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묘한 시점이었다. ‘노동장관 퇴진’ 요구로 요약되는 노정갈등을 풀기 위한 노력이 이곳저곳에서 진행되고 있고, 이른바 ‘비공개’라던 회의 내용이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인터뷰를 위해 김원배 노사정위 상임위원을 만났던 21일도 그랬다. 전날에는 양대노총 사무총장과 경총 부회장이 만났고, 추석 연휴 직전인 16일에는 경총 부회장과 노동차관이 만났다. 이 두 모임 모두에 김 상임위원이 참석했다. 아니, 주도했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만난 거 다 아시네, 하하….” 인터뷰이(interviewee)를 최대한 편안하게 만드는 게 인터뷰의 기본 룰이건만 다급한 마음에 ‘본론’부터 꺼냈다.

“어제 노동계, 경영계 바이스(부대표)급들 만났다. 지난 6월, 노동계가 노사정위 개편방안에 대한 단일안을 만들었는데, 그 이후로 논의가 진행되지 못했다. 여전히 (노정갈등 기류 때문에) 대화가 안 되고 있지만 우선 사회적 대화기구부터 개편해야겠다고 판단했다. 양 노총 위원장도 사회적 대화를 중시하고 있고. 그렇게 하자는 데 노사 모두 의견 접근했다. 정부도 반대할 이유가 없지.”
 


노사정위는 이날, 6월에 만든 노동계 단일안에 대한 경영계의 입장을 들은 데 이어 노사 입장에 대한 노동부의 판단을 구한 뒤 각각을 조율하면서 법 개정안을 만들 계획이다. 빠르면 올 정기국회 제출을 목표로. 그런데 시작부터 기류가 심상찮다. 여전히 ‘노동장관 퇴진’이라는 깃발은 여전히 펄럭이고, 27일 총리가 양대노총 위원장과 만났지만 뾰족한 해법이 나오지 않은 채 오히려 노동부와는 더 ‘각’을 세우는 모양새가 연출될 만큼 ‘사회적 대화’는 여전히 '시계제로'이기 때문이다.

실제 20일 저녁 모임에 대해서도 노동계는 “밥 먹자고 해서 갔더니 경영계 입장을 듣는 자리라고 하더라”고 하고, 경영계는 “회의하러 왔는데 노동계가 왜 이렇게 나오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문제는 사회적 대화의 필요성, 그리고 긴박성을 누가 더 갖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노사정위 개편에 대해서는 이해관계가 크게 엇갈리는 건 아니다. 절충의 어려움은 없다고 본다. 그런데 어느쪽에서 서둘러야 하는 문제인지…. 노동계냐, 정부냐. (그런 과정에서) 노사정위만 속이 탄다.”

정부를 배제하고 노사만 갈 수 있느냐

 

 

약력
1952년 출생
1973년 제14회 행정고시 합격
1983년 대통령비서실 노동담당관
1990년 노동부 노정과장
1995년 노동부 노정기획관
1996년 청와대 노동비서관
1998년 노동부 노정국장
2000년 중앙노동위원회 상임위원
2001년 노동부 기획관리실장
2004년 노사정위 상임위원

정부와 갈등 해소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다음달 6일에는 정부가 빠진 채로 노사가 주최하는 대토론회가 열린다. “노동을 배제하는 정부와는 대화할 수 없다”는 노동계의 요구가 그대로 실현되는 셈이다.

“노동계는 네덜란드 모델을 많이 얘기하는데 노사가 하면 정부가 지원하는 방식이 일견 바람직하다. 하지만 우린 사회적 대화도 성숙되지 않았고, 현재 정부의 영향력이 노사관계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노사‘만’의 대화가 어느 정도 무게 있게 다뤄질지 의문이다.”

김 상임위원은 노사주도형 모델에 대해 “우리 현실을 감안할 때 적용 가능한 해법인가” 물음을 던진다. “노사가 결정내렸다고 해서 국민적 당위성을 실어줄 수 있을지도 따져봐야 한다. 네덜란드는 노사 합의에 대해 국민이 지지하면 정부가 이를 실현하기 위한 예산, 법령 등 제도적 보완장치, 즉 시스템이 작동된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 노사는 그런 대표성이 떨어지고, 국민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지 못하다.”

