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인간의 삶을 보듬어주는 절체절명의 소중한 가치이다. 그 누구도 가족을 쉽사리 부정하지는 못한다. 한 생명을 잉태하고 낳아서 길러내는 소중한 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이 가족이라는 걸 자본과 권력이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우리 귀에 익숙한 ‘또 하나의 가족 삼성’이라는 문구는, 가족 단위의 삶을 파고드는 송곳 같은 광고카피를 너무나 부드럽게 유포하고 있다. 또 가족 모델을 국가 모델로 옮겨 국가체제의 지도자를 한 가족의 아버지처럼 모시도록 하기도 한다. 그 지도자의 아들에게 대를 이어 충성하게 하는 가부장 모델의 국가체제인 것이다.
 
비판적 리얼리스트의 가족 개념 비판
 
‘자본, 국가, 가족’으로 이어지는 주제의식을 통해서 세 차례의 ‘피해보고서’ 시리즈 개인전을 연 이중재 작가는 가족의 문제를 자본과 국가 권력의 문제에 대입해서 바라보는 독특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 자신이 마흔의 나이에도 결혼이라는 가족시스템에 대해 별 계획을 세우지 않거나 못하고 있다는 점도 이러한 시각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아가 세상을 바라보는 비판적 시선의 지점을 ‘거대한 것에서 미세한 것으로’ 옮겨오면서 다시 그 ‘세세함을 가지고 거대한 구조에 접근해’ 들어가는 과정에서 나온 얘기이기도 하다.
 
이중재는 90년대 중반 이후 10년 동안 여러 차례의 개인전과 기획전에 참가하면서 영상설치 작업의 대표적인 작가로 자리잡아왔다. 90년대 중후반의 작품들은 새로운 매체를 이용한 당시 작가들 가운데 발군의 성과로 평가받았으며, 이 속에 비판과 저항의 메시지를 담아왔다. 또한 ‘푸른 사람들’을 통해 창작 소그룹 활동을 펼치면서 1세대 웹 아티스트로도 자리 잡아 왔다.
 
‘www.blupers.com’은 사진, 영상설치, 웹 아트 등이 결합된 푸른 사람들의 사이트로서 웹 아트의 1세대 그룹이다. 플래시나 쇽 웨이브, 자바 등의 툴을 이용한 애니메이션을 비롯해 웹상에서의 이미지나 텍스트를 활용, 자본, 제국, 국가, 여성, 통일, 환경 등 시사적인 이슈에 민감한 인터넷 매체의 특징을 이용한 작업을 펼쳐왔다.
 

 
가족개념을 국가개념과 뒤섞어 놓은 체제를 말하는 ‘가국체제’ 개념은 이중재의 가족 이데올로기 비판의 기본 개념이다. 그는 세 덩어리의 설치작업으로 가족 이데올로기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이중재의 피해보고서 Ⅲ : 로망스-가국家國체제의 파시즘 연구>에서 선보인 작품들을 들여다보자.
 
쓰레기 봉지를 천장에 매달아 공간을 꽉 채운 < Home sweet home >, 유리와 애드벌룬 설치작업인 <스마일-웃어요, 웃어봐요>, 그리고 수십만 마리의 파리를 배양해서 가변적인 이미지를 형성하게 하는 <자본문·제국강·국가속·가족과·파리종>이 그것이다.
 
빡빡한 행복과 살벌한 미소 ‘홈 스위트 홈’ ‘스마일’
 
< Home sweet home >은 한마디로 공간을 꽉 채운 물건들 사이에 좁은 통로를 만들어서 관람객에게 갑갑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전시장 공간을 지배하는 덩어리들과 소리들 가운데 좁은 통로를 만들어 둠으로써 가족주의의 허구를 드러내려는 것이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편히 쉴 곳은 집, 내 집 뿐일세.” 유명한 가사 첫 구절이 강변하고 있듯이 가족 단위로 구성되는 가정은 우리의 휴식공간이며 생산을 위한 재충전의 장으로 기능하는 삶의 터전이다. 이러한 가족의 구성에 대한 이중재의 비판은 가족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가족 체제를 이용하는 국가와 자본의 체계에 대한 비판이다.
 
