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땅, 이상향과 현실, 신령한 초월적 존재와 현세 인간을 이어주는 메신저가 있다. 나무기둥 위에 자유롭게 유영하는 새의 형상을 얹어두는 솟대가 그것이다. 최병수는 솟대를 만드는 설치미술가로 널리 알려졌는데, 그의 솟대 위에는 새 뿐만 아니라 게, 짱둥어, 갯지렁이 등 갯벌의 생명들이 가득하다.
 
정형화된 그 무엇이 있어야 할 자리에 다른 것들을 올려두는 것이다. 이것은 전통사회의 정령신앙을 생명가치로 치환한 최병수 식의 현대미술이다. 이것이 바로 고전을 현대로 이어 새로운 해석을 통해 당대의 맥락으로 전환하는 예술적 힘이 아니겠는가. 해 떨어지는 서해의 붉게 물든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바다 생명체들이 올망졸망 모여 잔치를 벌이는 솟대 작업. 이제 이 한 컷의 이미지는 갤러리뿐만 아니라 환경 관련 다큐멘터리와 잡지 등 언론에 여러 차례 소개되면서 환경운동을 대표하는 사진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엘리트 예술공간을 벗어나 삶의 현장으로
 
예술이 대중과 만나는 곳은 대부분 전시장이나 공연장 같은 엘리트 문화공간이다. 최병수는 엘리트 문화공간을 벗어난 ‘현장의 예술가’이다. 그는 어딜 가든 ‘현장미술가’라는 이름으로 통하는 자타공인의 현장파이다. 현장미술은 전시장 미술과의 다름을 확인하기 위해 생긴 말이다. 작업실에서 그리는 그림들을 갤러리로 옮겨서 일시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식의 일반적인 예술가들의 활동방식과는 다르다는 뜻이다.
 
현장미술은 미술을 요청하는 장소와 시대의 부름에 따라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어떤 방식으로든 예술적 행위를 남기는 일을 말한다. 따라서 그것은 현장에 대해 예술적으로 참여하고 문화적으로 개입하는 방식의 행동주의적 경향을 띈다.
 
직업적 예술가들은, 특히 모더니즘 시대의 예술가들은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만한 근거를 찾지 못하고 스스로 왜소한 ‘예술 그 자체’의 맥락으로 빠져 들어감으로써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러한 비판과 반성의 연장선상에서 생생한 삶의 현장에서 예술적 성취를 얻고자 했던 것이 현장미술이다.
 
최병수가 예술가로 성장한 것은 1980년대의 엄중한 시절에 벌어진 우연한 사건 때문이었다. 벽화를 그리는 화가 친구 옆에서 목수로서 도움을 주던 그는 자연스럽게 벽화의 일부를 그리는 일에도 동참했는데, 당시 통일을 주제로 한 벽화에 대한 당국의 대응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경한 것이었다.
 
최병수를 포함한 미술가들이 연행되었는데, 목수 최병수는 이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미술가의 신분을 확인한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림 그리는 데 동참했기 때문이다. 당시 그가 그린 것은 진달래꽃 몇 개였다. 유명한 1986년의 정릉 벽화 <상생도>에 얽힌 얘기다. 이후 그는 1987년에 연세대학교에서 당시 시위도중 최루탄을 맞고 사망한 이한열 열사가 쓰러지는 장면을 판화에 새겨 현장미술가로서의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며칠 후 그의 목판화는 대형 걸개그림으로 그려져 건물 벽을 휘감았다.
 

 
이후에 그는 수십미터 크기에 달하는 걸개그림 여러 점을 그렸는데, 대표적인 것이 백두산(1988), 노동해방도(1989), 쓰레기들(1990), 장산곶 매(1991) 등이 있다. 걸개그림이란 1980년대에 만들어진 토종 그림이다. 주로 갤러리 벽에 걸리는 액자그림들에 비해서 거대한 규모의 천에 그림을 그려서 건물 외벽에 내다 거는 용도로 고안된 것을 말한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의 건물 외벽이나 무대 뒤편에 커다란 그림을 걸 일이 많았기 때문에 당시의 많은 미술가들은 걸개그림을 통해서 대중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건넬 수 있었다. 이러한 걸개그림은 판화의 강렬한 선들을 사용하거나 전통적인 회화의 기법을 도입해서 독특한 예술적 성취를 얻었으며 한국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미술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아스라이 뒤로 이어지는 대각선 구도의 가파른 산맥의 흐름을 비껴서 날아오르는 한 마리 매를 목판화 기법으로 그려낸 걸개그림 <장산곶 매>를 돌이켜보면 그것은 차라리 아스라이 낭만적 서정으로 다가오기까지 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목판화와 걸개그림의 강렬한 카리스마에 최병수는 굵직한 선을 그어두었다.
 
