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의 최첨단에 광고가 있다. 자본주의 사회를 굴려가는 의사소통의 핵심이 광고이기 때문이다. 시장경제 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가치의 본질을 사용가치보다는 교환가치에 더 크게 둠으로써 재화와 용역의 생산과 유통과 소비를 극대화 한다. 광고는 이러한 시스템의 전위부대이다. 이제 광고는 본연의 알림 기능을 넘어서는 이 시대 최고의 언어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해인 김현숙은 광고라는 사회적 생산물들을 작업의 소재로 삼는 작가이다. 그는 욕망 덩어리들의 총집결판을 광고로 보고 여기에 숨어있는 몸 이미지를 전혀 다른 문맥으로 전환한다. 그는 광고용 엽서나 전단지, 잡지의 광고지면 등에서 보이는 몸 이미지들을 오려서 또 다른 맥락으로 편집한다. 이 과정에서 그만의 독특한 '몸 그래픽'<사진>을 만들어냄으로써 광고의 문맥을 삭제한 해인 내러티브로 재구성 해내고 있다.


잘라 붙인 광고지면의 몸 이미지

해인은 광고이미지를 모아서 어린 시절 종이인형 오리기 하듯 무언가 잘라내는 것으로부터 작업을 시작한다. 그는 붓질보다는 가위질을 먼저 시작하는데, 이는 새로운 이미지를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기성의 이미지를 잘라내는 것으로부터 작업을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르기는 어떤 이미지는 취하고 다른 이미지는 버리는 선택과 배제의 원리에 입각한 작업이다. 여기서 그가 선택하고 배제하는 이미지는 광고지면에 드러나는 맨몸과 상품 이미지로 나뉜다. 특히 그가 몸 전체를 오려내는 것이 아니라 옷이나 구두 등과 같이 몸에 걸치고 있는 상품 이미지들을 배제한 팔이나 다리 등 신체 일부만을 잘라 모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렇듯 그는 여러 광고지면에서 무언가 광고의 대상이 되는 상품이미지를 걷어낸 후 맨몸 이미지들만 가지고 시작한다.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특정 신체 이미지를 장식하거나 변형하고자 하는 욕망을 차단하고 몸 이미지만을 취하는 과정이다.

해인은 잘려나간 몸 조각들을 캔버스 위에 재배치함으로써 독특한 몸 그래픽을 만들어 낸다. 그는 비슷한 크기의 몸 쪼가리들을 동일 패턴으로 반복하여 몸 이미지의 재현 작용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 정도로 색다른 차원의 이미지 전략을 구사한다. 때로는 화면 전체에 빼곡히 몸 조각을 늘어놓음으로써 전면회화를 만들기도 한다.

중심과 주변의 시각적 긴장감을 이용해 시선의 흐름을 이끌기도 하고 적절하게 여백의 미와 전면성을 오가면서 화면의 운율을 이끌어 낸다. 때로는 캔버스 위를 지나간 붓질 자국과 조각난 몸 이미지들 간의 차이를 강조하기도 한다. 반복과 돌출, 여백과 실체, 비례와 불균형 등 시각적 장치들을 최대한 끌어다 쓴 몸 그래픽들이다.

집중과 분산, 응축과 해체는 화면의 긴장감을 고조하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광고이미지를 시각적 게임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주요한 장치이기도 하다. 이러한 조형적 배치 작업은 그 자체로 이미지의 재발견으로 읽히기도 하며, 개별 기호들 간의 시각적 관계망을 형성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는 이러한 작업을 변주의 차원으로도 표현하는데, 해인의 몸 그래픽 변주는 배치된 신체 이미지들의 조형적인 흐름과 궤를 같이하는 붓질을 가미함으로써 단색조를 벗어나기도 한다. 배경으로만 존재하던 붓질이 격렬한 색채와 터치로 그 흔적을 드러내는 회화적 장치로 도입되기도 하며, 몸 이미지들을 따서 상당히 절제된 페인팅의 감각을 도드라져 보이게 하기도 한다.

