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살리자는 운동이건만 운동 때문에 ‘망가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과로에 스트레스에, 그리고 조직사업의 ‘필수’라고 여겨지는 술까지. 때문에 몇몇 조직에서는 장기근속자를 대상으로 안식휴가제를 운영하고 있다. 지난 3월부터 8월까지 6개월 동안 휴가를 보낸 공공연맹 이상훈 미조직비정규사업국장이 안식휴가 일기를 <매일노동뉴스(레이버투데이)>에 보내왔다. 매주 화요일, 세 차례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주>



단식과 생채식, 그리고 걷기운동을 통해 몸속에 있던 온갖 찌꺼기들이 서서히 빠져나가면서 나는 머릿속에 있는 잡념들도 지워버리고 싶은 욕심에 우리 강산 이 곳 저 곳을 걸어 다녔다. 지난 봄, 평소에 시간 없다는 핑계로 지도로만 오르내리던 지리산을 다녀왔다. 사실 안식휴가 중에 지리산에 꼭 다녀오고 싶었던 이유는 지난 부산여행 때 고속철도 잡지에서 우연히 알게 된 청학동 ‘무아정(無我亭)’에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리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리산 남쪽 청학동에 가면 누구나 주인이 되는 주인 없는 집이 있다. 하룻밤은 물론 닷새까지 먹고 자는 것이 공짜로 제공된다고 한다. 잠자리와 먹거리를 여럿이 두루두루 이용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한 것이란다. 청학동에서 ‘용아저씨’로 통하는 분이 이 집 주인이지만 집안 구석구석 어디에도 주인이 남겨 놓는 흔적은 없다.

약력
1969년 출생
1997년 전국민주철도지하철노조연맹 조직부장
1999년 공공연맹 조직부장
2004년 공공연맹 미조직비정규실장
현재 공공연맹 미조직비정규사업국장
고실고실한 잡곡밥 지어주고, 깨끗한 이부자리 챙겨주고, 잘 말린 차 내어주고, 그것도 모자라 소박한 안주에 술까지 차려주니 정말 손님이 주인 대접 받는 꼴이다. 이 모든 것이 정말 공짜다. 요즘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을까. 하지만 이 집은 정말 공짜다. 지리산 청학동 박단골 언저리에 자리 잡은, 그야말로 모두가 주인이면서 누구도 ‘주인이 아닌 집’이 바로 ‘무아정(無我亭)’이다.

하동읍에서 군내버스로 한 시간은 족히 달려 도착한 청학동 삼성궁 입구 삼거리.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콸콸콸 소리 내어 우는 계곡물을 따라 비탈길을 오르니, 잡지에서 본 모습 그대로 한옥 두 채가 자리 잡고 있다. 너른 자갈밭 마당에 묵은 김치 같은 한옥 건물 두 채엔 여섯 개의 방이 있다. 용아저씨 말로는 이리저리 낑겨 누우면 30~40명까지 함께 하룻밤을 보낼 수 있다고 한다. 다행인지 불행이지 내가 무아정을 찾은 날은 열명 남짓한 길벗들이 함께 하고 있었다.


영락없이 객이 주인이 되다

검게 손때 묻은 마루에 걸터앉으니 밤새 빗줄기를 뿌리던 비구름은 비껴가고 겹겹으로 늘어선 지리산 자락 골골들이 한걸음 다가서 있다. 그저 지리산이 좋다는 짧은 머리의 풍채 좋은 50대 용아저씨는 고장 난 진공청소기를 고쳐야 한다며 읍내로 서둘러 나간다. 물론 냉장고에 있는 찬거리 챙겨 점심 먹으라는 말도 잊지 않고 말이다. 오자마자 영락없이 객이 주인이 되고 말았다.

먼저 온 길벗이 챙겨주는 점심을 받아먹고 이방 저방 둘러보았다. 가지런히 그리고 깨끗이 정돈된 살림살이들이 산적 같은 50대 아저씨의 손길이라 믿기질 않는다. 줄맞춰 개놓은 수건과 황토와 감물로 물들인 이부자리는 신혼살림집 원앙금침 못지않다.

