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면 가득 봇물 터지듯이 팥알이 쏟아진다. 생명을 안고 있는 씨앗 그림을 그린 정정엽의 붉은 팥 그림은 한알 한알의 팥알을 그려 넣는 섬세함에 비해 단번에 장쾌한 시각적 쾌감을 선사하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화가 정정엽의 면모가 꼭 그러하다.

미술운동조직가, 여성주의자, 예술 행동주의자(액티비스트) 등의 정체성을 가진 예술가이며, 참여적인 현장미술 프로젝트를 가지고 전시장 바깥의 역동적인 현장을 누비고 다니는 액티비스트 정정엽. 그는 대학졸업 무렵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여성으로서의 삶과 예술을 한데 엮어내기 위해 꾸준히 한 길을 걸어온 페미니스트이다. 또 두렁에서 입김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창작소그룹 활동을 해오면서 조직적인 미술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해온 미술운동가이기도 하다. 정정엽은 그룹활동을 통해서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모색해오면서도 개인 창작의 끈을 팽팽하게 당겨온 예술적 실천가이자 실천적 예술가이다.

전시장과 현장을 분주히 오가는 정정엽의 양수겹장을 통해서 탈근대적 지형의 21세기형 예술가의 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 예술가의 지위를 거리와 전시공간으로 이원화하여 사고하는, 그리하여 전시장에서의 미학적 성취와 거리에서의 공공적인 성취를 갈라놓으려는 낮은 단계의 예술인식들. 정정엽은 점차 그 간극을 메워나가고 있다. 정정엽은 이러한 시대의 대세 속에서 오늘날의 다원적 예술 개념과 제도, 관습에 비추어 새로운 개념의 예술가의 한 유형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여성주의와 행동주의

생명의 메시지를 어루만지는 여성의 힘과 그 힘을 바탕으로 거침없이 내달음치는 행동가로서의 힘. 이 두 가지 힘을 가진 정정엽은 액티비즘과 페미니즘을 동시패션으로 경영하는 예술가로서의 미덕을 깊고 넓게 가지고 있다. 정정엽의 여성주의 미술전략은 20대 중반 이후 노동미술을 하던 시기부터 나타나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그가 자연스럽게 여성주의 미술을 몸에 익힌 것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여성적 자아 찾기와 여성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미술하기’를 실천한 여성미술연구회 활동을 통해서이다. 이 동인들이 8년간 이어나갔던 <여성과 현실전>은 여성으로서의 성 정체성과 사회적 성역할의 문제 등을 고민해온 정정엽에게 자신의 이야기와 어법을 찾아내는 중요한 출구였다. 

‘먼길’은 1920년대부터 1970년대 즈음에 이르기까지 10년 단위로 바뀐 할머니의 이불을 배경에 그려둔 작품이다. 배경의 이불 문양이 담고 있는 세월의 기억이야말로 여성의 삶을 대변하는 아이콘이다. 장롱 속에서 꺼낸 어머니의 이불 같이 세월의 켜를 읽을 수 있는 그림이다. ‘집사람’은 취업 공고판 앞에서 한 아이를 등에 업고 다른 한 아이의 손을 잡고 선 주부의 모습을 잡아냈다. 집사람으로 살아가는 여성의 사회적 무능함을 그는 집사람이라는 개념으로 잡아 이후 일련의 연작을 만들어 낸다. 매일 저녁 같은 시간대에 부천 역곡역으로 쏟아져 나오는 검은 비닐봉지를 든 아줌마들의 일상을 그린 ‘식사준비’(1995)는 살림을 전담하는 여성의 모습을 담고 있다. 매일 밥을 차리는 여성을 담은 ‘밥상’(1995)이라는 작품도 같은 맥락이다.

졸업 후 첫 개인전을 열기까지 여성미술가들과의 동인활동은 정정엽에게 회화의 끈을 잇게 한 중요한 자리였다. 첫 개인전은 단체활동, 결혼, 육아 등을 거친 30대 중반의 나이에 치른 <생명 아우르는 살림전>이었다. 여기서의 ‘살림’이란 여성적 현실이 개인의 실존 한가운데로 들어오면서 몰두한 주제 의식이다. 일상에 갇힌 여성의 삶 속에 담겨있는 현실의 지형을 보여주는 그림들이다.

