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입으로 한 목소리를 낸다. 각자 다른 자리에 선 시각문화예술 분야의 젊은 작가들이 모여서 한목소리를 내겠다는 ‘프로젝트 그룹 이구동성(異口同聲)’. 20대에서 30대에 걸친 이들의 출발은 정치적 진보이념을 토대로 부정의 미학을 가늠하겠다고 하는 야심 찬 행보라는 점에서 각별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들이 첫 번째 프로젝트에서 내건 주제인 ‘난타 U.S.A.’는 ‘생기발랄, 시원통쾌 반미 이야기’라는 슬로건 속에 명쾌하게 드러나듯이 미국을 반대하는 반미(反美)의 입장을 반미학(反美學)의 견지에서 펼쳐 보이려는 예술적 도발로 가득 차있다.

반미(反美), 안티 아메리카(Anti-America). ‘미국을 반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상투적인 정치적인 슬로건인가. 예술 행위의 주제로 끌어들이기에 매우 부담스러운 반미라는 정치적 이슈를 첫 번째 프로젝트로 내건 것을 시작으로 이구동성은 앞으로 동시대의 첨예한 논쟁거리들에 대해 예술가로서의 발언을 감당하는 것을 그 목표로 삼고 있다. 이구동성 그룹의 반미 이야기는 2005년 올해가 해방60주년이자 미군진주 60주년이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들이 60년 된 해묵은 주제인 반미를 ‘001’, 첫 번째 주제로 내 건 것은 여전히 미해결의 과제이며 전세계에서 제국의 패권을 강화하고 있는 아메리카 제국에 관한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효한 것임을 각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60년 전의 그때처럼 미국은 현재까지 강력한 중심이다. 그 중심은 안티를 유발할 개연성을 안고 있는데, 뉴욕대 알론 벤 메어 교수는 아랍권을 비롯한 전세계적인 반미의 요인을 ‘제국주의 이미지와 다른 나라에 대한 오만한 태도, 퇴폐적인 문화와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엄청난 부를 바탕으로 한 과대소비, 이스라엘 편들기, 깡패같은 호전성’ 등으로 분석했다. ‘생기발랄, 시원통쾌하게 반미를 말하자’. 이것이 젊은 예술가 그룹 이구동성의 일성이다. 전시의 기획 단계에서 논의했던 이들의 기획서 가운데 일부를 살펴보면 이들의 출발을 잘 읽을 수 있다.

“60년 동안 반미를 이야기했지만 아직 할 말이 많다. 아직 그들이 이 땅과 민족의 행복한 미래와 우리의 생사여탈권을 강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원조밀가루로 우리를 먹여 살렸으며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구해준 든든한 우방이라는 신화는 깨진지 오래다. 나쁘면 나쁜 것이다. 나쁘지만 무서운 것이라고 말하는 비겁이 국익이라는 거짓말로 우리의 자존심과 생명과 평화를 추악한 전쟁에 내다 바치게 한다. 5000년을 자주권을 지키기 위해 싸워온 민족의 이름으로 오늘의 ‘반미’를 이야기한다. 나에게, 당신에게, 우리에게 대체 미국은 무엇인가? 우리의 반미에너지를 맘껏 발산하자.”