광고엽서 뭉치를 가지고 만든 오브제 작업은 선택이 아닌 배제의 원칙에 의해 만들어진 작업들이다. 광고엽서를 모으고, 자르고, 붙여서 그 위에 색을 입힘으로써 그가 사용하는 몸 이미지에서 배제된 내용들을 응축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한 번에 약 3백개 정도의 엽서를 한 덩어리로 뭉쳐서 이 엽서 다발을 만든다. 백화점, 극장 거리 등에서 나눠주는 엽서 전단지들을 한 장 한 장 일일이 몸 이미지만 오려내고 나머지 면을 고스란히 쌓아둔다.

이 엽서들을 뭉쳐서 입체를 만들고 다시 백색의 물질 덩어리로 만들어 낸다. 단단한 직육면체의 오브제(대상물)에는 잘라낸 몸 이미지만큼의 여백이 남는다. 엽서덩어리 직육면체의 어느 부분을 잠식해 들어간 이 잘려나간 흔적들은 공간을 형성한다. 그것도 전혀 예측하지 않은 가위질 흔적이므로 조형적으로 배려된 공간이 아니라 노출된 몸 이미지가 만든 공간이다. 이 때 광고의 지시어로 작동하는 텍스트와 이미지들마저 흰색으로 지워져 광고엽서 덩어리는 전혀 새로운 오브제로 다시 태어난다.

광고엽서 블록 작업을 다시 정리해보면, 우선 광고 전단지에 나타난 몸 이미지들을 잘라내고 남은 흔적들을 쌓아놓는다. 둘째는 이들 엽서를 수백장 이어 붙여서 각각 다른 모양의 가위질 흔적이 남아있는 엽서들을 하나의 블록으로 만든다. 셋째는 아크릴 물감을 발라서 광고엽서의 문맥을 완전히 삭제하고 백색의 종이다발로 만들어버린다. 잘려나간 몸 이미지의 흔적과 지워진 광고 텍스트와 이미지들을 뭉쳐놓은 엽서다발 작업을 통해서 해인은 광고라는 현상에 대한 간접적인 위해를 통해서 새로운 차원의 몸 그래픽에 접근하고 있다.

기존의 몸 그래픽이 신체의 재현 이미지들을 재구성하는 방식을 선택함으로써 어쨌든 재현적 신체 이미지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면, 엽서다발 작업은 광고의 재현 기능마저도 최소화함으로써 은폐된 광고의 실체를 더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결과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는 이 작업에서 광고엽서에 백색의 테러를 가하고 있다.

그의 몸 그래픽은 사각프레임의 캔버스를 벗어나 수십점의 아크릴 박스를 뒤덮는 설치작업으로도 변모한다. 36점의 아크릴 박스 몸 그래픽 작업이 그것이다. 투명 비닐 위에 새겨진 아이콘의 반복은 포장지의 전형적인 배치이다. 해인은 이 방법을 이용해서 몸 그래픽을 설치작업으로 변환했다. 사각프레임에 고정된 몸 그래픽은 캔버스라는 고정된 틀과 물감이라는 고정된 매체 속에서 특유의 시각적 환기에 심취하고 몰입해야 하는 작업들이다.

반면 설치작업으로 쓰인 몸 그래픽은 훨씬 자유롭게 의미의 그물망을 벗어나 그야말로 포장지의 일개 이미지에 불과한 것으로 작용한다. 해인이 의도하는 광고용 몸의 문맥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두꺼운 비닐에 붙여진 몸 그래픽이 전시장 천정에서 바닥까지 커튼처럼 드리워진다. 이로써 그는 스스로 설정해왔던 ‘캔버스 위에 사진 꼴라주’(여러 가지 재질이 다른, 때로는 아주 안 어울릴 것 같은, 재료들을 이용해 한 화면에 그림을 표현하는 것)라는 선택으로부터 가볍게 벗어나기도 한다.


