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경유해서 평양에 도착했다. 평양에 도착하는 데만 1박2일이 걸린 셈이다. 북경 공항에서 출입국 수속부터 사소한 길안내까지 간단한 영어도 통하지 않았다. 이국의 낯설음에 조심스럽고 당황했던 때문인지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말이 통하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무작정 반가움이 앞섰다. 방북 이전에 내내 걱정했던 ‘혹여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하는 걱정이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 하나만으로 일시에 해소되었다.

고즈넉하고 깨끗한 평양 거리

우리를 맞이한 사회민주당 대표단과 인사를 나누고 순안 공항을 출발해서 숙소로 가는 내내 평양 거리와 시민들을 바라보았다. 방북 초행인 내가 가장 궁금했던 평양거리의 첫인상은 도심 깊숙이까지 고즈넉하고 깨끗했다. 우리가 탄 승합차가 중앙선이 없는 한적한 평양시내 거리를 질주하는 내내 평양 거리는 고요하고 질서정연했다.

평양 시내로 접어들자 평양거리 곳곳마다 건물 보수공사를 하고 있었다. 조선노동당창건 60돌 준비와 평양거리를 관광지대로 개발하기 위한 것이란다. 새 단장을 하고 있는 저층아파트와 주상복합건물은 모두 50~60년대에 지어진 집들이라고 한다. 현대적 장비 없이 전후에 계획 도시 평양을 건설했을 그 망치와 곡괭이를 사용하여 붉은 깃발 꽂고 함께 노동하는 평양의 검게 그을린 노동자들을 보며 북의 역사와 경제의 변화과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고려호텔의 밤

환영만찬을 마치고 고려 호텔에서 바라 본 평양 거리는 더욱 고요했다. 9시면 상점이 모두 문을 닫는 시스템이 그렇고 가로등이 켜지지 않아 초저녁부터 캄캄한 거리가, 드문드문 희미하게 켜진 아파트 불빛이 그랬다. 몇 년 전 평양에 왔을 때 고려호텔에서 바라 본 평양시내는 온통 캄캄했다는 한 인사의 말에 의하면 오늘 평양의 거리는 그나마 어려운 북의 경제가 많이 회복된 것을 반영하는 것이리라.

우리는 룸서비스 가격이 우리 돈으로 500원 정도하는 대동강 맥주를 마시며 전체 일정과 토론문과 회담 내용을 점검했다. 방과 회의장 식당 로비 어디나 재떨이가 놓여져 있는 고려호텔에 담배연기도 흩어지지 않을 만큼 우리는 신중하게 협의하고 결정하면서 정당교류의 정형과 과정이 어떤 것인지 부딪히면서 깨달았다. 짧은 시간 텔레비전을 켤 때마다 선군사상의 전의를 불태우도록 고무하는 프로그램만 나오던 밤. 통신이 두절되는 곳, 지구상에서 남쪽과 가장 가까우면서 가장 멀리 있는 나라. 북쪽에서의 첫 날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남쪽과 다르지 않은 나무와 풀과 초가을 햇살

방북 이튿날 묘향산(이후 향산. 북측은 그렇게 불렀다)을 방문했다. 향산은 평양거리에서 상상했던 만큼 청정하고 유려한 자연을 그대로 머금고 있었다. 향산 초입에는 저층 아파트가 몇 동 있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주거지라고 했다. 유원지 입구마다 상가가 형성되어 있는 남쪽과는 대비되는 모습이다.

서산대사가 “금강산은 빼어나기는 하나 장중함이 덜하고 지리산은 장중하나 빼어남이 부족하니 오직 묘향산만이 장중하면서도 빼어나다”고 표현한 향산의 굽이굽이 마다 흐르는 수심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맑은 계곡, 팔만대장경 판본을 보유하고 있는 보현사 뜰 어디나 남쪽과 다르지 않은 나무와 풀과 초가을 햇살이 있었다.

옥류관 난간에서 바라본 대동강 물줄기와 휘영청 늘어진 수양버들, 쑥섬 혁명사적지 한귀퉁이에 있는 오래된 원두막과 나룻배, 무엇하나 낯선 것이 없었다. 우리 측 대표단 중 몇 사람이 안내원 동행 없이 평양 거리를 나섰다가 북측 안내원의 지적을 받았을 때 우리는 비로소 ‘분단의 현실’을 깨달았다.


