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법안의 6월 임시국회 처리가 불발됐다. 이를 놓고 노사정-국회의 태도는 철저히 엇갈리고 있다.

노동계는 단병호 의원이 발의한 비정규법 보호법안을 사회적 의제로 만들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정부 입법안의 국회통과를 저지시켰다며 내심 안도하는 분위기다.

사용자측은 처음부터 비정규법안에 관심이 없었던 만큼 "기업은 서두를 이유가 없다"(최재황 경총 정책본부장)는 자세다. 노동부 역시, 당초 법안을 발의할 때와는 달리, 국회 처리 무산에 대해 말을 아끼고 있다.


기획 연재 순서
① 노사정 협상, 이렇게 진행됐다
② 협상 주체들, 이렇게 협상하고 버텼다
③ 비정규법안, 무엇이 쟁점이었나
④ 비정규법, 이렇게 하자
⑤ 비정규법안 협상, 앞으로 어떻게 되나
반면, 노사정-국회 협상을 주도한 여당은 "더이상 나서지 않겠다"며, 법안 심의 저지를 위해 국회 환노위를 점거했던 민주노동당에 화살을 돌리고 있다. 물론 민주노동당은 점거는 당연했다며 "여당이 책임지고 노사정 대화를 주선하라"(단병호 의원)는 반응이다.

사회적 양극화는 이제 전경련조차 인정하는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가 됐다. 그리고 그 한 가운데에는 800만명이 넘는다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다. <매일노동뉴스>는 비정규법안 통과를 놓고 지난해말부터 노사정-국회 간에 진행된 협상의 과정과 쟁점을 정리하는 특집을 마련했다. 노사정-국회가 모두 비정규직 노동자 '보호'를 말하고 있다. 협상은 하루라도 빨리 재개돼야 한다.<편집자 주>



지난해 9월 이후 중앙 차원의 노사관계를 지배해 왔던 핵심쟁점은 사회적 대화의 복원과 비정규직 문제의 해법 마련이었다. 민주노총이 사회적 대화와 교섭의 길로 나서기 위해 내부논의에 들어갔고, 정부는 비정규직관련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후 정부와 노동계는 비정규직관련법의 수정범위와 처리방식 및 시기를 놓고 대립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초 전문가들의 기대는 법안에 대한 원만한 타협과 민주노총의 노사정위원회 복귀였으나 지금까지의 결과는 한국노총의 노사정위원회 탈퇴와 법안의 표류이다. 지난해 초 노사정 지도부가 모두 대화지향적인 인사들로 바뀌고 한동안 중앙차원의 대화가 활성화되는 분명한 조짐이 있었기 때문에, 비정규직 문제를 사회적 대화를 통하여 풀어나가고 노사정위원회를 정상화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로 나왔다. 왜인가?

사회적 대화 의제 선택의 오류

필자는 사회적 대화의 의제가 잘못 선택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하듯이 사회적 타협의 성공 여부를 결정짓는 데에는 제도적 요인과 정치적 환경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무엇을 갖고 협의하고 타협할 것이냐 하는 의제 선택의 문제다. 노사정간의 타협에 유리한 의제는 정치적 교환이 가능하고 서로 협력해야만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런 기준으로 보았을 때 비정규직 문제는 사회적 대화 또는 교섭에 매우 적합한 주제이다. 누구나 다 인정하듯이 오늘날의 비정규직 문제는 기업중심으로 운영되는 노사관계의 구조적 한계, 원하청 기업간의 불공정한 거래관계, 80퍼센트 이상의 비정규직이 근무하는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불충분한 근로감독과 사회보험행정서비스, 그리고 기업들의 비정규직 남용 등 우리 경제사회의 여러 문제들이 응축되어 있는 우리 시대 최대의 노동문제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야말로 정부와 노사단체가 문제해결을 위해 타협하고 협력하여 최소한 비정규직 문제 해결의 로드맵이라도 마련해야 할 시기이다.