▲ <장산곶매>.


최병수의 걸개그림이 정치적 쟁점에 머무르지 않았다는 점은 당대의 여러 미술가들 가운데 그를 오랫동안 현장미술가로서의 생명력을 가지게 한 뚜렷한 이유이다. <우리는 당신들을 떠난다>(걸개그림, 1997)는 거대한 고래가 창에 찔려 신음하는 모습에 고래 등을 타고 운집하는 다양한 동물군들을 초현실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배경은 푸른 바다가 아니라 저 멀리 행성의 모습이 보이는 우주 공간이다. 우주를 유영하는 고래의 모습으로 지구를 상징하고 그 위에 생명의 활생을 그려낸 것이다. 치열하고 프로파간다(선동)에 매료되었던 저 80년대의 걸개그림에 비해 90년대 중반 이후의 정서에 맞는 새로운 유형을 찾아 낸 최병수는 확실히 움직이는 현장미술가이다. 그렇다고 그가 세게 나설 때 멈칫거렸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최근에 그는 전쟁이 벌어진 이라크 현지에서 걸개그림을 그릴 정도로 열렬한 평화운동가이기도 하다.
 
그는 그림뿐만 아니라 퍼포먼스와 설치 작업을 병행하면서 동시대 미술의 다양한 요청에 부응했다. 그는 얼음 조각 퍼포먼스로도 유명하다. 여러 환경관련 행사장에서 즉석 퍼포먼스로 얼음조각을 하는 것이다. 전기톱을 이용해 능숙한 솜씨로 얼음을 깎아서 펭귄을 만드는 것인데, 현장에서 녹아내리는 펭귄의 모습을 통해서 지구 온난화로 지구의 냉장고 빙하가 녹아내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행위예술이다.
 
1997년에 있은 일본 기후관련 국제회의 행사장 설치 얼음조각 퍼포먼스 <펭귄이 녹고 있다> 이후 커다란 소음방지용 귀마개를 끼고 얼음을 깎는 최병수의 퍼포먼스는 단골 메뉴가 되었다. ‘지구 반지’는 오랜 동안 구상해온 그만의 프로젝트이다. 지구가 달린 반지 형상을 대형 입체 작업으로 만들기도 하고 무대 배경 그림으로 쓰기도 하며, 때로는 아트상품 아이디어로 제시하기도 한다.
 
투쟁의 현장에서 함께하는 미술가
 
최병수의 걸개그림 연작들 가운데서 유독 환경 관련 이미지들은 그 생명력이 훨씬 길어 보인다. 그는 일찍이 1990년대 초반부터 환경 이슈를 담은 걸개그림들과 퍼포먼스, 무대설치 작업에 관한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브라질 리우환경회의에서 선보인 <쓰레기들>(1992) 이후 그는 최근까지 수많은 국내외 환경관련 현장미술활동을 해왔다. 일본 교토 제3차 세계환경회의에서 선보인 <펭귄이 녹고 있다>(1997)를 비롯해서, 아르헨티나 브에노스아이레스 COP4에서의 <지구반지, 문명의 끝>(1998), 전북 무주에 열린 어린이 환경캠프에서의 <꿩먹고 알먹으면 멸종이다>(1999), <바다로 간 장승>(새만금, 2000), <지구의 날 행사>(광화문, 2000), <어린이날 반딧불 솟대>(용산가족공원, 2000), <무주반딧불이 축제>(2000), 헤이그 COP6(헤이그 기후변화협약 6차 당사국총회에서의 <펭귄이 녹고 있다>(2000), 뉴질랜드에 마오리족과 함께 한 <생명솟대>(2001), 남아프리카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 ‘Rio+10’에서의 <남극이 녹고있다>(2002) 등 무수히 많은 국내외 환경 관련 모임에 현장미술가로 참여해 왔다.
 
이 외에도 그는 ‘골프공화국, 곰 발바닥, 시화호와 정부, 위험한 쓰레기(대만 핵폐기물), 말풍선’ 등 이름만 들어도 환경 관련 주제인 것을 알 수 있는 환경 주제의 현장미술활동을 해왔다. 걸개그림을 비롯해서 입체 설치 작품과 환경운동 집회의 현장전시에 그 누구보다도 빈번하게 참여해온 것이다.
 