“모든 인민이 혁명사상을 학습한다”

평양시내 넓은 광장이 있는 곳마다 사람들은 집단을 이루어 무언가를 연습하고 있다. 북의 면모를 한 편에 담아낸 집체극 <아리랑>을 연습하는 모습이다. 방북 이튿날 저녁 관람한 <아리랑>은 안내원의 말대로 북의 체제와 현실, 앞으로의 방향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2만명이 만들어낸 조각그림이 영상처럼 다채롭게 움직였고 5만명이 각각 만들어낸 다양한 집단체조와 곡예, 무용, 연극…, 1시간 반의 무대를 채운 7만명이 전문 예술인을 빼고는 모두 평양의 학생들과 시민, 군인들이라고 한다. 전체 인민이 1개 이상의 조직에 가입되어 있다는 조직화된 북의 사회를 그대로 반영하는 작품이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사람들이 일체가 되어 만들어낸 집체적 예술성에 놀랐고 북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 고난의 행군, 외세와의 전쟁의 절박함과 진정성에 놀랐으며 그것이 선군사상으로 집약된 지나친 민족주의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한마디로 북은 전쟁 중이었다. 지난 50여 년 간 지속해 온 전쟁이었다. 경제 제제로 더욱 치열하게 벌여온 전쟁이었다. 전 국민이 일체가 되어 이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평양시내 한 복판에 서 있는 어마어마한 김일성 동상과 그를 기리는 붉은 글씨와 구호의 의미를 <아리랑>은 담아내고 있었다.

평양거리를 걷는 중에도 책을 보는 사람들이 자주 눈에 띄고 호텔 종업원들도 두꺼운 책을 끼고 다니는 것에 대해 북측 안내원이 ‘모든 인민이 혁명 사상을 학습한다’고 했던 말은 과장이 아닐 것이다.

북은 전쟁, 남은 분열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남측 국회가 국가보안법 문제를 풀고 6·15공동선언 이행을 결의한다면 국회회담은 성사될 것이라는 점을 시사했다. 조선사회민주당 김영대 위원장 역시 남쪽 국회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한결같이 말했다.

민주노동당은 남쪽 국회의장도 국회회담에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고 민주노동당이 6·15공동선언 이행을 국회차원의 결의로 이끌어 내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여전히 수구보수적 사고를 가진 정치인이 많이 있는 국회차원의 결의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국가보안법 문제로 작년 정기 국회 내내 파행을 겪은 것은 우리 정치인들의 현실인식을 그대로 드러내 주는 것이었다.

북은 강대국의 체제 위협에 맞서기 위해 전 국민을 조직화하고 군대를 강화하는 것으로 싸워 왔지만 힘의 대결로 체제 위협을 떨치기 어렵다는 것은 상식이다. 때로는 벼랑 끝 전술을 펼치며 강대국과의 협상을 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국제적인 길동무를 잃은 것도 사실이다.

남과 북은 정치체제부터 방식 모든 것이 너무나 확연하게 다르다. 남북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경제협력도 더욱 확대되고 있음에도 정당 정치인 교류가 이제야 시작된 것은 이러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첫 정당교류의 성과

양당 회담에서 민주노동당과 조선사회민주당은 몇 가지 합의점을 얻어낼 수 있었다. 양당교류 정례화와, 조선사회민주당 답방, 민주노동당 대규모 방북 추진 등 교류확대가 첫째다. 독도문제 공동성명 발표처럼 남북공조가 필요한 현안에 지속적인 공동실천을 모색하기로 한 것도 성과다.

무엇보다 이번 정당교류가 남긴 것은 남북국회회담 성사를 위해 양당이 함께 노력하자는 것과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국회 사진전을 각 관계기관에 제안하기로 합의했다는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지만 민주노동당과 조선사회민주당의 첫 정당교류의 성과가 이 정도면 풍성한 결실을 맺었다고 할 수 있다.

애국열사릉에서 열사들을 기린 것이 어느 나라에 대한 ‘애국’이냐 논란이 될 만큼 우리 사회는 여전히 많은 변화가 필요하다. 남북이 서로 무조건 금기시하던 시대를 한 단계 극복한 만큼 이제는 공식적으로 ‘적국’으로서의 적대행위 일체에 종지부를 찍는 것에 정부와 정당이 나서는 것이 시급하다.

이번 정당교류가 남북 정당 정치인의 교류 확대로 이어지고 평화와 통일로 나아가기 위해서 더 이상 냉전시대의 논리는 용납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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