그런데 정부는 지난해 하반기 비정규직 문제를 사회적 대화의 의제로 삼아 대화의 복원과 비정규직 문제 해결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으려 하기보다 비정규직관련법의 정비에 더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가 2004년 정기국회를 목표로 한 관련법안의 국회제출이었다. 정부법안이 공개되면서부터 그동안 유지되어 왔던 노사정간의 대화와 협력의 기류는 싸늘하게 식어가기 시작하였고 사회적 대화복원의 가능성은 점차 희박해져갔다.

이즈음 정부의 사회적 대화에 대한 열망과 기대는 정권 초기에 비하여 눈에 띠게 약화되어 있었던 것 같다. 노동계 또는 재계의 새로운 이니셔티브가 아니면 사회적 대화의 복원이 쉽지 않아 보였다. 이때 비정규직관련법에 대한 대타협과 사회적 대화의 정상화를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주체는 한국노총이었다.

다른 어떤 '사이드메뉴'도 없었던…

그러나 법안을 놓고 노사정 타협을 시도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더구나 형식으로 보면 법안은 이미 정부의 손을 떠나 국회에 제출돼 있었다. 작년 정기국회와 지난 2월 임시국회까지 법안에 대한 노사정간의 실질적 협의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오히려 노동계는 노사정위원회 정상화를 지렛대로 삼아 법안의 국회처리를 막기에 급급했다.

돌이켜 보면 이 시점에서 노동계가 비정규직 문제를 법개정 이슈로 제한하지 않고 좀더 적극적으로 ‘사회적 교섭전략’의 핵심의제로 들고 나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때마침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적 의제로 부각된 시점에서 법안처리의 유보만을 목표로 할 것이 아니라 비정규직에 관련된 폭넓은 정책이슈들을 제기하여 사회적 공론을 모으고 이를 바탕으로 노사정이 책임지고 해결해야 될 문제들을 정리해 가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었다.

노동계의 선택에 따라 노사정위원회 이외의 대화테이블도 마련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선택을 비교적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주체는 한국노총이었으나 불행히도 이 당시 한국노총지도부는 선거와 내부조직정비에 매여 있었고, 민주노총은 사회적 교섭방침을 둘러싼 내부 논란에 휩싸여 있었다.

비정규직 문제 해법 마련과 사회적 대화의 복원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려는 시도는 4월 임시국회에서 본격화되었다. 비정규법안의 노사정 합의처리를 기대하며 구체적인 협상안을 놓고 실질적인 대화와 교섭이 벌어진 것이다. 4월 협상과정을 주도한 주체는 강력한 타협의지를 보여 왔던 열린우리당과 한국노총이었다.

그러나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다. 협상 당사들의 의지 문제가 아니라 비정규직법안에 대하여 노사가 합의한다는 것 자체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구나 국가인권위원회의 매우 원칙적인 비정규직 보호방안이 제시되면서 노동계의 양보의 폭은 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특히 비정규직을 사용할 때는 특별한 사유가 있어야 한다는 사용사유제한 문제는 비정규직에 대한 기본인식에 직결된 문제로 경총과 민주노총의 선택을 어렵게 하는 쟁점이었다.

이미 ‘96년과 ’98년, 근로시간단축협상 등에서 여러 차례 경험했듯이 법에 대한 명시적 합의는 매우 힘들다. 더구나 이번처럼 다른 어떤 '사이드메뉴'도 없이 단일 사안에 대하여 구체적인 법조문에까지 합의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4월 협상의 실패가 특정 주체의 타협의지 부족이나 협상기술의 미숙 때문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양 노총 연대전략, 노동계의 소득

또 하나 협상의 결과에 영향을 미친 요인을 꼽는다면 협상파트너들 간의 연합전략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바로 한국노총의 철저한 민주노총 연대전략이다. 합의처리에 대한 한국노총 지도부의 강한 집착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민주노총과의 연대의 끈을 놓지 않았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변화이다.