그의 말은 “노동운동이 바뀌어야 한다”는 데로 이어진다. “조직률 11%만 갖고 얘기하는 게 아니다. 11%여도 전체 근로대중을 상대로 한 노동운동을 했다면 국민들은 흔쾌히 대표성을 줄 것이다. 하지만 노동운동은 사회적, 정치적 정체성까지 확보하지 못했다. 이는 노동운동 진영이 분명한 비전이 없고 전략적 마인드가 떨어지는데 원인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 그는 ‘멍석론’을 펼친다. 참여정부 들어 괜찮은, 넓어진 공간이 있는데 왜 활용을 못하냐는 것이다. 이전 정부에 비해 ‘넓어진 멍석’ 위에서 전체 근로대중을 위한 어젠다(의제)를 설정하고 실현하는 쪽에 조직역량을 결집시켰어야 했는데, 분산된 투쟁에 자꾸 스스로 조직 내로 말려들어가는 운동을 해 왔다는 판단이다.

“바로 그 갭(간극)에 대해 대통령은 ‘섭섭’하다고 하는 것이고, 그 표현이 ‘대기업 이기주의’로 나타난 거다. 발언의 진의, 진정성을 잘 따져볼 필요가 있다.”

정부도 멍석 까는 데에만 급급, 원칙 부족

 

 

 

 

그런데 멍석에서 놀지 않는다고 노동계만 탓하는 건 뭔가 좀 석연찮다. 멍석으로 가는 ‘접근권’이 보장됐느냐 하는 점에서 말이다.

“물론 그렇다. 참여정부 초기 공간을 열어두는데 급급하다 보니까 원칙이 부족했다. 그래서 원칙을 다시 수립하려다 보니까 노동계는 이제 공간마저 좁아지는 거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 이 정책변화 과정에서 정부가 인내심을 더 가졌어야 했다. 인내심이 부족했으니까 ‘내부 반발을 무릅쓰고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데 노동계가 이럴 수 있느냐’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그는 노정관계가 이렇게까지 틀어지게 된 시점을 지난해 8월의 일로 꼽는다.

“당시 민주노총이 노사정위에 들어오겠다고 했을 때 믿었다. 하지만 민주노총은 (사회적 교섭 방침) 결정을 올 1월 대의원대회로 미뤘다. 정부는 그 때 노동계가 대화할 의지가 있냐고 의심했는데, 인내를 갖고 여건을 더 조성하기 위해 노력했어야 했다고 본다. 이수호 집행부는 사회적 대화 할 의지가 있고, 내부 반발이 있더라도 약속은 지킨다고 본다. 서로 기회를 잘 활용했으면 획기적인 노동운동 발전의 계기가 됐을 텐데 정말 아쉽다.”

그러면서 그는 ‘노동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정책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이를 제대로 조정, 조율하고 제대로 기능하게 하기 위한 노력이 없이는 안 된다는 말이다.

“예전에 근로시간제도를 개편할 때를 보자. 노사정위에서 진지하게 논의했지만 결국 합의 안 됐다. 결국 국회에서 또 논의했지만 합의에 실패했다. 결국 정부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그런데 그 뒤 노동계에선 아무런 얘기가 없다. 더이상 파업도 없고.”

이 말은, ‘100%’를 위해 노동계가 ‘60~70%’도 포기했지만 결국은 다시 원점이고, 원점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더이상의 '이슈화이팅'조차 하지 않는 노동정치의 실종인 셈이다.
이 말은 현재 국면에서도 그대로 대입할 수 있다.

“선수들은 더이상 갖다놓을 사람이 없을 정도로 최상의 명콤비네이션이다. 그런데 본격적인 플레이를 하기 전부터 이상하게 됐다. 그런데, 지금 문제가 되는 건 정책적 이슈가 아니다. 노동정치 영역에서 메커니즘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다. 이 국면이 스스로에게 유리하지 않다는 것을 노사정이 모두 인식했음 좋겠고, 어느 누구 잘잘못을 가리기 전에 신뢰회복과 대화복원에 나서야 한다.”

이 대목에서 그는 또 “특히 정부가 노사 양쪽에 먼저 이해와 협조를 구하는 적극적 자세가 필요하다.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며 ‘친정’의 변화를 촉구하기도 했다.

노동계, 노사정위 들어오는 거 겁내는가

이와 함께 노동계에 대해서도 정부의 대화 제의에 대해 ‘정치적 쇼’라고만 치부하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받아들일 것도 주문했다.

