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에 20대 청춘을 보낸 사람들에게는 그들만의 독특한 정서가 있다. 예술가에게도 이러한 80년대의 체험은 그것이 삶의 희망이거나 영혼의 상처, 혹은 진보의 희망 사이를 오가며 깊게 새겨겨 있다. 이들은 90년대 들어 작가로서 정체성을 찾아 나서면서 더욱 처절하게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그것을 현재의 삶에 반추하여 미래를 내다보는 거울로 삼는다. 작가 박영균은 80년대 후반에 20대를 보낸 화가로서 끊임없이 자기 정체성을 탐문하고 있다.
 
86학번 김대리가 제 이름을 부르며 우는 소리
 
80년대 민중미술을 총결산했던 전시 <민중미술 15년전>(국립현대미술관, 1994)과 그 이후 90년대 세대들의 리얼리즘 미술을 정리했던 <리얼링15년>(사비나미술관, 2004) 등의 기획전과 단체전에 참여했으며, 네 차례 개인전을 연 나이 마흔의 화가 박영균. 그의 예술가로서의 삶은 80년대 후반 학생운동 시절부터 시작된다.
 
정형화된 노동자, 농민과 더불어 굵은 팔뚝을 내민 학생이 전면에 등장하는 ‘경희대 벽화’(경희대 쪽빛, 1989), 백두산을 배경으로 가슴에 태극기를 두른 김중기와 통일의 꽃 임수경이 등장하는 ‘외대 벽화’(서미련, 1990) 창작에 참여했으며, 저편에서 서성대는 백골단을 짱 보면서 골목 모퉁이에서 벽보를 붙이고 있는 순간의 긴장을 포착한 ‘벽보 선전전’(1990)을 그린 현장미술운동 마지막 세대 박영균.
 
그에게 90년대는, 창작 승리의 원칙으로 현실 비판적이고 현장 참여적인 정치선전미술을 거세게 밀고 나갔던 현장미술의 추억을 뒤로한 채, ‘86학번 김대리’의 비감한 일상을 그려내며 지난 시대에 대한 강박을 토로했던 기나긴 터널이었다.
 
현장미술가 박영균이 경희대 벽화동아리 ‘쪽빛’ 활동 이후, ‘가는 패’를 전신으로 하는 ‘서민미련’의 일원으로 활동을 하다가 수감생활을 한 지 딱 10년이 지났다. 가혹하리만치 냉엄하고 거칠게 자신을 내몰았던 현장미술 활동과 혹독한 수배생활을 경험한 조직미술운동가. 10년의 시간을 두고, 색깔 하나에 섬세하게 신경을 곤두세우며 붓질 하나하나에 영혼을 담아내려하는 그림쟁이로 살아남은 것 자체가 그리 흔치않은 일이다. 그 점에서 화가 박영균을 만난 것은 내심 잔잔한 기쁨이었다.
 
첫 번째 개인전 때 선보였던 ‘86학번 김대리’(1996)는 80년대에 20대를 보낸 60년대 출생의 30대, 이른바 386세대의 정체성을 담은 대표적인 작품이 되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경희대 벽화’가 있다. 우악스러운 인상과 굵은 팔뚝이 인상적인 이 벽화는 수많은 80년대 벽화들 가운데 드물게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는 ‘지난 시대의 유물’이다.
 
잡은 손 놓지 못하는 청년의 의리로 똘똘 뭉쳤던 청춘의 강렬한 기억은 평생을 지배한다고 했다. 90년대의 박영균은 프로파간다(선전)의 짜릿함을 잊지 못하는 열정과 강박으로 가득 차 있다. 노래방에서 야동을 배경으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샛바람에 떨지 마라’를 불러대는 김대리의 모습조차도 일견 정형화된 형상을 벗어난 유머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 뒤에 숨어 있는 비감한 정서를 감출 수는 없었다.
 
