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이것 또는 저것? 이 길 또는 저 길? 고민될 때가 많은 법. 며칠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기도 한다. 하지만 그나마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고마울 때도 있다. 도대체 뭘 해야 할지 막막할 때가 그렇다.

장정익 지부장(43)<사진>이 그랬다. 어느날 환경부 6급 이하 211명 공무원들의 대표자가 됐는데 막상 본인은 무얼 해야 할지 몰랐다. 눈앞이 캄캄했다. 어차피 남들이 맡길 꺼리는 자리니 대충대충 임기만 채워도 욕이야 먹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나나 조직에나 별반 도움이 되지 않음을 잘 안다.

귀를 열기로 했다. 뭘 해야 할지 스스로 모른다면 다른 이에게 물어보기라도 해야지 싶었다. 그런데 수확은 예상을 뒤엎는 것이었다. 노조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의견을 모집하니 꽤 내실 있는 제안들이 들어왔다. 이를 기반으로 장 지부장은 임원연찬회, 조합원연찬회, 조합원과 대화의 장 행사를 연달아 가졌다. 노조사무실에 도시락을 시켜놓고 각 국·과별로 조합원들의 얘기를 들었다. 45일이 지나니 전체 직원들을 거의 다 만날 수 있었다. 같이 환경부에서 근무하고 있는 아내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부장 활동을 하면서 소중한 사실을 하나 배웠습니다. 그것은 바로 조합원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제가 길을 잃었을 때 조합원들은 노조의 나아갈 길을 아주 상세하고 충실하게 제시해 주었습니다.”

이를 통해 장 지부장은 ‘할 수 있다’는 힘과 용기를 얻었다. 노동조합의 모든 힘은 조합원으로부터 나온다는 믿음도 갖게 됐다. 덕분에 초기의 막막함도 걷혔고 요즘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각종 일을 벌인다. 요즘 추진 중인 장학회 설립도 그중 하나. 재직 중 질병, 교통사고 등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직원의 자녀들을 위한 것으로 이 또한 한 조합원의 제안이 동기가 됐다.

장 지부장은 현재 정부의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추진위원회 내의 공무원복지대책 태스크포스팀의 일원이기도 하다. 행정도시에 대한 논란이 여전하지만 장차 이 사업이 수도권 주민에 비해 경제, 문화적으로 열악한 지방주민의 삶을 향상시킬 것으로 믿기 때문에 노조 차원에서 결합하고 있다. 공무원노조가 공무원들의 권익보호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 사회 곳곳의 여러 차별을 없애는 데 나름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도 계기가 됐다.

82학번인 장 지부장은 어린 시절 가정형편이 어려웠다. 고등학교 때부터 가정교사와 신문배달을 해야 했다. 이런 배경은 대학 때 그를 노동야학의 길로 인도했다. 공장에서 일을 마치고 자리한 노동자들과 함께 고선지, 묘청 등 역사 속 인물을 배우며 암울한 시절 희망을 함께 얘기했다.

하지만 힘든 형편 때문에 야학을 오래 지속하진 못했다. 그분들과 더 오래 함께 하지 못한 것은 지금까지도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다. 지금 노조활동을 하는 것도 어쩌면 그때의 안타까운 마음의 연장선상인지도 모른다. 늦게나마 성실한 노동조합 활동을 통해 그때의 미안함을 조금이라도 갚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장 지부장의 활동 덕분일까. 정부 부처 가운데 나이가 어린 환경부지만 노조활동만큼은 선구자에 가깝다. 공정위, 농림부에 이어 과천에서 세번째로 직장협의회에서 노조로 전환했다. 지금 공무원노조 중앙행정기관본부장은 김기덕 전 환경부 지부장이 맡고 있고 장 지부장은 사무처장을 맡고 있다. 자리가 자리이다 보니 아직 직협에 머물러 있는 다른 기관 직원들과 자주 접촉할 기회를 갖는다.

장 지부장은 남은 임기 동안 지속적으로 다른 직협들을 노조로 전환시키는데 나름의 역할을 하겠다 마음먹고 있었다. 이런 마음을 담아 장 지부장은 청계천의 전태일 거리·다리 조성을 위한 동판블록 제작사업에 지부 차원으로 참여했다. 문구는 전태일 열사가 어머니 이소선씨에게 남긴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꼭 이루어 주십시오’에서 따와 ‘전태일, 당신이 못다 이룬 일 공무원노조가 해내겠습니다’라고 정했다.

지부장 선거 입후보 연설에서 “노조 활동에 생명이 깃들어 있음을 확신한다”고 말했다는 장정익 지부장. 그는 그렇게 자신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공무원노조라는 붓으로 ‘차별없는 세상’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