“만약 (다른 부처도 포함되는) 개각 때 김대환 장관이 물러나면 ‘요구가 관철됐다’고 할 건가. 전략적 대응이 필요하다. 지난 7일 장관이 로드맵 놓고 대화하자고 했는데 왜 노동계는 안 받나.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고 본다.”

여기서 그가 특히 강조한 대목은 대화와 타협이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라는 방식으로는 달성될 수 없다는 점이다. “70%를 얻고 30%는 상대방에게 줄 마음이 있어야 한다. 아직도 ‘우린 토씨 하나 못 고친다’고 하면 안 된다. 리더십, 조정능력이 그래서 필요하다. 노사정위에 들어오길 겁내는 것도 그런 거 아니냐.” 리더는 조직의 요구를 ‘전달’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그가 리더십, 조정능력 등 내부 조직운영 체질 개선과 함께 노동계에 주문한 것은 ‘기업’에 한정돼 있는 의제의 ‘사회(전 근로대중)’화이다. 이는 노동계도 뼈아프게 개선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는 대목이다. 대표적인 노력은 ‘산별노조 결성’이고 ‘산별교섭 정착’이다. 자칫 ‘만능론’이라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될 정도로 노동계에서 산별노조, 산별교섭은 마치 ‘결론은 버킹검’ 격으로 귀 따갑게 강조된다.

교섭구조의 초기업화에 대한 그의 결론은 명쾌했다. “옛날 방식으로 기업별 체계에서 풀기 어려운 문제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글로벌화 되는 경제체제 속에서 해외이전 문제, 이에 따른 구조조정, 비정규직 문제 등은 기업단위 교섭으로 풀기 어렵다. 교섭구조의 초기업화, 중층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상대방’이다. 산별노조를 만들어도 교섭할 산별사용자가 없다. 교섭하자는 것을 요구로 내걸고 파업까지 해야 하는 현실이다.

 

 

 

 


정부, 산별교섭 매뉴얼 만들 필요

“초창기 단계라서 깔끔하게 교섭형태가 정리되지 못한 건 사실이다. 분명 산별교섭은 근로조건의 통일성에 기여하고 잘만 운영하면 교섭비용도 줄일 수 있으며 개별 사업장 단위 노사갈등을 피할 방안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사용자가 교섭을 회피하는 건 이중교섭 등의 부담이 있기 때문에. 초기부터 과다하게 교섭비용을 요구하면 사용자가 외면하게 된다. 산별교섭의 장점을 부각시키면서 사용자에게도 유인책을 줘야 한다.”

사용자에 대한 주문도 잊지 않았다.

“이왕에 산별노조가 꾸려지면 거기에 맞는 교섭구조를 빨리 갖출 필요가 있다. 여전히 기업별 체제에서 단위노조와 쏙닥쏙닥한 관계를 선호하겠지만 변화하는 환경에 적극 대응할 필요가 있다. 불가피성, 필요성, 당위성을 느껴야 한다. 사용자단체의 대표성도 확보하고 전문가도 영입해 산별교섭의 장점을 사용자도 취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런데 노동계에선 정부가 정책적으로 ‘기업별 노조를 강제’해 왔던 과거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산별교섭을 유도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법을 개정해 산별노조가 결성되면 사용자단체 구성을 의무화한다거나 ‘지역적 또는 일반적 구속력’과 같이 산별협약의 적용범위를 확장하는 것 등을 담자는 것이다.

“엄연히 자율교섭인데, 정부가 (그런 방식 등으로) 산별교섭을 강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기업별이든, 산별이든 교섭방식은 노사가 정할 사안이다. 단지 정부는 노조가 산별노조를 원할 때 걸림돌이 되는 법 조항을 없앰으로써 자율적 판단이 실천될 수 있도록 뒷받침하거나 산별교섭을 둘러싼 불필요한 잡음을 제거할 수 있도록, 또한 교섭비용이 과다하게 지출되지 않도록 하는 매뉴얼을 만들어 노사에 권고할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그는 최근 ‘공동화냐, 고도화냐’라는 논란도 빚고 있는 이른바 ‘제조업 공동화’ 문제에 대해서도 입장을 내놨다.