김형경의 장편소설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면 운다’(1993)에 등장하는 다섯 명의 청년 가운데 한 사람이 어쩌면 박영균일지도 모른다. 박영균과 같은 대학인 경희대 국문과를 나온 김형경이 쓴 이 소설은 벽화운동를 통해 사회변혁을 꿈꾸었던 ‘민주시화회’라는 미술동아리 동기생들의 이야기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화가 박영균의 청춘 이야기와 닮아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소설의 주인공들은 좌절과 환멸을 상처와 이별로 마무리했지만, 박영균은 10여년의 여정 끝에 제 몫의 삶을 찾아내기 시작했다는 점일 것이다.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면서 운다고 했다. 딱다구리는 ‘딱따구르르’하고, 부엉이는 ‘부엉부엉’하고…. 86학번 김대리가 제 이름을 부르면서 우는 소리를 딱 떨어지는 의성어로 만들 수는 없을까? 잠시 어처구니없는 상상을 해본다. 대신 우리에게는 화가 박영균이 제 이름을 부르며 붓질한 그림들을 마주함으로써 그 소리를 들을 기회가 주어졌다. 그것은 낙관이나 비관, 양자 모두가 쓰잘데기 없는 것이라는 점을 깨우친 사람의 차분한 이야기이다. 또 386세대의 강박을 넘어서서 자신감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며 여유있게 흐느적거리는 콧노래 소리기도 하다. 즉, 그것은 바로 ‘86학번 김대리가 제 이름을 부르며 우는 소리’일 것이다.
 
아파트 거실 안의 살찐 소파
 
2002년에 열린 세 번째 전시에 이르러 화가 박영균은 10년의 곡절들을 담아 유연하게 풀어헤친 후 차곡차곡 정리해낸 살뜰한 느낌을 주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의 실험과 모색이 한결 여유있고 자신감있는 화가 박영균을 낳은 것이다. 그는 그림 속에 ‘86학번 김대리’라는 분신을 확고하게 심어두고 있으면서도 예의 그 강박을 떨쳐내고 있다.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텅 빈 들길을 걸으며 ‘잠수’ 탈 생각을 하다가도, 아파트 거실의 소파에 앉아 게으른 백수의 여유로움을 즐길 수 있는 일상인의 모습을 담아낸 것이 그것이다. 때로는 욕실 거울 앞에서 ‘탕, 거울 속에 입으로만’ 손가락 총질을 해보기도 하고, ‘이번 생’ 작품에서는 친구들이 돌아간 술자리에 소주병을 옆에 두고 엎어져 잠든 지친 생활인으로서의 따뜻함이 묻어나기도 한다.
 
황지우의 시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I’는 한가롭고 게을러 보이는 거실 풍경이다. 가운데 아래쪽의 거실바닥은 노란 선 격자무늬로 단순하게 처리되어 있다. 왼쪽에는 ‘런닝셔츠’에 ‘사각 팬티’만 걸치고 소파 위에 누운 인물이, 오른쪽에는 텅 빈 텔레비전이 배치되어 있다. 묘하게도 마지막 눈길이 오래 머무는 곳은, 과감하고 단순화된 노란 바닥도, 아무런 이미지 없이 하얗게 비어 있는 텔레비전도 아니다. 그렇다고 미묘한 붓질로 그림쟁이로서의 재미를 한껏 구가해낸 인물도 아니다. 희뿌연 실루엣으로 드러난 아파트 베란다 너머의 그 무엇이다. 박영균이 여유를 찾았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장치들을 읽어본 후의 생각이다.
 
텅 빈 거실의 소파를 그리는 화가의 심중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 최근작 소파들은 이전에 비해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다. 이전의 소파 그림들이 실내 공간에서 침윤하고 있는 화가의 정체성을 담은 것이었다면 최근 작품들은 외출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에 그린 신작들 가운데 ‘파랑 기둥이 보이는 방’은 분홍색 침대를 비교적 사실적으로 묘사해놓은 그림으로써 거실 그림의 변화와 박영균식 색채미학의 변주를 예고하고 있다.
 
붉은 색 계열의 단색 톤으로 이루어진 텅 빈 거실의 소파 그림 위에 흰색 선을 어지럽게 흩뿌려 놓은 ‘살찐 소파’는 박영균의 거실 그림이 시적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을 뿐더러 회화에 대한 관심을 대변하는 것임을 잘 보여준다. 이 그림은 단색 톤 안에서도 변화무쌍하고 다양한 색의 맛을 드러냄으로써 그가 일관되게 추구하고 있는 색에 대한 민감한 정서를 추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드리핑 기법으로 흰색 선을 남김으로써 회화적 서정에 관한 그의 관심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동시에 이 그림은 거실 그림이 변주의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형상회화가 동일한 소재를 지속적으로 다룰 때 나타나기 쉬운 매너리즘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인 것으로 보인다.
 