그는 비닐봉지에 사물들을 가득 채운 후 전시장 천정에 매달아 공간을 빽빽하게 채운다. 사방 공간의 여백 부분만이 좁은 통로로 남고 관객은 그 사이로 겨우 지나다닐 수 있을 뿐이다. 좁은 통로 공간이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이미지이자 실체이다. 전시장에는 300리터짜리 비닐봉지 98개를 채운다. 여기에는 진동모터를 비롯한 여러 장치를 동원해서 사단장의 연설, 부모의 잔소리, 웅성거리는 말소리, 목사의 설교, 미혼모들의 원한 섞인 얘기, 쥐가 찍찍거리는 소리, 거친 숨소리, 웨딩마치, 새마을노래, 수재의연금방송 등 여러 가지 소리가 혼재된 세상의 모습을 담는다.
 
이렇듯 검은 실체들의 가장자리에 비좁게 열린 통로를 따라 관람객의 동선이 구성되고 그 좁은 길은 가족과 국가의 관계를 암시하는 첫 번째 요소로 기능한다. 가족체제로 구성된 사회적 삶의 최소 단위로서의 가정이 담고 있는 허구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좁은 통로로 은유된 가족 안에서(만) 행복을 찾을 수밖에 없는 시스템의 한계가 분명히 보이게 된다.
 
꽉 막힌 공간 가장자리의 좁은 통로를 따라 걸어 나오면 깨진 유리판 위에 서서 애드벌룬을 바라보는 공간으로 이어진다. <스마일-웃어요, 웃어봐요>는 직경 90센티미터의 유리판 70여개를 10여 미터 길이의 바닥에 깔아 둠으로써 깨진 유리를 밟고 서서 저편에 떠있는 스마일 애드벌룬을 바라보도록 한 설치작품이다.
 
6미터 높이의 천정 아래 허공에 떠있는 애드벌룬은 허구로 가득한 행복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이 유리판 위에 서서 스마일 마크가 새겨진 큰 풍선을 바라보게 함으로써 가족주의를 통해 보장되고 있는 행복한 삶에 대해 그 허구성을 상기하게 하는 작품이다. 가족주의를 통한 불안한 행복, 불안한 공공성에 관한 얘기다.
 
가족을 테러하는 이미지 ‘파리가족사진’
 
학창시절 생물시간에 ‘계문강목과속종’으로 이어지는 생물학 분류체계를 들어봤을 것이다. 이중재는 이 체계를 자본주의 사회와 가족으로 연결한다. 곤충을 이용해 가변적으로 형성되는 이미지를 보여주는 설치작업 <자본문門/제국강綱/국가속屬/가족과種/파리종種>은 생물 분류 개념에 ‘자본-제국-국가-가족-파리’를 대입한 것이다.
 
바닥에 웨딩드레스를 깔고, 그 위에 가족사진 이미지에 설탕 등의 유인물로 파리를 꼬이게 만들어서 명암에 따라 파리가 가족사진 형상을 만들게 한 것이다. 종종 지저분하고 잔혹한 이미지들을 사용해온 작가는 이번에는 한국유용곤충연구소의 협찬으로 전시장에서 수십만 마리의 파리를 배양한다. 그 파리들이 가족의 의미를 상징하는 ‘가족사진’을 만든다.
 
소중하고 따뜻한 가족의 이미지는 결국 설탕물에 꼬인 파리 떼에 의해 형성된 이미지처럼 가변적이고 언제든지 해체 가능한 허술한 것임을 드러낸다. 가족체제가 허상이라는 점을 부각하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허구적 실체로서의 가족, 가족의 이미지는 흩어졌다가 다시 꼬이기도 하는 불안한 것이라는 점이 신랄하게 폭로된다.
 
