에 대한 절대적 충성으로 똘똘뭉친 만큼이나 자기 정파의 우두머리에 대한 존경심(?)으로 똘똘뭉친 대의원들은 이제 노동운동의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1998년 2월 배석범 직무대행의 정리해고 노사정합의를 전후한 대의원대회, 2002년 4월 발전노조 파업을 결의한 대의원대회 등, 당시만 해도 대의원들이 어렵게 투쟁을 결의했지만 지도부가 이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상황까지 일어나면서 대의원대회는 더욱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말았다.

특히 IMF 이후 자본과 권력이 대기업 정규직 200만명을 회유하고 중소, 영세, 비정규직 노동자 1,100만명을 무차별 탄압하는 정세 속에서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 중심의 연맹·총연맹 대의원대회는 심각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기풍혁신, '패거리'를 전복하라!
"이로써 냉소주의 극복 계기 만들어야"


조합원 총투표·직선제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그렇지만 아래로부터의 혁신과 투쟁에 의해서 쟁취된 조합원 총투표와 임원선거에서의 직선제는 민주노총 운동에 있어서 많은 가능성을 열어젖힐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변화는 평조합원 대중의 무관심과 냉소를 깨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와 같은 단위노조, 연맹, 총연맹 구조 하에서 평조합원 노동대중들이 연맹·총연맹 사업과 선거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미 부패·타락하여 관료화된 노동운동 상층부가 무엇 때문에 평조합원 대중에게 다가가겠는가?

그 결과 정세는 빈곤, 양극화, 복지, 노동유연화 등 계급적이고 사회운동적인 의제에 대한 대응이 점점 더 요구되는 반면, 노조는 오히려 더 직업적, 기업 내부적인 의제로 퇴행하고 있다. 민주노총 임원 직선제는 전 계급적, 사회적 의제에 대한 노동자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하나의 변화는 이미 수명을 다한 패거리 정파구도가 급격히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모임이나 조직을 만드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강령과 전술적 입장을 공공연히 밝히고 대중조직에서 조합원 대중을 상대로 선의의 경쟁을 하는 것은 노동운동에 있어서 필요하고도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패거리 정파들은 '조폭' 수준을 넘어서고 있지 못하다. 그리고 대의원 간선구도는 패거리 정파구성원들을 더욱 똘똘뭉치게 하고 있다. 조합원 총투표와 임원직선제가 아래로부터의 혁신과 투쟁에 의해서 쟁취된다면 현재의 패거리 정파구도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

1997년 IMF 이후 신자유주의구조조정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 노동운동의 지도력은 너무도 무기력했다. 몰아치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하에서 그 흐름에 정면으로 맞서는 운동이 아니라 그 흐름 내에서 생존하기 위한 투쟁으로 후퇴했다.

그 과정은 단순한 일시적 동요만이 아니었다. 대기업, 연맹·총연맹 지도부 가릴 것 없이 노골적으로 대중을 배신하는 행위가 나타났으며 비리도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배신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게 바로 단위노조, 연맹, 총연맹의 '다단계' 운영체계였다. 이 체계는 노동관료의 노동운동 지배의 강화와 대중의 철저한 무권리와 소외를 낳았다. 그 결과는 운동의 지향목표를 노동해방, 사회변혁이 아닌 단위 노조에 갇힌 경제주의적 요구로 퇴행시키는 것이었으며 이것이 민주노총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주소이다.

위로부터 혁신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전복을!

소외와 무권리로 인한 평조합원 대중들의 무관심과 냉소주의는 심각하다. 자신이 찬반투표라도 할 수 있는 단위노조의 임단협에 대해서는 그나마 조합원의 참여가 이루어지지만, 그외의 주요 사안에 대한 대중의 참여 열기는 뚝 떨어진 지 오래다.

그런데 이에 대한 노동관료들의 대책은 대중의 무관심을 재생산하는 다단계적 관료통제를 혁파하는 대신, 대중의 상태를 핑계대며 계속 임단투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는 정치·사회적 의제에 대해서는 대중을 의식화하고 조직화할 엄두초자 내지 못한 채 노동관료들만의 운동으로 퇴행해버렸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대중운동으로서의 노동조합운동의 진취적 기풍과 열정은 사라지고 무관심과 냉소 속에 주판알 튕기는 실리주의 노동운동이 대세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 무관심과 냉소의 기풍을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는가? 현 제도 하에 대의원대회를 소집해서 새로운 지도부를 선출하면 평조합원의 무관심과 냉소주의가 변할 것인가? 더 나아가 만일에 하나 (현실적으로는 패거리 정파구조 때문에 불가능하지만)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규약이 개정되어 주요 사안에 대한 조합원 총투표와 임원선거 직선제가 시행되면 평조합원 동지들이 주체적으로 일어서서 변혁적 열정으로 운동에 나설 수 있는가?

물론 그렇지 않을 것이다. 선거제도만 상층야합으로, 시혜적으로 개선되어서는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래로부터 솟구쳐 올라오는 평조합원 운동과 곳곳에서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투쟁들이 결합될 때 오직 그곳에서만이 운동의 새로운 희망은 떠오를 것이다. 그래서 지금 민주노총에게 필요한 것은 관료적 혁신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혁신인 것이다.

"…… 호민(豪民)은 참으로 무서운 존재이다. 호민은 나라의 귀추를 엿보고 있다가 적절한 기회를 타서는 분연히 주먹을 쥐고 밭이랑이나 논두렁에 올라서서 한번 크게 소리 지른다. 그러면 원민(寃民)들은 소리만 듣고도 모여든다. 그들과 모의 한번 하지 않았어도 그들의 호응을 받는 것이다. 이때 항민(?民)들도 그들의 생활이 조금이라도 나아질까 하여 호민과 원민을 따라 호미와 쇠스랑을 들고 따라온다. 이로서 무도한 자들의 목을 베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
- 허균, 「호민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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