“세계 경제는 글로벌 경쟁체제다. 국내에서 임금, 원자재 등 비용(cost)면에서 제품을 경쟁력 있게 내놓지 못하겠다고 하면 그 수준에 맞는 나라에 가서 공장을 세울 수밖에 없다. 국내에서 경쟁력 없는 산업을 끌어안고 있는 것은 경제를 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미래를 위해 털어낼 수 있는 사양산업은 털어내고 성장산업, 고부가가치 산업을 육성하는 것이 고용이나 경제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

이와 관련, 노사정위는 지난 5월 제조업공동화 특위를 만들어 목하 대안을 고심 중이다. 하반기에 논의 결과가 제출된다고 한다.

“경쟁체제 하에서 구조조정은 상시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고 덕분에 분규도 엄청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리 장기투쟁을 한다고 해도 경쟁력을 상실한 기업이 해 줄 수 있는 건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용을 위해 새로운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직지원시스템을 더 확대시킬 필요가 있다. 고도화된 숙련을 확보할 수 있는 투자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아깝잖게 돈을 투자해도 좋겠다.”

돈을 투자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교육프로그램을 또 어떻게 짜느냐 하는 문제다.
“실직자 100명이 있다고 해서 100명을 통째로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은 유명무실하다. 개개인의 특성에 맞는 맞춤훈련이 절실하다. 아주 구체적이고 세련된 프로그램이 마련돼야 한다. 개개인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노사관계 전문가이면서 지난 92년에는 <산업안전보건법 이론과 실제>라는 저서를 낼 만큼 산업안전에도 해박한 그는 고용 문제에서도 거침없는 생각을 쏟아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지금 그의 머리 속은 ‘사회적 대화 복원’을 어떻게 실현해 낼지 꽉 차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내년 1월에 임기가 끝난다. 올해 안에 노사정위 개편방안이 만들어지고 노동계가 다시 대화틀로 들어와 노사정위가 정상적으로 운영되면 편하게 나갈 수 있겠다 싶었는데….” 하지만 ‘휴우’ 내뱉는 한숨은 그렇게 되기 어렵기 때문에 아쉽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그렇게 하기까지 가야할 길이 너무 멀고 험하다는 뜻으로 읽힌다.

인터뷰 말미 그는 이런 얘길 꺼냈다. “대통령이 올 들어서도 2번이나 노사정 대타협 못한 거 뼈아프다고 했다. 그분으로선 전공분야인데, 여기서 업적이 안 나오니까 서운할 수 있다. 노동부도, 청와대 라인도 그 뜻을 헤아리고 인내해야 한다. 필요하면 노동계 대표가 직접 대통령을 만나 풀 수도 있을 텐데….”

노동계에 대해서도 이렇게 제안했다. “대승적 차원에서 접근하면 좋겠다. ILO 아태총회도 한 차례 연기시켰으니 이번에는 성사시키겠다고 공언하면 되지 않나. 그러면서 대통령 만나자고 해라.”

 

 

 

 

30년 행정관록, 그러나 3자 기구서 새로 배운다
지난 1973년 공직에 발을 디딘 뒤 30년 동안 노동행정가로 잔뼈가 굵은 김원배 상임위원은 ‘조정의 달인’, ‘페이퍼의 달인’이라는 ‘칭송’을 받을 만큼 능력에 관해선 탁월한 전문관료로 평가된다. 후배나 동료 노동관료들의 얘기만이 아니라 노동계와 경영계에서의 평가도 그렇다. 노동계 한 관계자는 “공대 출신이지만 인문사회적인 합리성까지 갖춘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는 90년 이후 굵직한 노사갈등이 있는 곳마다 나서 ‘해결사’ 노릇을 했다. 그 조정의 결과에 대한 평가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는 물론 삼성자동차 매각, 엘지반도체 현대로 매각, 한전 분할매각, 발전파업, 두산중공업 고 배달호씨 사망 등의 사건에서 그는 언제나 조정자로 나섰고, ‘합의’라는 결과물도 만들어냈다.


90년 노-사-공익으로 구성된 국민경제사회협의회 발족에서부터 3자협의체인 노사관계개혁위원회와 노사정위원회 운영에서도 주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교원노조는 물론 민주노총 합법화라는 ‘새 역사’도 그가 노정라인 재직 당시 만들었던 작품이다.


“마지막까지 논란이 됐던 건 당시 해고 상태에 있었던 유덕상 부위원장의 조합원 자격 문제였다. 그때가 중노위 상임위원으로 자리를 옮기기 직전이었는데, 이것만은 처리하고 가야겠다 싶어 고심하다가 묘안을 짜냈다. 최초에 설립신고서를 낼 때 지위를 보니까 조합원 자격이 있었다. 거기에 근거해 필증을 교부했다.”