시각이미지 게임의 장에서 펼치는 욕망의 탈정치화

해인은 광고의 지면에 모여드는 현대인의 욕망을 해체하고 분산하여 재배치함으로써 욕망의 정치를 탈정치화 하는 몸 그래픽을 제시한다. 그렇다고 해서 해인의 꼴라주 작업이 광고에 대해 일대일 대응방식의 설명적 메시지를 담아내지는 않는다.

그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절단된 신체 이미지들을 가지고 사각프레임의 캔버스 위에서 또 다른 게임을 펼친다. 그 게임은 설명적인 도상배치를 배제한 채 철저하게 시각적 게임의 장으로만 기능한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이상적인 외모에 대한 욕망을 창출’하는 기재로서의 광고에 집중해서 그 이미지를 가지고 놀이를 행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몸 이미지의 재배치 작업을 그래픽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하는 것은 그의 이미지 조합이 재현구조의 내러티브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 꼴라주 작업을 통해서 이처럼 구체적인 내러티브를 배제하고자 하는 작업은 매우 드문 경우이다. 보통의 사진 꼴라주 작업들은 해체된 이미지들을 재결합함으로써 비슷하지만 살짝 꼬여있는 또는 전혀 다른 문맥의 실질적인 내러티브 구조를 만들어 내기 마련이다. 그러나 해인의 꼴라주는 상투적인 재현 구조 속에 갇힌 꼴라주가 아니라 몸 그래픽이라고 불러야할 만큼 다른 차원의 꼴라주라는 것에 특이점이 있다.

몸 그래픽 속에 숨겨진 구조의 비밀을 풀어내는 열쇠는 작가 자신만이 가지고 있겠으나, 작가가 움켜쥔 비밀 열쇠의 일단을 우리는 그의 90년대 페인팅 작업에서 읽어낼 수 있다. 그는 90년대 페인팅 작업에서 캔버스 위에 혼합매체를 사용해서 비정형의 색면을 만드는 작업을 해왔다. 그 색면은 단색으로 처리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하게 얽힌 도상과 문양들, 선과 색의 요소로 가득 차 있는 복잡한 구조의 추상화면이다.

그의 구작 페인팅과 최근작 꼴라주들과 유사한 점은 캔버스의 여백을 주로 무채색의 단색으로 남겨두고 화면의 중심부에 무언가 작업을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전부터 지금까지 그는 흰 캔버스를 대상으로 무언가 붙이고 그리는 과정을 통해서 실효적인 내러티브와는 거리가 있는 추상 또는 반추상의 이미지들을 만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이점이 해인 내러티브의 요체이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화면에 직설화법의 내러티브를 구사하지 않는다. 따라서 광고 속의 몸 이미지를 재배치하여 욕망의 정치를 탈정치화 하려는 해인의 ‘작업의도’와 그것을 재구성하는 비재현적 ‘조형방식’의 차이는 그가 가지고 있는 조형의식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렇다면 그의 의식적인 격렬함과 대비되는 작업 방식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여기서 해인의 작가노트 몇 마디를 윤문하여 문장을 만들어 보았다.

“소비를 산출하는 계층에 대한 정당성 혹은 가치관, 윤리정서를 거스를 수 없이 만든 것이 사회의식의 종속성이다. 사회의 이념과 취향에 저항하거나 충돌하지 않는 소비구조의 충실성이란 무엇인가? 한 시대의 유행 단어를 무작위로 나열하는 광고의 형식은 그 세대의 인식, 감성 체계를 보여줌으로 심리적 공간과 관객의 다양한 기억장치를 자극하여, 취양과 감성 구조가 이성 위주로 변화하게 한다. 대중이 욕망하는 이상적 외모와 환상의 반영과 한편으론 이상적 외모에 대한 욕망 창출이 광고지에 간접적으로 투영되어 있다. 시대와 사회, 경제 여건, 성과 육체와의 개념, 색과 형태의 취향, 남성상과 여성상의 사회적 권력 등이 소비사회를 부추긴다. 남성의 성적 과대망상을 부추기는 사회의 가치관을 읽을 수 있는 단면, 그 단면의 특징을 드러내는 매체의 광고들의 대상을 통한 메시지 전달을 제외한 물체의 모음을 통해 새로운 메시지를 던지고자 한다.”