며칠 먼저 와 묵고 있던 길벗이 귀띔해 준다. 더 놀라운 것은 방 한쪽에 놓여진 발재봉틀로 그것들을 모두 용아저씨가 직접 만들었다고 말이다.

뒤로 돌아 부엌으로 가 보았다. 여러 길벗들이 함께 사용했을 숟가락과 밥그릇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그렇지만 어디하나 먼지 같은 건 보이지도 않는다. 냉장고엔 먹음직한 산나물과 장아찌가 칸칸이 들어 있고, 쌀독에 흰쌀과 잡곡이 가득하다.

지리산 자락에 어둠이 내리자 용아저씨는 몇 분의 손님들과 함께 돌아왔다. 전부터 인연이 있는 듯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저녁밥이 다됐다는 용아저씨 소리에 길벗들은 통나무로 만든 밥상에 빙 둘러앉았다. 칼칼하고 구수한 된장찌개에 산나물들로 그득한 밥상이 한 눈에 들어온다. 나는 빈손으로 왔다는 미안한 마음에 아랫마을에서 사온 신선주를 슬며시 내놓았다. 한 두 잔씩 돌아가며 주고받는 사이 술병은 바닥이 났다. 이래저래 살아온 이야기를 안주로 나누며 술기운이 오르자, 무아정 주인 용아저씨가 산에서 직접 딴 열매와 약초로 담근 술을 내놓는다.

나는 정말 궁금했다. 왜 이런 곳에 혼자 사시느냐, 정말 돈을 받지 않고 잠자리와 먹거리를 내주시느냐, 그럼 뭘로 먹고 사시느냐 등등. 속세에 젖은 보통사람들의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아무 말 없이 빙그레 웃으시던 용아저씨는 무아정에 이런 저런 인연 따라 왔거든 무거운 마음의 짐일랑 내려놓고 가라고만 하신다. 무거운 마음의 짐이라…. 용아저씨가 바라는 것은 단 한가지란다. 그저 좋은 마음들을 듬뿍 담아 가지고 각자 사는 데로 돌아가 그 마음을 나누면서 살라고 하신다. 주는 대로 받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남을 귀하게 여겨야 자기도 남들한테 귀하게 대접받는다는 뜻이라 여겨진다.

지리산 기슭의 맑은 공기는 간밤의 술자리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제법 일찍 일어났건만 용 아저씨는 새벽부터 이방 저방을 쓸고 닦고 계신다. 그리곤 아침밥 챙겨놨느니 어서와 먹으라고 한다.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용아저씨는 사람이 무아정에 들어서면 하던 일을 멈추고 잠자리와 먹거리를 챙긴다고 한다. 일하는 모습을 보면 찾아온 이들이 불편해할까 그런다고 한다. 찾아오는 손님 덕분에 일손을 놓고 쉴 수 있는 생각에 오히려 손님이 반갑다고까지 한다. 산줄기 따라 물줄기 따라 맺은 인연으로 알고 찾아온 이들을 정성 다해 모시는 일이 용아저씨에게는 기쁨이자 사는 이유인가 보다. 한평생을 살면서 남에게 뭔가 해줄 수 있고 베풀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커다란 행복이라는 것을 용아저씨는 지리산 자락에서 행하고 있다.

바라는 건 한 가지, 마음의 짐일랑 내려놓고…

용아저씨는 베트남전에서 총탄까지 맞으며 싸웠던 상이용사라고 했다. 젊어 금융기관에서 일한 적도 있었다고 했다. 나이 마흔을 넘기면서 많은 것을 가지려는 욕망이 부질없어 보였다고 했다. 세상은 생각보다 많은 것이 필요 없다는 확신이 섰다고 했다. 무엇이 제대로 살아가는 삶인가 고민했었고 제대로 살아보려는 마음에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주말엔 늘 산에 올랐고, 그러던 어느 해 이곳 지리산에서 무아정 터를 알게 됐다고 했다. 지리산 골짜기에서 제대로 살아보겠다는 각오로 회사를 그만두고 지리산 청학동에 무아정을 지었다고 했다. 그런 생활이 올해로 9년째라고 한다.