민주노총은 총 4차례 설립신고서를 냈는데, 95년 11월이 그 처음이다. 당시에는 상급단체 역시 복수 설립이 허용되지 않아 ‘당연’ 반려됐는데 어차피 민주노총이라는 실체는 같은 만큼 95년 기준 조합원 자격을 따져 판단했다는 것이다.


“(전노협 출범 이후 거의 10년만에 민주노총을 합법화시킨) 이때 가장 보람 있었다”던 그는 99년 당시 민주노총 합법화 문제를 검토하면서 최소한의 법적 요건을 갖춰야 한다는 것과 함께 법외단체이긴 하지만 21세기 노사관계 틀 형성이라는 대승적 차원에서 접근한다는 2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실제 그는 96년 노사관계개혁위를 꾸릴 때에도 청와대 비서관으로 일하면서 ‘비합법단체’였던 민주노총을 대화테이블에 앉히는 데도 역할을 했다.


“(민주노총 사무실이 있던) 삼선교를 직접 갔었다. 민주노총에선 위원 수를 3대 3으로, 한국노총과 동등권을 달라고 하더라. 그런데 조직규모가 6대4 정도로 열세였다. 그래서 3대2로 하되 민주노총이 추천하는 공익위원을 모시자고 했다. 실질적으로는 3대3이 되니까. 그분이 바로 김금수 노사정위원장이다.”


이수호 위원장과 일하지 못하는 게 아쉬워


그는 또 필수공익사업장에서도 합법파업이 가능하게 길을 튼 장본인이기도 하다. 중노위 상임위원 시절, 그는 한국통신계약직노조의 조정신청 사건에서 조정이 결렬됐음에도 직권중재에 회부하지 않았다. “노동쟁의에 이르기까지 회사 쪽의 귀책사유가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노조의 파업을 무조건 불법으로 만드는 것이 노동위원회 역할이 아니다. 당시 직권중재 회부를 보다 엄격하게 하려고 매뉴얼을 짜서 시달도 했다. 넓게 보면 필수공익사업을 없애고 공익사업으로 통합하면 자연 직권중재는 없어진다. 로드맵에서도 이 내용이 있는데 정부 입법안을 기대해도 좋지 않겠나.”


30년 한 우물을 판 그이기에 기억에 남는 사람도 유독 많을 것 같았다.


“다 좋으신 분들인데 이수호 위원장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교원노조법 만들 때 전교조 위원장으로, 민주노총 합법화 논의할 때 민주노총 사무총장으로 만났다. 역지사지, 남을 배려할 줄 알고 인품이 훌륭하시다. 저런 분하고 (사회적 대화기구의 장에서) 일하지 못하는 게 너무 아쉽다.”

 

할 일이 많은데 참담한 마음이다


그런 그는 행정관료의 길 중에 왜 ‘노동부’를 택했을까?


“당시에는 노동을 잘 몰랐다. 공대 나오고 금성사에서도 근무했기 때문에 당연히 상공부로 갈 줄 알았는데 노동부(당시 노동청)로 발령받았다. 초기에는 떠날 생각도 했는데, 일을 하다 보니까 간단치 않고 할 분야가 많더라.”


그가 금성사에 다녔을 때 한달 임금이 5만8천원. 행시 합격 후에는 절반 가량인 3만원이었다. “돈을 벌려면 금성사에 계속 있었겠지. 그런데 자꾸 여기 일에 빠지게 되더라고. 어쩔 수 없이.” 당시 농촌에서 도시로 올라온 어린 여공들의 근로실태 등을 감독하러 다니다가 회사 부설 야학에서 직접 여공들의 ‘선생’이 되기도 했던 그, 30년을 훌쩍 넘긴 세월을 몽실몽실 떠올리던 그는 “그런데 지금 가장 괴로울 때다”고 툭 내뱉는다.


행정관료일 때는 몰랐던 시각을 3자 기구에서 조정자로 일하면서 많이 배우고 있다던 그는 “오로지 정부의 시각에서만 노동을 봤는데 또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어 긍정적 경험이라고 본다”면서도 “괴로운 시기라는 건 노동계 탈퇴로 사회적 대화 기구가 표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사정 주체들이 할 일이 많은데 참담한 마음”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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