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의 사고로 작고하기 며칠 전, 구본주 작가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이런 말을 했다. “다음 개인전에서는 자본주의의 본질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작업을 하려고 한다.” 그는 이어서 구체적인 작업 계획을 밝히면서 자신의 초기작에서 보여주었던 ‘계급투쟁’의 관점을 되살려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으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지금 그를 떠나보낸 우리들 앞에 구본주가 그토록 넘어서고자 했던 자본의 논리가 그 자신의 죽음 이후 예술의 가치를 무시하는 하나의 사건으로 구체화하여 우리들 앞에 현실로 다가왔다.


삼성화재가 바라보는 고(故) 구본주의 죽음

이 사건을 벌인 주체는 삼성화재이다. 우리나라에는 삼성이라는 큰집의 울타리 안에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삼성화재는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크다는 그 집, 삼성가족의 한 계열사이다. 삼성그룹이 얼마나 굵직하게 문화귀족 브랜드를 앞세워 기업 이미지를 높여왔는가? 그런데 계열사 삼성화재는 예술가의 정년 운운하면서 교통사고에 의한 젊은 예술가 사망사건의 배상금을 줄이려는 소송을 벌여 ‘예술의 가치를 백안시한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지금 삼성화재는 전도유망한 한 예술가를 잃고 어느덧 2주기를 맞이하고 있는 이들에게, 아픈 상처를 묻어두고 새 삶을 꾸려나가고 있는 이들에게 심각한 마음의 상처를 안겨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예술인이 우리사회에서 어떤 존재들인지를 심난하게 자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았다. 지금 예술인들은 구본주를 기리는 사람들의 마음들을 모아서 예술인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빽빽한 빌딩 숲이 이어지는 시청옆, 롯데호텔 맞은편 을지로 삼성화재 건물 앞에서는 지난 7월 4일 이후 매일 낮12부터 1시까지 일인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조각가 고 구본주 소송(삼성화재) 해결을 위한 예술인 대책위원회(가칭, 이하 대책위)’에서 꾸리고 있는 일이다. 시위 참여자들의 몸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진 패널이 결려있다.

“예술가는 정년 제한이 없다. 예술의 가치를 백안시하는 삼성화재의 추악함을 규탄한다!” “불꽃같은 예술혼을 불태우다 불의의 사고로 별이 되어버린 故 구본주의 영혼을 욕되게 하지 말라!” “삼성화재는 화폐, 정치 권력의 추악한 가면으로 사회공헌 구호 겉포장 말라!” ‘백안시’라는 말이 나왔다. “백안-시(白眼視)[명사][하다형 타동사] 업신여기거나 냉대하여 흘겨봄. ↔청안시(靑眼視)”. 삼성화재가 예술의 가치를 업신여기거나 냉대하여 흘겨보고 있다는 얘기다.

일인시위 현장은 사뭇 긴장감이 흐른다. 첫날에는 삼성화재 직원들이 연신 현장을 오가며 보도와 건물 사유지인 앞마당의 경계를 갈라서 자기 집 앞마당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는 주문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어떤 직원은 지속적으로 동태를 살피며 시위자를 카메라에 담아두기도 하고, 이번 일의 담당자라며 시위 진행자에게 대화제의를 하기도 했다. 시위 나흘째 KBS 뉴스 카메라가 다녀간 후에는 좀 더 적극적인 대화 제의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역시 기업의 이미지 관리에 만전을 기하는 초일류기업 삼성다운 발 빠른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거리를 지나는 시민들은 시위 문구를 유심히 읽기도 하고, 문건을 건네는 대책위 활동가에게 “이메일로 이번 일에 대한 소식을 받아 보았다거나, ‘어제 받은 문건 읽어봤는데, 구구절절 옳은 소리를 잘 정리했다”고 한다.

구본주는 2003년 9월29일 새벽에 포천에서 밤길을 가다가 가해자가 몰던 차량에 치어서 목숨을 잃었다. 교통사고 사망사건은 가해자측의 자동차보험회사와 손해배상청구소송을 거쳐 보상금을 받는다. 사고 이후 1년 반 동안의 소송을 거쳐서 올해 봄에 법원은 원고일부승소 판결을 내렸다고 한다. 법원이 손해배상액을 산정한 근거는 피해자 과실 범위는 25% 미만이며, 그의 정년을 65세까지로 인정했으며, 2003년 노동부 발간 ‘임금구조 기본통계 조사보고서’ 상의 예술 전문가로서 5~9년의 경력을 인정했다고 한다. 위의 판결은 유가족의 손해배상 청구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삼성화재는 이 판결에 대해 유가족을 상대로 다시 소송을 걸었다.

삼성화재는 ‘피해자 과실 범위 70%, 가동 연한(정년) 60세, 경력 불인정, 소득 불인정, 무직자에 준한 배상’ 등의 논리에 입각하고 있다. 이에 대해 대책위 측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크게 반발하고 있다. 그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삼성화재는 첫째, 사람을 치어 죽였으며, 운전 부주위로 몇 천 만원에 이르는 벌금을 받은 바 있는 가해자를 모범운전수로 둔갑시키고, 무단횡단 운운하며 오히려 피해자의 과실로 몰아가며, 교통사고 자체를 왜곡시키고 있다. 둘째, 예술계에서는 원심에서 인정한 정년 65세도 문제가 있다고 보고 있는데, 하물며 60세로 줄여 5년에 해당되는 배상금을 덜 지급하려 하고 있다. 셋째, 삼성화재에서 내세우고 있는 ‘도시일용노임’에 준한 산정이란 결국 조각가인 피해자의 예술 경력과 수입을 인정할 수 없으니 ‘무직자’로 처리하겠다는 것이다(이 경우 법원은 무직자를 도시일용노임 정도 버는 것으로 인정한다).