가위질로 현현하는 소비사회의 이데아
 
화가 박영균은 최근에 사진과 동영상 등을 동원함으로써 매체 확장의 측면에서도 상당히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모험에 찬 시도는 화가의 정체성이 부여하는 표현의 한계를 탓하려는 부정의 시각도 없지는 않겠지만, 표현을 위해 매체를 선택하고 매체장악력을 키워간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평면회화를 하는 작가에게 있을 법한 동영상이나 사진 작업에 대한 나름의 스트레스에 대해, 없는 셈 치고 그림만 그린다는 소신으로 일관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박영균의 예술가적 에너지는 새로운 매체에 대해 과감하게 정공법을 택하는 쪽으로 기운 것이다. 오늘날 전방위로 가해지는 시각이미지 정보의 과잉 현상은 평면회화의 진정성을 압도하는 매체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기계조작이나 디지털이미지 가공 과정을 거쳐서 생산되는 정보가 그림 그리는 사람들에게 가하는 압박은 상상 외로 심난하다. 
 
박영균은 그것을 매우 낮은 단계의 기술력으로 돌파하고 있다는 점이 역설적이다. 그의 도전은 오늘날 시각예술계에서 다루는 미디어아트가 하이테크 기반의 고급한 게임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로우테크’로 무장한 박영균의 사진과 동영상은 자칫 미디어 자체에 매몰되기 쉬운 매체미술의 갑갑함을 훌훌 털어버리고 자유로운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산하고 있다. 

발에 채이는 거리의 이미지에서 우리 사회의 이데아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박영균 같은 예술가의 눈썰미를 통해서 가능할 것이다. 그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몇 번의 가위질로 그럴싸한 예술로 바꿔냈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흔한 이미지를 주워서 적당히 가위질을 한 다음 크게 뻥튀기해서 전시장 벽에 거는 행위. 그를 통해서 이 시대를 읽어내는 예술가적 통찰력의 소유자 박영균은 ‘키치’(kitsch, 조잡한 방법으로 예술의 엄숙주의를 비웃는 표현방식)적 개념미술을 겸비한 리얼리스트로 거듭난다.
 
아파트 분양 광고 전단지의 한 부분을 따서, 스캐너로 긁은 다음 크게 뽑아 전시장에 붙이는 일. 이것이 박영균이 보여주는 디지털 프린트 작업의 전부다. 그린다거나 물성을 변용하는 등의 조형작업을 최소화한 확대복사만이 작가 박영균이 광고 전단지를 보여주는 예술적 행위의 전부다. 광고 행위에 의해 촉발되는 천민자본주의의 허구성을 드러내기 위한 행동이다.
 
새로 시작하는 사람의 모습은 이래서 아름답다. 습관적으로 붓을 들고, 마술에 걸린 듯 붓질을 하며, 직업적으로 그림을 토해내는 화가의 삶이 어느덧 일상의 덫에 갇혀버릴 때, 그 덫을 풀고 스스로 상처를 핥아내며 또 다른 꿈을 꾸는 모습을 보게 된다. 우리는 그 치열한 예술가의 삶에 경의를 표하며 그 영혼의 맑고 깊음에 존경을 보낸다. 박영균이 겪고 있는 변모의 시간은 아마도 이러한 자생과 치유의 시간을 통해서 젊은 날의 높은 꿈을 되짚어보는 과정들일 것이다.
 
이제 그는 창밖으로 눈을 돌려 세상을 담아낼 채비를 마쳤다. 실존적 고독보다 더 깊숙하게 정치적 고립을 감당해야 하는 작가로서의 홀로서기를 모색하며, 웅크리고 앉아 제 이름을 부르며 우는 새처럼 그렇게 텅 빈 거실의 살찐 소파를 그려왔던 박영균. 그에게, 거실을 나서는 김대리는 일상담론으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하는 고뇌와 결단이 낳은 결실이다. 저 푸른 초원 위에는 절대 존재하지 않는 삶의 이데아를 새롭게 읽어내기 위해 그가 만들어낸 그림과 프린트, 움직이는 그림들을 꼼꼼히 둘러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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