현장미술가 최병수에게 환경미술가로서의 지위를 가장 확고하게 다져준 것은 솟대 작업이다. 그가 새만금에 자리 잡고 갯벌 지킴이가 된 것은 2000년 봄에 새만금 간척사업에 반대하는 장승제에 참여하면서부터이다. 70여개의 장승과 솟대를 세운 그 행사를 마친 후 그는 지역주민이 제공한 김공장 건물을 작업실로 사용하면서 부안에 둥지를 튼 환경지킴이로 살아온 것이다. 갯벌이 안고 있는 수많은 생명체의 저 거대한 소우주를 그는 ‘현장미술가 최병수’의 터전으로 삼은 것이다.
 
2002년에는 서울 외곽을 휘돌아 북한산을 관통하는 터널 공사에 반대해 공사장 입구에 망루 설치작업을 하기도 했다. 이 작품 <북한산을 그대로 둬라>(2002)는 ‘NO TUNNEL’이라고 쓴 플래카드를 걸어둔 일종의 설치 작품이다. 그는 그곳에서도 북한산 지킴이 일을 하다가 용역 깡패들에게 기습적인 폭력을 당해 붕대를 칭칭 감고 병원신세를 지기도 했다.
 

 
최병수는 2003년의 교보생명교육문화재단에서 마련한 환경문화상을 받았다. 이 상의 심사위원단은 최병수에 대해 ‘환경을 외부적인 자연에 국한시키지 않고 사회와 인간 모두를 서로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는 문화예술이 지닌 미적 특성을 ‘삶’과 밀착시켜 예술을 더욱 고양된 단계로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20년간 걸어온 이방인의 삶이 환경문화상 대상 수상자로 평가를 받았다는 것은 최병수라는 단단한 차돌맹이의 삶이 뒤늦게나마 우리 사회가 끌어안을 수 있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가치임을 공유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몇 해 전의 짤막한 에피소드는 지금까지도 현장미술가로서의 최병수를 생생하게 떠올리게 한다. 우연한 기회에 그와 잠시 광화문 쪽에 동행할 일이 있었다. 얼떨결에 그를 따라나선 나는 잠깐 동안이었지만 오랜만에 심난한 상황을 접했다. 광화문 앞 정부 종합청사 정문 앞에서 수경 스님이 새만금 살리기를 위한 일인 시위를 하는 현장에 그가 함께 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짱뚱어 솟대를 수경스님 옆에 세워두었다.
 
잠시 후 출동한 제복 입은 사람들은 유명인사 수경스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간섭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최병수의 솟대에 대해서는 완강하게 불허의 입장을 고수했다. 최병수와 그들의 짧지 않은 마찰이 있었다. 순식간에 수 십 명의 사람들에 둘러싸인 그는 거칠게 항의하며 솟대를 지켰다. 숨가쁜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은 그는 끝내 일인시위를 진행하는 시간 동안 짱뚱어 솟대가 수경스님과 함께 서있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나는 현장미술가 최병수의 정체를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어도 자기 삶에 대한 단단한 믿음을 바탕으로 10대 초반부터 삶의 현장을 몸으로 살아온 한 예술가의 거친 숨소리를 나는 잊을 수 없다. 그것은 풀과 꽃을 그리고, 숲과 강을 그리는 유행가 같은 환경미술이 아니라 생명의 문제를 자신의 삶으로 끌어들여 치열한 자기 고백을 토해내는 현장미술의 진한 체취를 담은 한 예술가의 살아 꿈틀거리는 숨소리였기 때문이다.
 
이라크 전쟁이 발발했을 때, 부시 가면을 쓰고 오일 드럼통을 둘러맨 최병수를 촛불집회 현장에서 만난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노동, 환경, 생태, 생명 등의 문제들뿐만 아니라 평화, 민주 등과 같은 우리 사회의 핫이슈들을 그는 항상 자신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예술가로서의 삶을 그렇듯 치열한 현장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지난 가을 위암 판정을 받고 큰 수술을 거쳐 경기도 가평에서 요양 중에 있다. 다행히도 빠른 속도로 건강을 회복하고 있어 머잖아 활동을 재개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홀몸으로 버텨온 40여년의 세월 한구석에 깊은 회한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를 돌보는 따뜻한 손길들이 많다. 새 삶의 희망을 찾아 차돌같이 굳센 삶을 지켜내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시대의 질곡을 나약한 한 개인의 온몸으로 받아들여온 최병수 작가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줄 때이다. 그의 공식 홈페이지(www.jigubanji.com)에 들러 게시판에라도 한 마디 안부를 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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