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PDATE : 2019.12.8 일 08:00
상단여백
HOME 칼럼
황토현을 다녀와서
황토현만큼 많은 역사적, 정치사회, 문화 예술적인 용어를 떠오르게 하는 지명은 아마 없을 것이다. 동학농민혁명 동학농민전쟁 죽산 백산 전봉준 녹두장군 파랑새 집강소 최재우 짚신 제폭구민 보국안민 척양척왜 말목장터 남북통일 등 이루다 헤아릴 수 없는 말들이 잘 든 하지감자 알만큼이나 줄줄이 따라나오는 이 거대한(?) 지명은 그러나 녹두장군의 키만큼이나 작은 산이다.

▲ 김용택 시인/교사
시집 <섬진강> <시가 내게로 왔다>, 얼마 전 동시집 <내 똥 내 밥>을 펴냈다.
황톳재라고 불리는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와 이평면 도계리 사이에 있는 이 황톳재의 높이는 고작 해발 40여 미터가 될까말까한 산도 같고 언덕도 같은 땅이다.

이 조그만 땅덩이가, 그러나 이 땅의 영원한 횃불이 되어 꺼질 줄 모르고 역사의 굽이굽이에서 늘 새로운 빛으로 빛을 발하는 것은 아직은 그 땅의 희망과 그 역사적 사명이 완성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땅이 이 겨레의 온 길과 살길과 갈 길을 환하게 비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 제폭구민·보국안민·척양척왜라는 깃발을 내 걸고 봉건지배층을 타도하고 억압받는 민중을 해방시키기 위해 호남창의대를 조직한 농민군은 전봉준을 대장으로 손화중 김개남이 부대장이 되어 서울로 진격하기 위해 1984년 4월 7일 백산에 집결하여 황토현에서 전주 감영군을 격파하였던 것이니 바로 여기가 거기다.

역사의 땅, 아직도 우리 가슴에 살아 숨쉬는 땅, 영원한 빛이 되어 우리 가슴에 타오를 땅, 황토현. 역사에 빚을 진 그 땅의 후예들은 피로 물들었던 그 땅에 기념관을 세우고 비를 세워 그 정신을 영원히 전하려 한다. 그러나 그 땅 언덕에 세워진 기념관은 텅 빈 가옥처럼 어설프기 만하다. 차라리 나는 그 기념관이나 기념물들로 인해 마음이 초라해질 것 같아 돌아서서 끝없이 펼쳐진 '그들의 땅'을 향한다.

소나무 밭이 봉두난발한 전봉준의 검은 머리털처럼 여기저기 듬성듬성 박혀 있는 붉은 땅.
붉은 황토 때문에 자라나는 곡식들이 더욱 더 새파랗게 파르르 눈에 박히는 땅.
붉기 때문에 하얀 눈이 더욱 하얗고 거기 흘렸을 조상들의 피가 더욱 붉었을 땅.

밤을 타고 줄을 지어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횃불을 들고 그 넓은 논과 밭을 밟고 모여들었을 가슴 더운 농군들을 나는 생각한다.

그들의 굳센 의지와 희망이 그들의 두려움보다 컸을 것을 생각하면 걷다가도 문득 서서 옷깃을 여미게 하고, 지금 나의 삶을 우리의 현실을 들여다보게 한다. 저 끝없이 펼쳐진 희망의 땅에 그러나 지금 다 늙으신 노인들이 드문드문 힘겨웁게 절망의 모를 그 땅에 꽂는다.

붉은 황토땅을 푸르게 다 덮을 그 때 그 혁명의 꿈은 아직도 저렇게 모처럼 더디게 이 땅에 꽂히는 것일까.

1894년, 안으로는 봉건사회체제를 혁파하고, 밖으로는 외세를 몰아내고 민족의 자존을 지켜내려는 동학농민혁명군의 그 원대하고 희망찬 역사의 횃불은 그것이 역사 속에서뿐만 아니라 당대 사회현실 속에서 우리들의 삶을 더욱 환하게 밝히고 있다는 데에 희망을 걸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황토현은 영원히 미완의 땅, 역사의 땅이다. 황토현에서 6·10 항쟁을 지나, 월드컵까지 숨가쁘게 달려오며 그 빛나는 역사의 얼굴을 확인했던 우리. 황토현은 우리 현실 속에서 그렇게 펄펄 살아 숨쉬는 거대한 우리의 뜨거운 심장이다. 늘 새롭게 빛을 발하는 희망의 언덕인 것이다.

김용택 시인/교사  labortoday@labortoday.co.kr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용택 시인/교사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