양 노총의 연대전략은 이번 협상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향후 노사관계에도 많은 변화를 몰고 올 수 있는 변수이다. 종래의 패턴대로라면 한국노총만이라도 타협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을 수 있었으나 노동계의 연대가 이런 기대를 좌절시킨 것이다. 앞으로 연대전략이 지속된다면 ‘87년 노사관계 체제’를 규정짓던 두개의 기본질서 중 하나가 해체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양 노총 지도부가 4월 협상을 거치면서 87년 이후 양 노총을 갈라왔던 '투쟁 없는 교섭'과 '교섭 없는 투쟁' 노선에 대하여 서로 반성하고 '투쟁과 교섭의 병행'이라는 하나의 노선으로 연대하는 길을 찾아낸 것은 이번 협상과정에서 얻은 노동계의 큰 소득일 수 있다.

다 지나간 얘기가 되겠지만 만약 법개정과 함께 다른 정책이슈를 협상테이블에 올려만 놓았더라도 좀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을까 한다. 법에 한정된 논의 틀을 벗어나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사회적 교섭’으로 끌어 올리는 일은 노동계와 민주노동당의 몫이었다. 이 경우에는 설사 타협에 이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사회적 대화의 틀이 유지되고 비정규직 양산의 원인과 대책에 관한 사회적 공론과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었을 것이다.

입법논쟁에 휩쓸린 민노당의 전략

이런 기준으로 보면 그동안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민주노동당의 역할이 불충분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비정규직 문제의 성격상 정부의 노력만으로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노사 어느 한 쪽의 정책변화만으로도 개선될 수 없다.

특히 민주노동당에게 비정규직의 이슈는 당의 정체성과 차별성을 부각시킬 수 있는 매우 적절한 정책 사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노동당도 별다른 전략적 판단 없이 노사정간의 입법논쟁에 휩쓸려갔다. 뿐만 아니라 개정안에 대한 입장에서도 비정규직공대위나 노동운동단체와 크게 구분되지 않을 정도의 단순하고 원칙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민주노동당이 제시한 파견근로 금지나 비정규직 사용의 엄격한 제한 등은 대중동원을 위한 슬로건은 될 수 있어도 정책협상이나 사회적 타협안이 되기는 어렵다. 이를 입법화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협상전략을 어떻게 갖고 가느냐는 현실을 변화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요인이 된다. 최근 이에 관한 두 개의 상반된 사례가 있다. 이번 최저임금결정과정에서 노동계가 37.2%의 임금인상을 요구했지만 최저임금은 9.2%로 결정되었듯이 요구수준과 결정내용은 현실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반면 4월 임시국회에서 합의 처리된 최저임금법개정안은 당초 민주노동당 안에는 못 미치지만 많은 최저임금근로자들의 처우개선에 기여하였다.

이러한 실용적 판단과 유연성은 노동조합보다 당에서 더 발휘되어야 할 것이다. 운동 또는 투쟁단계의 요구와 타협을 위한 안은 달라야 한다. 노동조합이 소위 대중적인 압박을 위해 불가피하게 원칙적인 입장을 취한다면 국회에서 당이라도 실현가능한 최대치를 찾아내는 전략적 선택이 있어야 한다. 반대하는 법안을 막아 내는 비토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만 하더라도 노동계의 입장에서는 큰 위안이 되겠지만 비정규직 처우개선을 위해 긍정적인 무엇인가를 해주기 위해서는 당이 정책선택에서 보다 많은 유연성을 발휘했어야 했다.

6월 임시국회의 결과나 최근 노정관계의 경색을 감안할 때 당분간 사회적 대화의 복원이나 비정규직 문제의 해법 마련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는 어려워 보인다. 지금과 같은 결정의 지연상태가 장기화되는 것은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무엇인가 하나씩이라도 시도해 보면서 개선해 나가는 것이 좀더 현실적인 선택이다.

이렇게 보면 비정규지법에 관한 한 6월에는 국회가 최종 결론을 냈어야 한다. 이것은 국회의 권능이기도 하다. 국회가 결정하더라도 어차피 정당 간 협의가 불가피하기 때문에 4월 협상결과가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도 민주노동당의 실력저지가 계속될지는 알 수 없지만 법으로 비정규직보호방안을 만들려고 하는 한 이제까지 제시되었던 협상안 이상을 입법화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그렇다면 선택은 둘 중에 하나다. 입법을 포기하고 정책으로 접근하든가 아니면 법안의 처리이다. 필자의 선택은 법안을 처리하고 정책의 이슈로 옮겨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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