90년대 중반의 변화된 지형 속에서 여성주의 이슈를 부각시킨 정정엽에게 여성을 그린다는 것은 ‘삶 속에 있는 여성을 그린다’는 것을 의미했다. 민중미술 개념 안에서 나타나는 ‘여성을 대변하는 미술’이 아니라 ‘생활 속의 여성’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망사천에 먹으로 그린 벽으로 걸어 들어가는 여성을 그린 그림 ‘집사람II’ 역시 같은 맥락의 작품이다. ‘유모차를 끌고 가는 아줌마’가 자유로울 수 없는 여성의 전형이듯이, ‘보따리’를 이고 가는 아주머니의 모습에서 하늘을 이고 가는 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세월의 켜를 잡아내는 정정엽은 실체를 그린다기보다는 실존, 특히 여성적 실존을 그리는 화가이다.

몇 차례의 개인전을 거듭하면서 시작한 ‘입김’은 정정엽의 예술활동을 이전의 현장미술운동가에서 20세기 후반의 행동주의 예술가로 바꾸어 놓았다. 이들은 막연한 양성평등주의에서 벗어나 여성주의라는 철학적 외연을 체화시켜나가는 과정을 밟았다. 1994년의 여성미술연구회의 해체는 단체의 속성상 그 역할을 다했다는 판단에 의거한 것이었는데, 이후 몇 년의 공백을 거쳐 다시 단체활동을 시작한 그는 화가 정정엽과 행동주의자 정정엽 사이에서 더욱 단단한 여성주의자로 거듭났다.

입김의 아방궁 프로젝트는 한 마디로 여성들의 미술축제였다. 축제의 놀이개념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미술과 놀이의 결합을 모색했다. 출산과 임신 등 여성들만의 경험을 놀이화한 것이다.


장소를 물색하던 중 가부장 문화의 상징인 종묘공원을 예술적으로 점거하기로 한 것이다. 종묘점거프로젝트에서 이씨 종친회와 유림과 정면충돌했다. 대중과 접점을 형성하기에는 공원이 그만이었고, 게다가 남성중심주의의 중심지에서의 점거 퍼포먼스라니, 대단히 매력적인 일이었다. 종묘공원에 치맛자락이 깃발처럼 휘날리는 풍경을 상상해 보라. 앵그르의 명작 터키탕을 패러디한 작품을 보는 시민들의 시각적 충격은 예상보다 컸다.

결국 전주 이씨와 유림에 의해 행사가 망쳐지는 불상사가 있었고, 긴 법정 투쟁에서 이들 입김은 값진 승리를 얻어냈다. 한국사회에서 가장 금기시되는 것 가운데 하나인 양성평등을 그들의 견지에서 일부분 구체적인 성과로 얻어낸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진정한 액티비스트 페미니즘 미술은 여성을 그리는 게 아니라 남성중심의 무엇을 뒷받침하는 형식을 깨뜨리는 작업이며, 물량주의와 자기과시적 폐쇄구조를 깨뜨리는 것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노동미술과 여성미술 : 두렁에서 입김까지

두렁 이래 입김에 이르기까지 정정엽의 창작소그룹 활동과 여성주의라는 정치적 지향은 그를 구성하는 실존이다. 그는 이러한 삶의 실존적 정체를 작업에 담아내고 있다. 그는 두렁의 신명, 공동체 같은 개념이나 입김의 행동주의, 여성주의 등의 틀로 읽어낼 수 있는 통 큰 작가이다.

정정엽의 예술 세계, 특히 회화 작업들은 다음의 세 가지 키워드를 가지고 있다. 형식적 전형성을 거부한다는 점, 페미니즘 예술을 지향하다는 점, 그리고 포스트 80년대 세대라는 점이 그것이다. 첫째는 특정한 형식적 전형을 만들지 않고서도 평면작업을 지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의 아이콘을 개발하고 줄기차게 반복과 변형을 일삼아서 수십년을 연명하는 형식주의 미술가들의 전형은 정정엽의 작업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그가 심미적 회화성에 무관심하다거나 무감각한 것은 절대 아니다.

