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빈곤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 ‘여성의 빈곤화, 빈곤의 여성화’라는 명명 이후 이에 대한 구체적인 원인과 대안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어려움은 정부나 언론, 시민단체들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이미 다양한 통계와 주장을 통해서 여성빈곤의 심각성은 제기되어 왔다.

전체 여성노동자의 70.5%가 임시일용직이며 임금은 남성노동자의 63%에 불과하다는 것. 빈곤가구 중 여성가구주의 비율은 45.8%로 전체가구 중 여성가구주 비율 18.5%의 2.5배에 이르며, 여성가구주 가구 중 빈곤가구 비율은 21.0%로 남성가구주 가구 중 빈곤가구 비율 7%의 3배에 이른다고 한다. 그만큼 심각하다. 그래서? 그 다음은? 여성의 빈곤에 대해 발언하는 주체가 어디이건 장황한 통계와 지표다음에 나오는 이야기는 별로 없다.

여성빈곤 문제가 제기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일자리와 보육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것도 만만치 않다. 정부는 빈곤여성에 대한 종합대책을 수립하겠다고 나섰으나 그 내용은 기초생활보장 및 모성보호지원 강화, 여성특화 일자리 창출 및 지원강화, 가정폭력 피해자, 노숙자 등 취약계층 여성보호 대책 등 실질적인 대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실정이다.

그나마 ‘일자리’의 문제는 현재 빈곤의 가장 주요한 특징인 일하는 빈곤층을 양산하고 있는 가장 불안정하고 낮은 임금의 일자리만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대다수의 임시일용직 노동자가 여성노동자인데, 이들의 빈곤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또 다른 열악한 일자리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빈곤여성의 일자리를 확대하라는 요구는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그 일자리의 질이 언급되지 않음으로 인해 정부가 추진하는 공공근로형 사회적 일자리를 확대하라는 의미 이상으로는 다가오지 않으며, 궁극적으로 노동시장정책을 통해 안정적 일자리를 마련해야 한다는 원칙에는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여성빈곤의 대상도 모호하다. 여성가구주의 문제가 여성빈곤의 핵심대상으로 제기되고 있으나 여성가구주 지원내용의 한계를 접어두고서라도 그 안에는 불안정한 노동시장 속에서 상대적으로 더욱 열악한 노동을 강요받는 비가구주 여성이나 여성단독가구의 문제는 제외되어 있다. 오히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남성 생계부양자와 여성근검절약형 소비주체 혹은 생계보충자로서의 여성’의 상을 주입받는 가운데 주소득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열악한 노동조건과 임금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하고 있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는 보육확충 계획은 가사나 육아의 부담을 해소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일 수 있으나 그 목표 자체가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을 높이기 위함’이다. 여성에 대한 빈곤대책은 빈곤을 탈출하기 위한 정책이어야 하고, 보육정책은 보육 그 자체를 위한 정책이어야 한다. 그러나 정부정책은 여성에게 ‘가사와 직장생활의 양립’을 강요하며 치밀한 계획 속에서 불안정하고 낮은 임금의 일자리로 밀어 넣고 있다.

언론에서 드러나는 빈곤여성의 모습 또한 상이하다. 1급 중증장애여성 수급자였던 최옥란 열사의 투쟁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으나 ‘장애인수급자’로서의 주목이었을 뿐 ‘장애여성’의 문제로 접근되지 못했다. 그녀의 양육권의 문제는 장애여성이 자녀를 양육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의 형성으로 나아가지 못했으며, ‘장애’와 ‘빈곤’이라는 이유로 아이를 양육할 수 없는 현실을 인정했을 뿐이다. 반대로 ‘여성노숙인’에 대해서는 ‘노숙’의 문제가 아닌 ‘여성노숙인’의 생존방식에 호들갑스러운 관심을 보였다.

빈곤은 삶 그 자체이다. 빈곤한 삶은 그것이 질적인 것이건 양적인 것이건 통계로 표현되어 질 수 없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폭력의 결과로 드러난 것이 여성의 빈곤문제라면, 그리고 이러한 차별과 폭력이 여성의 빈곤을 재생산하고 있다면, ‘빈곤대책’으로서 여성의 특화된 일자리나 - 보살핌 노동을 중심으로 하는 - 그러한 일자리로 가기 위한 보육대책만으로는 여성의 빈곤을 고착화시킬 뿐이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차별의 지점에서 여성의 빈곤문제를 제기하기 위한 모색으로부터 여성의 빈곤문제에 맞서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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