‘반미’ 주제의 상투성을 넘어서

이미 반미는 소수 전위의 전유물이 아니라 다수 대중이 공감하는 대중적 이슈이다.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반미를 이야기하는 시대이다. 촛불의 바다가 미 대사관을 집어삼킬 듯 에워싸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예술가들이 반미를 이야기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와 파장을 가질 것인가. 탈근대적 지형 속에서 시각예술은 여성, 소수자, 인권, 환경이나 생태, 신체 등의 미시적 차원의 담론적 실천과 그 흐름을 같이 해왔다. 한국의 예술가들은 80년대 이래 예술의 탈근대적 패러다임을 꾸준히 축적해 왔으며 컴퓨터와 인터넷의 그물망으로 인해 전혀 다른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시스템 속에서 예술이 감당해야할 역할에 대해서도 새로운 모색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진보적인 예술운동을 아방가르드로서의 예술과 행동주의 예술의 개념으로 전환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예술가들의 반미에 관한 이슈 파이팅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새로운 것, 창의적인 것, 남이 하지 않은 것을 해야 하는 예술가들의 숙명 앞에서 어떻게 하면 동어반복이나 단순한 돌림노래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들이 스스로 천명한 과제도 새로운 태도로 반미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반미를 반미학(反美學, Anti-Aesthetics)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은 이구동성의 숙명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들은 근대 이후 예술의 자율성을 부정하고 삶의 지향을 담은 아방가르드의 정신을 반미학의 이념으로 끌어올리는 예술적 실천에 매우 큰 관심사를 두고 있다. “기성의 미학적 가치를 부정하고 새로운 층위에 예술행위와 예술작품의 가치를 자리매김하게 해야 한다.” 할 포스터의 반미학 논의는 이구동성이 내건 반미라는 주제와 뒤섞여 새로운 전복적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요컨대 아방가르드로서의 예술의 가치와 역할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이들이 펼치는 예술행위는 반미학적인 반미를 구현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구동성의 ‘반미의 반미학’은 전시장과 공원 및 인터넷상에서 각각 다른 방식의 소통을 지향한다. 이번 전시의 출품작가 다수의 주된 관심사는 전시장에서 관객들과 만나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이들이 실내전시를 공원과 인터넷상에서의 전시와 견주어 대등한 것으로 간주하고 전체 프로젝트의 일개요소로 설정해 둔 것은 전시장에서 관객을 만나는 것만을 시각예술 작품의 소통방식으로 생각하는 일반적인 관행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이 전시장에서 관객과 만난다는 것은 관람자 주체와 작가 주체 사이의 적당한 긴장과 교감을 전제로 하는 감상행위를 전제하는 일이다. 따라서 이들이 펼치는 세 꼭지의 기획 가운데 전시장에 출품하는 작품들은 그만큼 전시장이라는 장소 특유의 소통방식과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각별한 장치를 필요로 할 것이다. 실내전시는 전시장 내에서 관람객들을 만날 요량으로 만든 작품들이다. 전시장 중심의 고답적인 범주에 갇힌 예술작품들은 기성의 미학적 범주에 충실한 내용과 형식을 만들어왔다.


그런 점에서 전시장에서의 예술적 소통을 모색하는 이들의 작품이 어떻게 읽힐 것인지 자못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운 예술의 반미학적 가치를 옹호하면서도 전시장이라는 기성의 소통 방식을 따른다는 것은 전복적인 요소와 더불어 역설적인 모순을 동시에 안고 있다. 반미라는 뚜렷한 정치적 이슈를 전시장으로 끌고 들어간다는 것은 그 선명성만큼이나 예술적 교감에 있어서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를 안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정 이슈를 지향하는 회화작업은 ‘평면 위에 모종의 형상을 그려 넣음으로써 시각적 환영을 통해 주제의식을 각성하게 한다’는 기본 구상을 전제하고 있다. 오늘날과 같은 이미지의 과잉 시대에도 여전히 그림을 그리는 주체로서의 화가의 눈길과 손길은 그 어떤 매체보다도 훨씬 매력적인 ‘아트’에 다가서는 방법이다. 이것은 회화야말로 작가 주체의 상상력과 창의력이 가장 확연하게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반미와 같은 주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상투성과 독창성은 그림을 가늠하는 양갈래 길이 아닐 수 없다.

역사는 훗날 이구동성의 ‘반미이야기’를

관람자들의 몫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몇 작품을 언급해보자면,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성조기를 중심으로 한 상투적인 도상들이 많다는 점이다. 민화양식을 차용한 오치근의 그림은 성조기문양의 양과 호랑이를 대비시킨다. 이훈희는 ‘럭셔리한’ 성조기 이미지 위에 낙서를 가미했다. 이해직은 100여명의 평범한 한국사람들을 표적 안에 배치해서 무차별적인 폭력에 노출한 우리의 상황을 그려내고 있다. 이종민은 문자를 동원한 표현적 화화로 M16 소총과 지구, fuck USA 등의 문자를 그려 넣었다. 익숙한 도상을 차용하는 것이 상투성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 작품 하나하나는 화가 주체 하나하나의 눈길과 손길에 의해 완성된 그림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꼼꼼하게 읽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미행정부의 밀실을 담은 듯한 김우성의 이야기 그림과 더불어 반쪽짜리 눈썹을 가진 반미(半眉)의 얼굴이나 반쪽으로 잘린 고양이 꼬리로 반미(半尾)를 이야기하는 김수연의 말장난 반미 작업은 또다른 차원에서 회화의 지시와 상징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회화적 기호의 묘미를 생각해보게 한다. 전진경은 외형을 딴 패널에 아크릴 물감으로 전통 회화의 도상들을 차용한 그림을 그려 넣었다. 정교한 먹 작업 위에 부분적인 붉은 색 이미지를 강렬하게 살려내는 김성건의 먹그림 또한 상투성과 회화성이 뒤섞여 독특한 감성을 전달하고 있다.