한 개인의 마지막 피난처가 가족이다. 답답하고 꽉 막힌 빡빡한 시스템은 가족 이외의 피난처를 허용하지 않는다. 공동체적 삶의 최소단위를 가족에 환원함으로써 국가와 사회가 분담해야 할 역할을 가족이 대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중재는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꽉 막힌 공간을 제시함으로써 가족주의에 묻혀 공공성이나 사회적 안전망 없이 빡빡하게 짜여진 우리의 삶을 환기시키고 있다.  
 
허공에 붕 뜬 풍선 같은 행복의 허구성을 보여주는 것에서부터 나아가 가족을 통해 보장되는 행복이 허구적이며 가변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파리 떼 설치작업까지. 가족에 대한 이중재의 비판은 어쩌면 독설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이 점에 대해서 이중재는 다음과 같은 육성으로 보다 확실하게 가족주의 비판의 저의를 밝히고 있다.
 
“가족의 사랑이라는 말은 어떠한 의문도 사전에 제압할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가족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한번쯤은 생각해 봐야 한다. 그 표현 뒤에 숨어 있는 다른 뜻은 없는가. 언제부터인지 대우가족이나 삼성가족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노동자의 파업은 ‘아빠, 힘내세요’로 바뀌었다. 가족은 이미 경제적인 동원대상으로 변질되었고 이런 사실을 국가주의의 산물이라고 눈치 채기도 전에 눈물, 정, 정서 등등의 신화적 언어에 호소되어 버린다. 가족사회는 이처럼 가족을 신화화함으로써 오히려 가족을 억압하고 개인의 욕망을 거세한다. 아니, 가족은 곧 다시 권력이 된다. 주인 없이 노예와 노예의 명령만 난무한다. 가족이 더 이상 파시즘의 씨앗을 뿌리는 도구로 전락되지 않기 위해서, 순환-반복되는 가족기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이 전시 또한 무슨 도구의 사용설명서처럼 사용되기 바란다.”
 

 가족 안에서 안정을 찾는 것은 너무나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따라서 일면 가족과 가정의 개념은 신성한 것이다. 그러나 국가시스템이 그것을 이용해서 왜곡된 가족주의를 조장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이점을 비판적으로 드러내는 개념이 국가체제의 변형태인 가국(家國)체제이다. 오늘날 개인과 가족과 국가 사이의 유기적인 시스템에 대한 준비는 무망한 일이 되었다. IMF를 맞아 그나마 부실했던 제도화된 시스템의 안정성이 일시에 무너지고 가족체제가 그 충격을 완화해 주었다.
 
우리 사회가 그만큼 허약한 공공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문제는 그 이후 가국체제는 개인과 가족의 희생을 전제하는 쪽으로 변하고 있다는 지점이다. 시스템이 개인과 가족의 희생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 가부장과 가족단위가 그 문제를 떠안는 것이다. 그들의 희생을 통해서 국가와 자본의 시스템은 더욱 공고한 체제를 만들어 나간다. 이중재가 예술의 영역에서 국가나 가족이라는 체제에 대해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허구적 실체에 대한 유의미한 비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작가 소개

이중재(1966~)는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중앙대 회화과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한 후, 비판적 리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국내외 기획전과 단체전에 참여했다. 

강렬한 메시지를 담은 영상설치작업과 웹 아트 작업으로 유명한 이중재는 ‘피해보고서'라는 주제로 세 차례의 개인전을 열었다. 첫 번째 <피해보고서(damage report)>(이십일세기갤러리, 1996)는 동영상 설치작업들로 배금주의에 빠진 자본주의 비판의 메시지를 담은 것이었다. 

두번째 보고서는 <피해보고서 2 : 사이-코코코>(한원미술관, 2001)라는 제목으로 ‘국가체제'에 운영되는 개인의 삶을 거대한 그 무엇의 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 통일, 권력, 언론 등의 문제를 다뤘다.

세 번째 <피해 보고서 3 : 로망스-가국체제연구>(유아트스페이스, 2004)는 국가체제를 구성하는 최소단위로서의 가족체제에 주목하고 이것을 가국체제로 규정함으로써 가족주의의 허구성을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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