자본, 하얀 눈으로 예술을 보다


삼성화재가 예술의 가치를 ‘백안시’한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결국 그것은 강제보험으로 정해져있는 자동차보험의 공익적인 목적은 도외시한 데 있다.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논리에 충실한 나머지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구본주의 예술적 가치를 짓밟는 어리석음을 범했기 때문이다. 삼성화재는 이번 사건과 비슷한 사건이 났을 때 자신들에게 유리한 전례를 남기고자 구본주 유족을 상대로 소송을 벌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번 사건은 단순히 구본주 작가 한 사람의 일이 아니라, 이 땅의 예술가 모두에게 해당하는 사건이며, 나아가 무직자와 비정규 임금노동자에게도 해당하는 일이다. 자동차보험이란 단순히 사기업의 이윤창출만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언제 발생할지 모를 사고를 대비해서 모든 잠정적 가해자와 피해자를 위해서 만든 공익적인 장치이기 때문이다.

‘찬타(dczume)’라는 닉네임을 쓴 한 네티즌은 ‘삼성화재의 고 구본주 소송 사건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이 사건의 본질을 갈파하고 있다. “이 보험이 강제보험인 까닭은 교통사고로 인한 불상사에서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부분을 국가의 이름으로 책임져 줄 테니 대신 평소에 조금씩 나누어 내자는 사회보험의 성격을 지닙니다.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불의의 사고로부터 지켜주겠다는 것이죠. 그러니 보험회사는 이 목적에 준하여 피해자의 가치를 정당하게 평가하고 배상해야 합니다. 자동차보험이 강제보험인 이상, 보험회사는 자기 이익과 자본의 논리를 앞세워 피해자의 가치를 낮게 평가해선 안 되는 것이죠. 이런 강제보험을 가지고 삼성화재는 보험의 취지를 묵살하고 자신의 이익을 앞세워 피해자에 관한 모든 가치를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부정하는데 이어, 사건 자체를 왜곡하려는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원심에 이어 항소까지 하면서 말이죠.”

사건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있는 네티즌의 일성은 이렇게 이어진다. “삼성화재는 자기 이익만을 앞세워 사건을 왜곡시키고 피해자의 가치를 무로 돌리려는 소송을 즉각 중단하라! 자동차보험의 공적 책임을 방기하고, 자기만의 이익을 위해 자행하고 있는 이번 소송은 삼성이라는 거대 자본이 개인에게 행하는 폭력이다.”

구본주의 작품에 등장하는 ‘미스터 리’와 같이 평범한 샐러리맨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이번 사건의 본질을 ‘한 개인에 대한 거대 자본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규정했다. ‘길을 가다 교통사고로 명을 달리한 한 사람을 상대로 자본이 자기 증식을 위해 무슨 짓을, 어디까지 저지를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 주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한국문화정책연구소의 정이담 소장은 대책위 블로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예술가의 사회적 존재방식(직업), 예술가의 작업(노동)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토대, 예술활동의 시한(이른바 정년) 등등 여러 복잡한 문제들이 공식적으로 논의되었으면 합니다. 하여 이 문제는 구본주라는 한 탁월한 예술가의 특수한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이 사회에서 모든 예술가가 겪을 수밖에 없는 일반적인 문제로 확대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술노동을 바라보는 자본의 눈은 하얀 눈, 백안(白眼)이다. 검은 눈동자로 직시해야할 예술노동을 바라보는 그들 자본의 눈동자는 명확한 초점 없이 위로 아래로 옆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러한 눈으로는 예술가들의 예술노동을 정당하게 평가할 수 없다. 예술이야말로 노동하는 인간의 다양한 행위들 가운데 가장 높은 숙련도와 정신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그런데도 무직자 또는 일용직노동자 운운하며 그 가치를 폄하하려고 하는 것인가. 나아가 도대체 정규직 노동자를 제외한 무직자나 일용직노동자의 인권을 어떻게 보고 있길래 이렇듯 하얀 눈을 들이대며 예술노동의 가치를 폄하하는 비교 수준으로 그들 무직자나 일용직노동자를 입에 담고 있는가.

이토록 험악한 자본주의 세상에 대해 고인 구본주는 말이 없고, 아직도 살아갈 날이 남아있는 이들은 할 말을 잃는다. 내가 아는 ‘문화명가’ 삼성은 적어도 이토록 처참하게 예술의 가치를 짓밟는 야만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무노조 경영의 야만성도 모자라서 이제는 그토록 공을 들였던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추악한 본질을 드러내려는 것인가.

심난한 파멸의 논리가 아닐 수 없다. 첨단의 자본주의 사회를 향해 내달음질하는 한국 사회에 발붙이고 사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써 삼성에 묻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규직 임금노동자로 살아가지 않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나약한 개인들은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이렇듯 냉엄한 임금노동자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이토록 철저하게 기업의 이윤추구 논리에 의해 예술의 가치가 무시되는 세상에서, 예술가는 어떠한 조건 속에서 그 의미를 만들며 예술가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겠는가.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