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2위의 일본경제가 있기까지 일본인들이 가장 고마워 하는 역사적인 경제이벤트는 맥아더 군정의 일본 재벌해체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원자탄으로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미국이 일본경제를 파탄시키고 일본의 경쟁력을 아예 말살시키려 한다고 분개했던 일본인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문어발식 선단경영 대신 기업별로 전문화가 가속화하었고, 지급보증과 지분소유로 얽혀 있던 계열사들도 시장의 수요에 따른 정보·지식의 공유 연합체로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게된 것이다. 미국경제야 1900년대 초부터 소유와 경영의 분리에 의한 선진 기업경영을 해 왔으니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한국은 어떠한가? IMF를 불과 몇 년 전에 겪고도, 과거 개발경제시대에 묵과되었던 오너그룹의 전횡, 시장을 무시한 계열사 불법지원, 주주들의 권익을 거리낌없이 침해하는 기업경영이 횡행하고 있다. 비상장 계열기업의 오너지분을 뻥튀기해서 사주질 않나, 5년 전 반도체경기 호황 때 수천억원을 부실 계열사들에 지원해서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기업이 올해 사상 최대의 흑자를 내자 똑같은 짓을 되풀이 하고 있다. 업계 최고 배당을 하겠다고 공언했던 대형 증권사들이 주주총회에서 배당액을 3분의 1로 낮춰 버리고도 태연하다.

최근 정부는 기업지배구조 개혁의 일환으로 오래 전부터 검토해 왔던 주주 집단소송제와 집중투표제의 도입에 대해 여당 및 재계와 협의 중이라고 한다. 재계에서는 집중투표제는 어불성설이고 집단소송제도 시기상조라고 펄쩍 뛰고 있다. 조금도 놀랍지 않은 일이다. 집주인이 고양이를 들여놓는 것에 찬성할 쥐들이 세상에 어디있겠는가? 놀라운 것은 쥐들에게 한 번 물어보고서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선 집주인(정부)과 자기 당 총재가 재벌개혁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해왔음에도 정부의 발을 넌지시 걸며 재계의 손을 들어 주고 있는 집권여당이다.

재계의 주장대로 집중투표제가 도입돼 기업 오너들이 기업의 공개를 피하려 한다면 그냥 피하게 두면 될 것이다. 정부는 단지 불투명한 경영으로 인한 자본조달시장에서의 불이익만 늘리면 될 것이다. 주주 집단소송이 도입되면 소액주주와 기업 간의 소송이 늘어나서 기업의 비용이 증가하고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주장한다. 물론 소송은 지금보다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늘어나는 소송 때문에 기업이 문을 닫아야 한다면 세계 1위의 경제력을 자랑하는 미국의 기업들은 일찌감치 문을 닫았어야 한다.

필자는 지난 2월 한 재벌계열사의 주주총회에 참석했었다. 97년 거의 부도 위기에 몰렸던 이 회사는 98년 회사를 살리기 위한 유상증자를 하면서 증자에 참여하는 주주들에게 향후 발생하는 순이익의 30%를 주주들에게 배당하겠다고 공시했다.

하지만 주총에서의 배당안은 순이익의 3%였다. 필자가 이의를 제기하자, 투표가 있었고 결과는 234대1로 필자의 패배였다. 이어서 임기가 만료된 그룹 회장의 이사 재선임안이 상정되었다. 필자는 지난 1년간 이사회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은 회장의 이사 재선임의 부당성을 제기했고, 결과는 역시 234대1이었다. 주주의 고유 권한인 이사회 의사록 열람마저도 거부당했다. 이러고도 집단투표제가 어불성설이고 집단소송제는 시기상조인가?

주주 집단소송제도나 집중투표제는 투명한 경영을 하고 주주의 권익을 중시하는 건전한 기업들이라면 반대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제도이다. 마치 세금을 제대로 내는 기업들이 국세청을 두려워 하지 않고, 법을 지키는 시민이 법원을 무서워 할 이유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입에 쓴 약이 몸에는 좋다고, 주주 집단소송제와 집단투표제의 정착은 구미 선진국들이 100여년 전부터 실천해 온 기업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단시일 내에 가속화할 한국경제의 ‘가려진 은총(blessing in disguise)’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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