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중 인공 때 이야기가 가장 재미났다. 향리에서는 6·25를 인공이라고 했다. 장총을 멘 문관씨가 총질을 하며 쫓아오는 사람들을 피해 이 산에 붙었는가 싶으면 어느새 들판 건너 저 산에 올라 소리를 치고, 마을 뒤 뽀깨산 밑을 지나가더라는 말이 도는가 했는데 그날 저녁 월출산 지리산에 가 있었다는 둥 반쯤은 인공 때 사람들을 홍길동이로 둔갑시켜 마을 아이들이 배고픔을 잊게끔 하는 솜씨가 여간 아니었다.
그는 책 한 줄 안 보고도 잘도 알았다. 그는 글을 몰랐다. 학교 앞에는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진짜 알짜배기 무학이었다. 이야기의 칠할은 그래도 말 그대로 일자무식인 그에게서 배운 셈이었다.
향리를 떠나 항구도시로 배우러 나갔을 때 선창에서 한 사내를 만났다. 사내의 이름은 멜라콩이었다. 만났다고는 하지만 그와 댓거리를 건네 보거나 했다는 건 아니다. 한낱 그는 넝마주이였다. 멜라콩이라는 말뜻을 물을라치면 어른들은 "멜라콩이 걍 멜라콩이제"라고 할 뿐이었다.
멜라콩은 세상 모든 잡스런 일에 끼여들고 부질없이 신청했다. 울고 가는 사람 못 보고, 싸우는 사람 보면 날을 새워서라도 말려 기어이 화해를 붙이고, 초상 치르는 집이라면 빠지질 않고 나타나 배다른 자식 애비 섬기듯 알아서 손을 내주고, 기차에서 내려 무거운 짐 지고 가는 어른만 나타나면 대신 짐을 져다주고서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그에게 멜라콩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뭐 하려고'가 이윽고 멜라콩이 된 셈이었다.
그가 넝마일을 하는 역에서 항구로 나가려면 건너야 하는 수채도랑은 비만 오면 한강이 되곤 했다. 멜라콩은 다리를 놓아달라고 시청에 청을 넣고 사정을 해보았지만 끝내 소용이 닿질 않았다. 사람들은 말했다. 뭐 할라고 저런 짓거리를 할까, 잉. 이에 그는 자신이 넝마로 모은 것을 밑돈으로 마침내 다리를 반나마 만들었다.
그걸 본 사람들이 이윽고 나서서 나머지를 보태 마침내 작은 다리가 역 옆에 생겨났다. 다리이름은 물론 멜라콩다리였다. 그를 아는 사람 가운데 세상을 향해 일하는 모양새며 갖춤을 그에게서 배운 사람이 결코 적지 않으리라 여긴다. 멜라콩다리 밑으로 흐르는 구정물은 지금도 그 이야기로 흘러가리라.
서울에 와서 먹고살 것 없이 시난고난 하다가 청계천 어귀에 가까스로 포장마차를 들이밀고 잔술이나 판 적이 있었다. 아들 또래 청년이 거리에서 장사를 하겠다고 나서자 아주머니들이 밉지 않게 봐준 덕이었다. 포장마차 근처에는 헌책방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 중 한 집 아저씨가 무르게 보여 짬이 나면 오가며 비좁은 서점임에도 세를 낸 듯 아예 자리를 잡고 책을 보곤 했다.
주인은 때로 아주 책을 줘버리는 수도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그 뒤로는 책을 사봐야 했다. 책방 앞에는 도장 파는 노점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족히 십년 넘게 주로 막도장을 파오고 있었다. 가장 바쁜 날은 새로 월급을 타는 시다 여공들이 몰려오는 무렵이었다. 그들 틈에서 목도장 하나를 판 적이 있었다. 그가 무심히 말했다.
"전태일이가 공장 다닐 때 도장 많이 팠지. 전태일이가 저어그서 죽었어."
사내가 옹이 박힌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포장마차에서 고작 열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자리였다. 이토록 가까운 곳에서 그가 살고 죽었다니. 그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 가슴 아프거나 안타깝기보다 도리어 왜 반가웠을까. 정녕 살아, 그와 아무런 인연도 맺을 일이 없으리라 여겼을 터이다. 그가 죽은 자리 바로 옆에서 일을 했다니, 그와 식구라도 된 듯, 그와 친구라도 된 양, 그가 생생하게 다가왔다.
그 날 이후 박작대기나 멜라콩이나 다 전태일이었다. 이제 그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리라. 내 친구 전태일 이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