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의 13일 연두 기자회견이 열린 청와대 춘추관의 2층 대형 브리핑룸에는 270여명의 내외신 기자들이 몰려 뜨거운 취재열기를 보였다.

노 대통령은 회견 예정시각인 오전 10시 정각 브리핑룸에 도착, 청와대 김우식 비서실장, 김병준 정책실장, 권진호 국가안보보좌관 등 고위 참모진이 지켜보는 가운데 연설문을 낭독한 뒤 기자들과 일문일답을 가졌다.

앞서 노대통령의 지난해 연두 기자회견때에는 당시 고 건 총리를 비롯해 김진표 경제부총리, 안병영 교육부총리 등 부총리급 각료들이 배석했으나 이번에는 이해찬 총리를 비롯한 부총리급 각료들이 배석하지 않았다.

이날 이병완 홍보수석 사회로 진행된 회견에서 노 대통령은 먼저 "지난 한해 좋은 일 궂은 일이 많았지만 내내 경제 걱정만 한 기억밖에 없다"면서 새해 국정운영의 중심인 '경제' 화두로 회견을 시작했다.

노 대통령은 그러면서 "새해에도 여러 소망이 있겠지만 모두가 간절히 바라는 대로 경제가 잘 됐으면 좋겠다"고 경제회복에 대한 기대감을 밝히고 '선진한국' 비상을 위한 과제들과 장·단기 경제대책들을 설명했다.
   
이어 노 대통령은 문답에서 '남북정상회담 문제'를 첫 질문으로 받고 평소 북핵문제 협상에 대한 비유로 자주 사용해온 '상품 흥정론'을 거듭 언급하며 현 시점에서는 가능성이 낮다는 종래의 입장을 재확인했다.
   
노 대통령은 특히 "흥정처럼 가능성이 낮은 일을 자꾸 목을 달아 매면 협상력이 떨어진다. 물건도 자꾸 사자고 매달리면 값이 비싸진다"면서 "분위기만 자꾸 띄우는 것은 크게 좋은 일은 아니다"고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또 "재벌 총수를 만나 기업 규제완화와 투자문제에 대해 논의할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특유의 '감성어법'으로 대답을 이어갔다.
   
노 대통령은 "못만날 이유도 없다. 만나서 고견을 들어보고 싶다"고 '열린 자세'를 우선 내세운 뒤 "그러나 시중에서 얘기하듯 재벌총수를 만나 투자를 독려하라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관치경제 시대가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노 대통령은 "일부 경제단체가 얘기하듯, 조용히 (재벌 총수를) 만나서 애로사항을 들어주고 하는 것은 과거 제왕시대에나 하던 것이지 민주주의 지도자 시대에 하는 일이 아니다"면서 "제가 (만나서) 아무 것도 줄 게 없다"고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거듭 "개별적으로 줄 것이 없는 게 가장 큰 고민"이라며 "그래서 특별한 격려가 되지도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노 대통령은 '성장·분배 논란', '정책조율 과정의 파열음' 등에 관한 질문에서는 목소리의 톤을 높이며 적극적으로 반론을 펼쳤다.

특히 야당이 국회에서 국가보안법 폐지와 경제민생법안들을 연계 처리하려 했다는 전제를 깔면서 이를 겨냥해 '발목잡기'라는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노 대통령은 특히 "경제는 경제이고 국보법은 국보법으로, 동시에 할 수 있다. 국정원에서 과거사를 조사한다고 경제가 나빠지느냐"며 "국회에서 두 가지를 걸고 싸우지만 않았더라면 이번에 통과시킨 것보다 몇배나 많은 (경제·민생)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며 한나라당을 겨냥했다.
   
노 대통령은 거듭 "경제 명분을 내세워 사실상 정치적 입장을 살리는 것은 기득권 살리기 아니냐"고 말했다.
   
이어 노 대통령은 "성장이 더 중요하냐, 분배가 더 중요하냐고 묻는 사람한테 (오히려 내가) 무엇이 더 중요하냐고 묻고 싶다"면서 "분배와 성장은 두 마리 토끼가 아니며 함께 가지 않으면 둘 다 성공할 수 없다. 지금 잘 되는 국가중 성장과 분배를 소홀히 하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했다.
   