해인은 드러내놓고 광고지면의 부당한 신체 이미지 왜곡 현상에 대해 비판적 리얼리즘의 입장을 견지하지는 않는다. 이 보다는 화면 안에서, 광고 지면에서 잘라낸 신체 이미지들을 가지고 적절한 시각적 유희를 벌여나가는 데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수많은 광고 조각들을 ‘무작위로 조합’해서 전혀 다른 관계망을 형성해 보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 너무나 익숙하게 배치된 광고의 이미지 정치에 대해 다른 문맥을 형성해 보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가 스스로 말하듯이 익숙한 광고이미지를 ‘개인의 기억을 확인하는 과정에서의 재미’를 찾는 일에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일루전의 단절’이라고 표현하는 가위질이라는 행위는 매우 격렬하게 광고라는 사회적 현상에 대해 위해를 가하는 과격한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선보이는 꼴라주들은 비판의 최전선에서 비켜난 탈정치적인 몸 그래픽이기 때문이다.

해인의 절제된 시각적 표현은 실은 대단히 격렬하고 치밀한 광고에 대한 예술가적 성찰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해인이 놓치지 않고 있는 부분 가운데 하나가 여성의 신체에 가해지는 사회적 폭력에 관한 물음이다. 자본주의의 폭력은 여성의 신체 이미지를 상품 판매를 위한 장치로 인식하고 그 목적을 위해 집요하게 여성 신체 이미지를 조작하고 있다. 그 첨단에 광고가 있다.

해인이 주목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광고 속의 여성의 몸이며, 그의 몸 그래픽 작업은 광고의 배치 구조를 어긋나게 만들기 위한 전략적인 선택인 셈이다. 이렇듯 욕망을 향해 치닫는 자본주의 사회의 커뮤니케이션 코드에 대해 구체적인 개념어를 동원해 날카롭게 분석하고 있는 해인은 몸 그래픽을 통해서는 한발 비켜서는 은유와 상징의 방법으로 또는 그러한 것들마저도 배제한 말 그대로 그래픽 작업으로 차분하게 그러나 맹렬히 일방적인 소통, 폭력으로부터의 이탈을 꿈꾸고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윤활유라고 하는 광고의 전성시대를 살고 있다. 생산의 과잉과 소비의 과잉을 조장하고 촉발하는 광고는 이제 자본주의의 강령에는 충실할지언정 인간의 본성을 왜곡하는 비윤리성을 드러낸 지 이미 오래이다. 잠에서 깨어나 눈만 뜨면 ‘구입하라, 소비하라’고 강요하는 신문과 텔레비전의 광고로부터 시작해서 인터넷에, 라디오에, 도심의 전광판과 광고판, 모든 건물을 도배하고 있는 간판들까지 현대인의 삶은 광고 시스템의 명령체계를 이행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다.


전면적인 반자본의 삶이 불가능한 시대, 누구도 자본주의 사회의 물질문명과 이 풍진 세상의 풍요로움에 관해 온몸으로 거역하지 못하고 사는 세상이다. 혹여 소비사회의 시스템에 도태된 삶일지라도 대부분의 경우 욕망하는 주체는 소비와 존재를 일치시키는 탈현대적 자아에 깊이 빠져있기 마련이다. 해인은 이 틈에서 광고지면에 넘쳐나는 몸 이미지들을 가지고 몸 그래픽을 만들어 내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술의 기능을 두고 유쾌한 반란이라고 얘기하곤 한다. 그의 몸 그래픽이 이 지겨운 광고세상에서 은근한 역전을 꿈꾸게 하는 해인 내러티브를 선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인 김현숙은 1966년에 태어나 경희대학 미술학과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샌프란시스코 미술학교를 졸업했다. 지금까지 세차례 개인전을 열었고, 다수의 국내외 기획전에 참여하면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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