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가 지나치다 했다. 만약 영화 <그때 그사람들>이 한국 영화사에 남을 흥행기록을 또 한번 세우게 된다면, 그건 순전히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손수 제출해 주신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드님 덕분이다. 거기다 이 영화가 표현한 역사적 문제의식을 높이 사서 작품성까지 인정받게 된다면, 아직도 대한민국 관객들이 영화적 구성과 실제상황을 구별 못할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우매한’ 그들을 과보호를 하고 있는 대한민국 사법부의 혁혁한 공로가 아닐 수 없다.

3일 개봉을 하는 시점에서, 여러 논란과 상관없이 이 영화 자체에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는 베를린 영화제를 앞두고, 상업성과 해외 영화제 진출을 ‘철저하게 고려해’ 만들어졌다.

그 전략적인 영화를 보고 난 뒤 첫 느낌. 아무래도 박지만씨와 대한민국 사법부는 <그때 그사람들>의 제작진에 완패를 당했다.

스크린 밖에서 불거진 ‘박정희 대통령 명예훼손 혐의’를 둘러싼 법적 공방은, 이 영화를 문화가 아닌 정치 뉴스로 뻔질나게 등장시켰고 결과적으로 본의 아니게(?)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박지만씨와 법원은 갈수록 높아지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국민적 열망에 발목을 붙잡는 악역을 담당했고, 약 3분간 분량의 기록영화 부분이 삭제된 상태로 봐야 한다는 것에 자존심 상한 국민들은 법원의 판정에 거세게 항의하면서 서명운동까지 벌이며 영화 수호에 나섰다. 그냥 뒀으면 너무나 평범했을 블랙코미디 영화를 두고 말이다.

영화는 이미 알려진 대로 박정희 대통령 암살사건인 10·26사태를 모티브로 삼고 있다. 당시 대통령을 암살했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백윤식 분)와 그의 오른팔 수하인 중앙정보부 요원 주 과장(한석규 분)을 중심으로, 그 자리에 있었던 주변 인물을 통해 그날의 ‘긴박했던 24시간’을 그리고 있다.

대통령 살해사건 현장에는 다양한 사연과 이유로 그날, 그곳을 지켰던 평범한 사람들이 있었다. 역사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역사의 주인공들이었던 권력 핵심층이 아니라 역사의 수면 밑으로 조용히 사라진 '조연' 혹은 '단역들'이다.
 
그날 현장에는 상관의 명령에 따라 영문도 모른 채 총을 뽑고 사건에 휘말리거나 가담한 중앙정보부 부하들과, 만찬장에 초대된 여자들, 갑작스런 총격전으로 쓰러진 대통령의 경호원들이 있었다. 비번이던 날 운 나쁘게 사건의 현장으로 불려나온 젊은이, 총을 쏠 줄 안다는 이유만으로 차출되어 고개를 돌린 채 총질을 해야 했던 심약한 마음의 부하, 몇학년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예쁜 딸 아이가 있는 경호원 등 ‘그 현장’에 없었다면 그저 평범한 가장이었을 그들. 인생에서 가장 긴 하루였을 10월26일의 24시간을 보낸 그들은 현장에서 죽거나 이후 초스피드로 진행된 재판 과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곧 잊혀졌지만, 영화에서는 그들의 하루를 자세히 보여 주고 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군사문화가 오히려 자신에게 총을 겨누게 되었던 자기모순의 역사에서, 명령과 복종에 익숙한 생활을 했던 소시민인 그들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오늘 내가 해치운다”라고 자신을 따를 것을 명령하면 그의 수하인 주 과장은 “뾰족한 수 있겠어? 오케이!” 해야 하고, 주 과장 밑의 중정 직원들 역시 “까라면 까야지…한 몫 잡을 거라잖아, 과장님이”라며 또 그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소재를 녹일 만한 회심의 ‘한 방’이 없다

현대사에서 무려 18년간이나 지속된 1인독재 시대를 갑작스런 한 밤의 총성으로 끝냈던 이 사건은 소재의 민감함으로 치자면 이만큼 예민한 작품이 없을 것이다. 아직도 미궁에 싸인 ‘그날’이, 권력자들의 암투였건 민주화를 열망하는 거사였건 영화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 역사 자체를 정면으로 응시하기보다는 주변부를 통해 굴곡된 현대사를 풍자하고 있기 때문에 대통령 시해 과정은 좌충우돌하는 코미디에 불과하다. 뚜렷한 역사인식보다는 한 발짝 떨어져 비튼 우화에 가까운 영화다. 역사의 획을 그었던 격동의 하루는 너무나 즉흥적이고 허술하며 인물들은 극단적으로 냉소적이거나 단순하고 사건의 본질에서 저만큼 비켜나 있다.

<처녀들의 저녁식사>, <눈물>, <바람난 가족>을 통해 고정화된 관습이나 가족제도, 성에 대한 고정관념 따위를 통렬하게 비틀면서 표현 자체가 금시기돼 왔던 것들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했던 임상수 감독. 이번에 그는 베일에 가린 10·26이란 매우 민감한 사건을 재료로 삼았지만 어쩐지 그 소재에 비해, 혹은 전작들에 비해 폐부를 찌르는 무언가가 없다. 정치와 시대를 소재로 한 풍자나 우화라면 그 우스꽝스러운 설정 속에서도 마지막에는 쓴 웃음을 지을 수 있는 ‘한방’을 기대하기 마련인데 영화는 시종일관 웃음을 주기는 하지만 소재를 껴안을 만한 ‘쓴 웃음’을 관객에게 선사하지 못하고 말았다.

게다가 초반 박정희의 ‘대단한 성생활’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윤여정씨가 자신의 목소리로 사건 인물들의 최후와 의미를 설명하는 과정은 지나치게 서술적이며 맥이 빠지는 느낌마저 든다.

그렇지만 서슬 퍼렇던 군사독재 정권이 이렇게 희화되는 과정은 그 자체로만도 충분히 유쾌한 볼거리다. 특히 궁정동을 세밀하게 묘사한 세트나 상황에 대한 치밀한 연출은 매우 훌륭하다. 게다가, 개인적으로 10년 전에 너무나 열광적으로 애청했던 주말드라마 <서울의 달>에서 제비족 홍식과 미술선생님으로 등장했던 한석규와 백윤식의 훌륭한 연기를 다시 한 번에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그 사람들>은 1979년 그날을 영화적 소재로 다룬 허구의 영화에 불과하다. 가처분 상영금지 신청이 무색할 정도로 '중차대하며 심각한' 영화가 아니었음에도, 안타깝게도 어떤 도둑의 아들이 ‘제 발 저린’ 탓에 영화의 상당 부분을 관객은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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