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외환위기를 겪은 이후 노사관계와 노동시장의 가장 큰 이슈가 된 것은 바로 유연화일 것이다.

과학기술과 정보통신의 발달, 경제의 글로벌화로 경쟁이 심화되고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자본은 단기수익과 효율성만을 추구하였으며 장기적 비전과 공동체의 발전은 뒷전으로 한 채 형평과 공정성에 대한 요구는 반시장적이고 세계화에 역행하는 구시대의 이념인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 그 결과 기업은 내부에 돈이 쌓여 있어도 투자를 하지 않고 단기수익만 추구하고 있으며 은행은 생산적 투자보다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가계대출에 전념하여 자금의 흐름을 왜곡시키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경제의 모습은 다양한 측면에서 평가할 수 있겠지만 한마디로 장기적 전망 없이 눈앞의 수익 추구를 위한 제살 깎아먹기에 급급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경제의 흐름이 노동시장에 반영된 것이 바로 유연화이다. 우리나라의 기업은 글로벌경제의 경쟁전략으로 수량적 유연화를 채택하였으며 그 결과가 정규직 노동의 비정규노동으로의 대체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폭증, 그리고 격차의 확대라는 작금의 현실임은 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자본의 유연화전략은 기존의 전통적인 임금과 노동력의 교환이었던 직접적 쌍무적 관계인 고용관계를 삼각관계, 혹은 간접적 관계로 확대시키는 고용파괴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고용계약과 노동에 대한 지휘감독이 분리된 파견노동이나 근로계약기간을 정한 기간제 및 시간제노동, 사용종속관계가 수차례의 단계를 거치는 각종 간접고용, 도급 등의 형태로 위장된 특수고용 등 사용자의 고용유연화를 위한 아이디어와 기발한 발상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발달해가고 있다. 이를 통칭하여 비정규노동이라 하고 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떠한 형태의 고용파괴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이러한 자본의 고용유연화, 고용파괴가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 당장은 불확실한 경제여건 속에서 경쟁에 살아남기 위한 비용절감 전략이자, 급격한 환경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자본의 생존전략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의 측면에서 바라본 일면이다. 노동의 측면에서는 전통적인 노동의 해체라 할 것이다. 노동력과 임금의 일대일 교환관계가 파괴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고용계약의 유일한 형태가 다양화되고 예측하기 어려운 형태로 퍼져가고 있다. 노동조합이 확실한 힘의 우위에 있어서 상황을 주도할 수 있다면 노동의 해체를 제어하고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유연화의 초기단계라면 노동계의 전략은 당연히 전통적 노동을 고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기에는 늦은 감이 있다.

이미 물이 차고 넘쳐버려 넘친 물을 주워 담기에는 늦어버린 것이다. 넘친 물을 담을 수 있는 더 큰 그릇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눈에 보이는 다양한 모습의 비정규 노동을 노동법의 틀 거리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우선적으로 해체된 노동을 복원하려는 노력과 아울러 다양한 형태의 고용을 끌어안아야 한다. 이것이 비정규법안과 특수고용노동자보호입법을 요구하는 이유이다.

또한 노동조합은 전통적인 노동의 틀에서 벗어나 파괴된 노동을 품에 안아야 한다. 기업별노조의 협소한 틀로는 노동의 해체를 막을 수 없다. 소속된 구성원의 이익만을 챙기는 단견은 외환위기 이후 자본의 단기수익 추구와 효율성 중시 경영에 맞장구를 치는 것이나 다름없다.

노동은 본래부터 나보다는 우리, 노동계층 전체 나아가 사회 전체의 이익을 추구해 왔다. 자본이 개별화되고 경쟁이 심화되면서 노동도 갈라지고 쪼개지기 시작한 것이다. 자본은 본질적으로 경쟁을 통해 생존하지만 노동의 분열과 갈등은 죽는 길이나 다름없다. 자본이 유연화를 통해 노리는 것은 노동의 분열과 갈등이다. 자본이 끊임없는 변신을 통해 증식하듯이 노동도 건강한 생명력을 유지하며 자본에 대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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