둘째는 페미니즘이라는 화두를 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룹활동에서나 개인창작 활동에서나 정정엽을 예술가로 살아가게끔 하는 근본 동력은 자신이 여성이라는 것이다. 여성으로 이땅에서 살아나가고 있다는, 그야말로 리얼한 실존의 문제를 집요하게 작업의 소재와 주제로 채택해왔다. 그의 페미니즘은 어느날 큰 이야기가 실종된 후에 유행처럼 번지던 페미니즘을 ‘나도 한번 해보자’ 하는 식으로 접근한 게 아니다. 대학 시절부터 두렁과 갯꽃, 여성미술연구회, 입김 등의 단체활동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이어오고 있다는 점은 의심할 수 없는 순수성과 헌신성, 진정성을 가지고 있다.

셋째는 민중미술운동가로서 80년대 세대의 정체성을 이어오면서 미술계에서 살아남은 예술가라는 점이다. 어쩌면 민중미술계열의 작가였다는 점은 미술판에서의 명성과 화랑가에서의 현실적 이익에 별 도움이 안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정엽은 자신의 두렁 활동을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으로 소화하고 있으며, 현재의 입김 활동 또한 너무나 자연스럽게 해오고 있다. 이렇듯 단체활동을 거치면서 내공을 쌓아온 그는 여성성과 공공성이라는 화두와 더불어 지역성이라는 화두로 여전히 한국미술계에 새로운 이슈를 던질 수 있는 유력한 문제적 작가로 주목받고 있으며, 특히 행동주의적 시사점을 제시하면서 매우 막중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전형성을 거부하는 여성주의적 행동주의자, 페미낵티비스트(femin-activist) 정정엽. 그는 ‘양다리 작전’으로 ‘미끄러지기 전법’을 구사하는 작가다. 위에서 말한 세 가지 조건들은 정정엽을 욕망하는 미술가이면서 동시에 이지적인 활동가이게 만들고 있다. 그는 우리 사회와 이 시대의 모순 앞에서 여성 특유의 부드러운 힘으로 한길을 내달려온 작가이다. 이러한 작가 상은 사회운동과 미술운동을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는 데에서 벗어나 양다리작전의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제도와 권력으로서의 미술의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는 길. 그것이 바로 두렁 이래 입김에까지 이르는 정정엽의 미술가단체 활동이 안겨준 축복이다. 미술제도의 권력에 굴종하지 않고 개인작업과 단체활동을 병행해나가며, 미학적 진정성과 사회정치적인 발언을 조화시켜 나가는 것. 그것은 자유로운 예술가의 영혼을 지키기 위한 역편향이었는지도 모른다. 작가의 신화 앞에서 무력하게 체제내의 욕망덩어리로 남지 않기 위한 선택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문화식민지 제3세계 한반도 남단에서 태어난 자신의 숙명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며 예술가의 꿈을 키우며 자라난 이율배반적인 상황에서 선진국의 일등국민이 누릴 수 있는 폐쇄적 자기유희의 자리는 없었다. 그것도 남성이 아닌 여성으로서 말이다. 예술가로서 고독하고 가난할 권리가 있는 건 아니지만 비교적 가난에 대해 선택적으로 조율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진 건 이 토대 위에서 작업하겠다는 의미를 지닌다.”

사람됨의 그릇이 크거나 세상을 향해 열린 자세 때문일까? 나는 그것이 정정엽 특유의 양다리 작전에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 이것이야말로 태도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는 뚜렷하게 각인된 전형적인 아이콘을 남기지 않았다. 그 시대에 충실한 삶을 담아왔을 뿐이다. “맑은 태도, 지구적 시야로 바닥에 가까이 있는 것, 허망함을 가지고 노력을 경주하는 것, 자폐 없는 고독, 계급성의 포용력, 단 하나의 작업”…. 작업실의 이러한 메모들에서도 느껴지는 정정엽의 저 야심만만한 양수겹장은 그래서 더욱 더 넓고 깊게 빛을 발한다.
 
정정엽은 1980년대 두렁활동에서부터 최근의 페미니스트 그룹 입김 활동에 이르기까지 노동현장의 참여미술과 행동주의적 퍼포먼스를 통해 활발한 조직 미술운동을 펼쳐왔다. 그리고 살림과 신명의 미학을 중심으로 여성주의 이슈를 다양한 평면회화 작품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특정 양식을 반복하지 않고 다양한 기법과 매체를 사용함으로써 ‘전형성을 거부하는 페미니스트-액티비스트’로 미술계 안팎의 주목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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