노 대통령은 그러면서 "남미 일부 포퓰리즘 국가의 잘못된 경제이론이 마치 통설인양 왜곡되고 있다. 이는 정설이 아니다"며 "논쟁이 많은데 경제이론은 정파적 이해에 따라 왜곡돼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또한 "정책 조율과정은 시끄러울 수 밖에 없다"고 전제, "처음부터 하나의 결론이 딱 나오는 것은 전제군주시대에서나 가능한 것으로, 이렇게 되면 대통령 입만 보고 있으면 되지만 지금은 아니다"면서 "다양한 의견을 조정해 가는 과정이 정책 결정과정이며 정치적 과정"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당정분리'라는 전제를 깔고 국보법 폐지, 과거사 문제에 관해서도 그동안 자신이 밝혀왔던 입장에 대해 소상하게 `배경 설명'을 했다.
 
노 대통령은 "큰 원칙을 선언했고 입장에 아무런 변화가 없으나, 대통령의 생각은 생각으로 받아주고 정책은 정책으로 이해해 달라"면서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고 밝혀 여당의 법안처리 속도 등 원내전략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특히 "대통령은 생각은 표현하지만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 "국회에서 토론을 통해 결정될 문제이기 때문에 정책 추진을 위해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는 등의 말로 거듭 당정분리 원칙을 확인했다.
   
다만 노 대통령은 과거사 정리 문제에 대해 "지향하는 가치의 문제이고  역사적 과제로, 우리나라만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세계 어느 나라도 새 역사로 가기  위해 반드시 과거 문제들을 해결하고 있다"면서 "세계 역사의 보편적 흐름을 한국만 거역할 수 없다"며 다시한번 `대통령의 생각'을 밝혔다.
   
노 대통령은 교육부총리 인사파문에 대한 질문에 답변할 때에는 "어물어물 넘어가는 것도 좋지만 성실히 답변하는 것도 좋은 것이라서 예정과 달리 관련 질문을 수용하겠다"며 적극적인 해명의 기회로 활용했다.
   
노 대통령은 먼저 "대통령이 잘못한 것인데 국민이 불쾌해 하고 책임을 묻는 분위기라서 부득이 책임을 물었고, 국민께 사죄한다는 뜻이었다"며 정찬용 인사, 박정규 민정수석의 사표 수리 배경을 설명했다.
 
나아가 노 대통령은 "문책 조치의 실제 잘못은 대통령이다. 너그럽게 양해해 달라"며 재차 자세를 낮췄다.
   
이어 노 대통령은 인사 책임론이 제기된 김 비서실장의 유임과 관련해 `실용 노선' 유지 해석이 나오고 있는 점을 의식, "이번 일과 노선은 아무 상관없고 나는 노선문제를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면서도 "`그렇게 보면 그렇게 보이겠다'는 생각에 오히려 잘된 일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특히 "치우치지 않는 국정이 잘된 것 아니겠나. 국민이 저를  개혁쪽으로 조금 치우친 사람으로 보기 때문에 비서실장은 조금 그렇지  않은  사람이면 좋지 않겠나"라고 덧붙여 눈길을 끌었다.
   
또 노 대통령은 교육부총리 인선파문의 큰 계기가 됐던 부동산 검증문제와 관련, "옛날에 돈을 좀 벌었다, 안벌었다는 것이나 전국민이 부동산 투기를 할 때 20년 전에 땅 한필지 가진 것을 검증한다고 하니까 요즘 어렵긴 어렵다"고 고충을 털어놓기도 했다.
   
노 대통령은 그러면서 "어쨌든 공사가 분명하고 사심없이 일할 것이냐에 초점을 맞췄다"며 이기준 전 교육부총리 발탁요인을 소개했다.
   
노 대통령은 지방분권과 균형발전 정책 효과에 대해서는 "성과가 5년, 10년, 그 이상을 가야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더 애착을 가졌고 이것은 꼭 제가 사명을  갖고 해야 한다"고 말하고 "어릴 적 과수원을 했는데 감은 첫 열매를 따는데 7년, 제대로 수확하는데 15년이 걸리나 그래도 감나무를 심었다"는 비유로 정책 의지를 강조했다.
   
한편 노 대통령은 일왕(日?) 방한 문제에 대해 일본인 기자가 `천황'이라는 표현을 써서 묻자 "일본에선 천황이라 부르나 그게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불리는  이름인지 확인하지 못해 제가 일본왕이라고 써야할지, 천황이라고 써야할지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고 전제한 뒤 `천황' 표현을 쓰는 등 용어선택에 신중한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서울=연합뉴스) 고형규 기자  un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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