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현장을 취재하면서 가장 듣고 싶지 않은 구호가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노동3권 보장하라’ 같은 ‘기본권 보장’에 관한 것들이다. 엄연한 법치국가인데 헌법에서 보장하는 노동3권을, 근로기준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노동자들이 길바닥에 나 앉아 목소리를 높이는 현실은 '암담' 그 자체다.

‘기본권’이 어찌 ‘교섭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데도 ‘생명보호’를 이유로 운전시 안전벨트를 안 매면 벌금을 부과하기까지 하는 ‘친절한’ 국가가, 헌법 위반사항을 제재하지 못한다는 건 아이러니다.

오늘자로 마무리된 3차례 기획연재 <도대체 사용자는 누구냐?>를 놓고 고민하면서도 그랬다. ‘노사관계’란 게 행위주체, 즉 노조와 사용자가 있어야 형성되는 것일 텐데 지금 행정부와 법원은 오히려 간접고용노조의 실질적 사용자를 부정하면서 ‘노사관계’ 형성을 가로막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자연히' 간접고용노동자의 노동3권은 아예 ‘실종’돼 버렸다.

스스로들 ‘헌법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 셈인데, 이유는 하나다.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근로계약관계’가 성립돼 있지 않으면 ‘어떠한’ 경우에도 원청사업주의 노조법상 사용자 지위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계 입장은 180도 달랐다. 보수적이라 평가받는 법학자들도 ‘계약성립 여부’에 치중하는 법원 태도를 비판했는데, 법원은 꿈쩍 않는다. 노동부도 판례경향에서 한 치의 어긋남이 없다.

그나마 최근 노동부가 원청이 하청(파견)노동자들에게 부당노동행위를 했을 때 형법상 ‘공범죄’를 적용하겠다고 한 것이나, 최저임금법에 하수급인(하청)의 노동자에게 최저임금이 지급되지 못할 경우 직상수급인(원청 등)의 연대책임을 묻는 내용을 담은 것은 고무적이다.

그러나 이런 행정조치 등만으로 ‘실질적 사용자’를 가려내긴 어렵다. 핵심은 법원의 태도다. 영화 <펠리컨브리프>를 보면, 환경보호를 고집하는 대법관을 석유업체 로비스트들이 암살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만큼 법원은 이해관계의 최정점에 노출돼 있다는 뜻이다.
법이 도덕보다 현실적으로 더 필요하고 더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우리의 '질서' 관념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법원이 먼저 금도를 보여주는 게 문제를 푸는 가장 빠른 길이 아닐까. '영감님'들께서 근엄하게 방망이를 두드리시기 전에 최소한 한 번만이라도 다음 사실을 기억해주시기를 바란다.

파업 출정식을 하거나 로비 농성을 했다고 '노조법 위반'이 아닌 ‘집시법 위반’으로, "무단 점거’로 잡혀오는 노동자들을, 열흘이 넘게 40m타워크레인, 70m정유탑 위에서 ‘원청인 SK는 즉각 교섭에 나서라"고 요구하며 농성을 하는 노동자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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