성조기는 입체설치 작업에 있어서도 단연 압권을 이루는 ‘위해 대상 1호’이다. 그림공장의 대형평면작업은 성조기와 풀밭을 양쪽 끝에 두고 우렁찬 굉음을 울리며 대지를 짓밟고 지나간 탱크의 캐터필러 자국을 부조로 만들어낸 작업이다. 김주철의 목각채색 작업은 성조기이미지를 변용한 작업이다. 반미를 위한 소도구는 한 둘이 아니다. 거대한 낚시 바늘에 햄버거를 꿰어놓은 오종선의 입체작업이나 한쪽 발을 잃은 구걸하는 아이를 만든 양형규의 작업은 조형방식은 다르지만 내용적 전형성의 다른 면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안택규의 철조용접 작업이나 김용민의 곰팡이 핀 책 부조 작업, 단순화한 인체의 반가사유상을 만든 정재연의 조소작업은 선명성과 구체성을 제1의 요소로 강조하는 전형적인 리얼리즘의 시각을 좀 더 유연하게 넓혀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티셔츠 수 십장을 이어붙이고 몇 군데에다가 혈흔을 남기거나, 만화 이미지의 낱말카드 작업으로 돌려보는 그림이라는 장치를 도입한 김경진. 지푸라기 인형과 촛불의 이미지를 활용한 설치작업을 선보이는 임선아의 작업이 전시장 환경에서 관람객을 만나는 방식을 눈여겨보고 메모해 둔다면 차후의 작업을 위해 유용한 카드가 될 것이다.

야외전시는 입체설치작업을 중심으로 열린 공간에서 만나왔던 신구작들을 선보인다. 이 작품들은 일반적인 입체작업이나 설치개념의 조형작품과는 다른 것들이다. 시의적 쓰임새에 초점을 맞춘 깃발을 비롯한 각종 조형물, 집회나 거리시위의 표현물들이다. 야외전시의 만장이나 걸개그림들은 더욱 더 집요하게 성조기와 자유의 여신상 이미지를 비틀어버리는 방식의 작품들이 등장한다. 성조기와 지구, 비둘기, 탱크, 소총 등의 이미지가 중의적으로 겹쳐진 동상들, 무기나 한반도를 들고 있는 자유의 여신상, 밧줄에 묶인 비둘기 등은 대중적인 도상을 차용한 강렬한 시각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다.

거리시위용 피켓, 가면, 퍼포먼스 의상, 무대미술이나 거리의 설치조형물 등의 조형작업들 또한 이구동성 그룹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십분 발현하는 출품작들이다. 그림공장 홈페이지(www.grimfactory.com)에서는 온라인전시도 열린다. 단편만화, 만평, 카툰, 플래시, 패러디 등의 출품작들은 21세기의 걸개그림이라고 할 만큼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웹상의 시각이미지 소통 상황을 반영하는 항목이다.

이구동성은 지난해부터 토론을 벌이며 전시를 준비해 왔다고 한다. 서울을 시작으로 여러 지역을 순회할 이 프로젝트는 전시장과 공원, 인터넷상에서 관람자와 시민들, 네티즌들을 만나서 각각 다른 방식으로 반미를 이야기할 것이다. 세월이 흐른 뒤 우리가 이구동성을 어떻게 돌아볼 것인가를 상상해 본다면 보다 투명한 마음으로 현재의 이들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앞일을 예견할 수는 없지만 이들의 현재 행보를 일단은 이렇게 적어둘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 초 한반도 남단에서 일군의 젊은 예술가들이 이구동성이라는 그룹을 만들어서 반미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이다. 훗날 우리는 아메리카 제국이 지금과는 다른 위상과 지위를 가지고 있을 때 이구동성의 반미이야기를 다시 기억하는 날을 맞이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 장구한 축선의 한 점에 서서 이들 이구동성을 만나고 있다는 점을 차분하게 새겨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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