아직 마흔도 안 된 나이지만 나는 내 또래에 비해 이런저런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만나고 있다. 노동운동은 결국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서로의 아픔과 기쁨을 주고받으며 새로운 세상에 대한 믿음을 키워가는 일이라 생각한다. 사람 때문에 지치기도 하지만 또 역시 사람 때문에 기운이 솟기도 한다. 용아저씨는 사람들과 함께 사람을 느끼면 기를 받고 사시는 분 같았다. 찾아오는 사람들이 피곤했다면 용아저씨는 벌써 무아정을 떠났을 것이다. 찾아오는 사람마다 정성껏 잠자리, 먹거리 챙기는 일이 과연 쉬운 일인가.


지금까지 무아정을 찾은 사람들이 4천명은 넘는다고 한다. 그렇지만 지금껏 쌀독이 바닥난 적은 없다 한다. 쌀이 떨어질 만하면 어떤 식으로든 다시 채워졌다고 한다. 기본적인 생활비는 배트남 참전 상이군으로 받는 연금으로 해결한다고 한다. 월 100만원도 안 되는 돈이지만 국민세금에서 받는 돈이니 국민 모두와 나누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결국 무아정을 찾는 이들은 자신들이 낸 세금을 되돌려 받는 것이라 굳이 미안해 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무아정은 대문도 없고 집을 비워도 문을 잠그지 않는다고 한다. 용아저씨가 없으면 누구나 주인이 되어 밥 해먹고 잠자고 가면 그만이란다. 이것저것 용아저씨가 정성들여 모은 것들이 눈에 보였지만 그대도 상관없다고 한다. 누군가 가져가면 그만이란다. 욕심내는 물건은 아예 그 자리에서 그들에게 줘버린다고 한다. 무아정은 그렇게 소중한 것을 함께 나누는 것 곳인 것 같다. 욕심을 버리면 버린 만큼 아니 그보다 더 큰 것으로 채워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나는 무아정에서 사흘을 묵었다. 이른 아침 무아정을 나서며 용아저씨께 인사를 드리려 했지만 아저씨는 방에 없었다. 다른 길벗들과 함께 벌써 길을 나섰다고 한다. 옆방 길벗이 아침밥을 먹자며 부른다. 용아저씨가 밥 한 그릇이라도 따뜻한 국물에 말아 먹고 가라며 챙겨놓았다고 한다. 동쪽 중산리 능선 너머 아침 햇살이 눈부시다. 나는 무아정을 내려오며 손발이 저질만큼 뿌듯해져 오는 나를 만날 수 있었다.

<무아정을 오기 전에 미리 알아둘 것들>
- 술을 마신 채 무아정을 찾아가면 곤란, 술은 그곳에 와서 벗들과 흥겹게 먹으면 된다.
- 밥은 용아저씨가 해 주신다. 정말이다. 그러나 설거지와 방 청소는 스스로 한다.
- 유무형의 소중한 것들을 얻었다면 자신도 유무형의 소중한 것을 하나쯤 남기고 오면 더욱 좋다. 그러나 반듯이 그래야 하는 건 아니다.
- 닷새 이상 연속해서 묵을 순 없다. 더 묵고 싶은 하룻밤 외박하고 다시 오면 된다.
- 가끔 여럿이 단체로 찾는 경우가 있어 빈방이 없을 수도 있단다. 미리 전화연락을 하고 가는 것이 좋겠다.

<지리산 청학동 무아정 찾아가는 길>
- 경남 하동읍 버스터미널에서 청학동행 군내버스를 타서 삼성궁 입구에서 내린다. 버스기사에게 내려달라고 해야 한다.
- 삼성궁쪽으로 가다가 오른쪽 길가의 ‘청토’라는 민속음식점 못 미쳐 계곡길을 따라 150m 정도 시멘트 길을 올라간다. 다섯 채 정도 집이 보이는데 그중 윗쪽에 있는 기와집 2채가 무아정이다.
- 동네에선 ‘용아저씨네 집’으로 통한다고 한다.

주 소 :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청학동 ‘무아정’
연락처 : 055-884-7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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