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문학상을 공모하는 중이다. 공모 내용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들의 진정한 삶의 영역을 넓히는 토대를 마련하고자 제정된 전태일문학상이 올해로 14회 째를 맞이합니다.……불의한 세계에 맞서며 낮은 곳과 연대하는 정신이 담긴 문학작품을 기다립니다.”

‘일하는 사람들의 삶의 영역을 넓힌다’는 전태일문학상이 지금은 많이 바뀌었지만 문학상을 공모하는데 여전히 시나 소설보다도 노동자들이 쓰는 쉽게 쓸 수 있는 생활글은 그렇게 높이 쳐주지 않는다. 차례를 늘어놓은 것부터 그렇다. 시, 소설, 그리고 생활글이다. 그리고 수상 작품집이 나오면 책 제목은 대개 시 제목이나 소설 제목에서 따온다.

사실 생활글이라는 갈래는 나온 지 얼마 되지 않는다. 돌아가신 이오덕 선생님이 ‘일하는 사람들이 글을 써야 한다’고 주장한 뒤 글짓기라는 말보다 글쓰기라는 말이 널리 쓰였고, 전태일 문학상에도 1997년 제7회 때부터 ‘글쓰기부문’을 새로 만들었다.

그 해 현대중공업에 다니던 이재관이 골리앗 투쟁으로 감옥 생활을 한 경험을 글로 써서 ‘글쓰기부문’에 당선작으로 뽑혀 수상작품집 제목에 처음으로 <왈왈이들의 합창>이 들어갔다. 1998년 제8회 때는 작품수상집이 두 권 나왔다. '전일본군위안부 김윤심할머니 수기'가 ‘생활글 기록문’으로 당선돼 수상작품집에 <부끄러운 건 우리가 아니고 너희다>라는 제목으로 올랐고 또 한 권은 소설 제목인 <사람 발자국에 머물다>로 나왔다. 그 뒤 제9회 때도 수상작품집이 두 권 나왔는데 첫째 권 <내안에 살아있는 사랑에 대하여>라는 시 제목으로 나왔고 둘째 권은 <어머니와 나>라는 생활글이 제목으로 나왔다.

그 뒤 전태일 문학상 수상작품집을 보면 제10회는 시 제목 <실업일기>, 제11회는 소설 제목 <제 5병동>, 제12회는 소설 제목 <너의 이름은 희망이다>, 그리고 지난해 2004년에도 소설 제목을 따서 <기차, 언제나 빛을 향해 경적을 울리다>로 나왔다. 이렇게 책 제목으로 시나 소설 제목을 써서 생활글은 조금 가치가 낮은 갈래로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요즘 노동자들이 쓰는 시는 옛날 교과서에서 배운 아름다운 낱말만 늘어놓은 시가 아니라 정말로 우리 노동자들의 삶의 애환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시들이 많다. 서정홍의 <58년 개띠>나 안윤길의 <배 만드는 사람들>, ‘해방글터’의 수많은 시들은 이제 시가 시답잖은 먹물들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문제는 소설이다. 이 소설도 역시 옛날 허무맹랑한 소설에서 이제 민중들의 삶을 보여주는 소설이 많이 나왔다. 제8회 전태일 문학상에 당선된 한웅구의 <사람, 발자국에 머물다>도 1961년 5.16 군사반란 때부터 1980년 광주항쟁에 이르는 민중들의 밑바닥 생활을 그린 소설이다. 하지만 이런 소설은 사실 아무나 쓸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한웅구도 법대를 다닌 지식노동자이다. 우리 노동자들도 선생님들이나 금융노동자들처럼 배운 지식 노동자들도 있지만 아무래도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몸으로 때우는 공장노동자들이 많다. 새벽에 나가 저녁 늦게 들어오는, 정말로 힘들게 몸으로 일하는 그런 노동자들이 이런 소설을 쓴다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다.

결론을 말하자면 우리 노동자들은 ‘지어내는’ 소설을 써야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일하는 현장의 경험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생활글만 써도 한도 끝도 없는데 소설부문을 만들어 ‘글’하면 ‘문단에 등단한다’는 허황된 꿈을 가지는 노동자들이 없어져야 한다. 이 소설부문은 전태일 문학상 공모에서 빼거나 특별상으로 따로 빼야 한다.

언젠가 라디오 프로그램에 한번 나간 적이 있다. 소설가였던 진행자가 나한테 이제 소설을 한번 써 보는 게 어떠냐고 묻기에 ‘내가 일하면서 겪는 일만 써도 평생을 써도 모자랄 텐데 뭐하러 지어서 글을 쓸 필요가 있는가’ 하고 물었다. 그렇다. 노동자들이 쓰는 글은 자신의 삶을 가꾸고 자신의 열악한 현장을 고발하고 노동자들의 삶을 보여주고 수구 지식인들을 ‘세뇌’시키는 글이어야 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노동자들이 쓰는 생활글, 그것이 노동자문학의 중심이 돼야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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