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유년의 첫 걸음길에도 많은 이들의 말이 쏟아졌다. 하나마나한 의례적인 희망의 언어도 있었고, 절망과 불안을 더욱 부채질하는 어둠의 언어들도 있었다. 말이 세상을 오염시킨다며 혀를 차는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오히려 쓰레기인 경우도 많았다.
 
예컨대 틈만 나면 ‘노동생산성 하락’ 따위의 말들을 쏟아내며 노동자의 입을 막던 지배의 연금술사들은 ‘소득불평등은 물론, 빈곤층 비율도 세계최고 수준’이라는 한 기관의 최근 연구결과엔 입도 뻥긋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말들의 성찬’과 오염 속에서도 우리네 민중들에게 ‘보석’ 같은 이야기들도 적지 않았다. 새해의 첫 주, 이들의 말로 한 해의 처음을 성찰해보는 건 어떨까.
 
최장집 “갈등 표출될 때 사회적 약자 보호될 수 있어”
 
“사회는 갈등의 구조이고, 민주주의는 곧 갈등을 제도화하는 하나의 체제다. 갈등을 해소·관리하기 위해서는 갈등이 정치 수준에서 표출·조직·경쟁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여러가지 이데올로기적 영향 때문에 갈등이 없어야 할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억제돼왔다. 그 당연한 결과로 상생, 조화, 통합 등의 언술이 무작정 강조된다…. 갈등이 표출되고 정치적으로 조직될 때만 사회적 약자가 보호될 수 있다. 갈등없는 사회를 말하는 것은 사회의 기득구조를 유지·온존시키는 것과 같다.” 
 
최장집 교수(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장)가 오랜 만에 입을 열었다. 최 교수는 한겨레와의 신년대담에서 “지금은 갈등을 표출하고 다루는 방식이 달라져야 하는 때”라며 새로운 민주사회의 공공윤리를 강조했다.
 
그는 “민주주의 아래서 권위주의 시대의 성장중심 발전모델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 우리사회 사회·경제적 ‘위기의 핵심’이라고 지적하며 “재벌 중심의 경기부양 경제정책 아래서는 중소기업과 노동자들이 나쁜 시장조건과 고용불안에 놓이게 되고, 전체 분배구조가 악화되는 것을 피할 길이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최 교수는 정치발전 방향과 경제발전 방향이 서로 엇나가는 우리 사회의 새로운 대안을 어떻게 밝히고 있을까. 그는 ‘시장과 공공성’의 결합이라는 말로 이를 풀어나간다. 
 
“국가는 효율성을 갖는 작은 국가지만, 시장이 보다 공적 목적에 기여할 수 있도록 적극적 역할을 수행해야 하고, 사기업은 그들의 사적 이익이 사회에 큰 영향을 갖는 만큼 공공성과 공익에 부합하는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고, 사회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2003년판 제3의 길에서 말하는 것은 신자유주의를 통해 변화된 국가와 시장의 관계에 있어 다시 그 비중을 국가쪽으로 조정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노동’ 문제야말로 문제해결의 열쇠라고 지적한다. 그의 말을 더 들어보자.
 
“사회통합을 지향하면서 노동문제를 포괄하는 새로운 형태의 생산체제의 틀을 만들어야 한다. 노동문제가 핵심이다. 노사공존의 기업공동체를 만들지 못하는 한 부존자원이 많지도 않고 금융 및 자본시장의 센터로 성장하기도 어려운 한국에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구축할 수 없다. 인적자원이 가장 중요하고, 이는 결국 노동의 문제다. 한국의 대표적 기업인 삼성은 아직 노동조합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문제가 사회 전체가 노동을 파트너로 수용하는 일을 어렵게 한다. 재벌은 변해야 한다. 그럴 때만 새로운 성장체제의 구축을 위해 기업과 민주정부간의 교환과 협조가 가능할 것이다.”
 
노동의 문제를 우리 사회의 ‘중심의제’로 설정하는 최 교수의 진단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깊이 음미해볼 만하다. 1980년대 이후 ‘노사정’ 대립구도 속에서 도식적으로 제기돼온 사회의 ‘한 축’으로서의 노동이 아니라, 사회전체의 틀거리를 짜는 데 ‘마침내’ 노동이 가장 중대한 문제로 떠올랐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보수세력들의 끈질긴 ‘평가절하’와 지식인들의 책임방기 속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여전히 ‘법과 원칙’만을 운운하며 노동을 ‘관리와 조정’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김대환 장관 같은 이들은 최 교수의 이런 진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인터뷰 말미, 최 교수가 던지는 다음과 같은 ‘자성’의 목소리도 함께 말이다. 
 
“최근 상황과 관련해 보수언론의 책임을 많이 거론한다. 그러나 언론의 책임보다 내가 속한 지식인 사회에 책임이 더 많은 게 아닌가 한다. 민주화 이후, 지식인 또는 대학사회가 현실 문제를 얼마나 사려깊게 이해하고 대안을 모색했는지 자문하게 된다. 강한 보수언론은 약한 지식인의 결과다. 언론이 의제를 제기하고 지식인은 그 소비자 혹은 재생산자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이것이 한국사회의 비합리적 헤게모니 구조를 만들어 보수언론이 힘을 갖게 만든다.

민주화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공론의 장에서 지식인들의 역할은 너무나 저조하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대학사회에 몸담고 있는 기득권적 위치에 있는데, 이들이 현실에 안주하고 있다. 외국에서 가져온 개념과 이론을 무매개적으로 맥락없이 한국사회에 무차별적으로 적용한다. 지식인들이 우리 현실에 뿌리를 두고 현실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 데 기여해야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다.”? 
 
신영복 “군자는 다양성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는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이름높은 신영복 선생의 이야기도 귀담아 들을만 하다. 최근 ‘나의 동양고전 독법 강의’라는 책을 펴낸 신영복 선생은 논어의 ‘화동론’(和同論)이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담론이라고 설명한다.
 
신 선생은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화(和)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지만, 동(同)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가치관만을 용납하는 것’이라며 전자는 관용과 공존의 논리요, 후자는 지배와 흡수합병의 논리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그는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를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로 해석한다. 
 
신영복 선생의 이야기는 어쩌면 최장집 교수의 진단과도 맞닿아 있다. 시대가 다양하게 변화했으나 우리는 그 다양성을 수용하는 틀을 아직 갖추지 못한 까닭이다. 신 선생은 ‘주역’의 64괘 중 ‘박괘’(세상이 온통 악으로 넘치고 단 한 개의 선만 위태롭게 남아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나오는 ‘석과불식’(碩果不食, 씨과실은 먹지 않는다)이란 말을 새해덕담으로 건네며 이렇게 말한다. 말하자면 신 선생의 ‘겨울나기’ 법이다.
 
"박괘는 늦가을 잎이 모두 져버린 감나무 가지 끝에 빨간 감 한 개를 남겨놓은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지요. 이 그림에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모든 잎사귀를 떨어버리고 있는 나목입니다. 역경에 처했을 때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잎사귀를 떨고 서는 일입니다. 그리고 앙상하게 드러난 가지를 직시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거품을 걷어내고 화려한 의상을 벗었을 때 드러내는 구조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사람도 나무처럼 겨울을 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겨울방학은 여행 대신 나목처럼 서서 사색하는 시간이 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나목처럼 겨울나기를 한번 해보면 어떨는지요?”
 
한국사회의 가장 중요한 화두 중 하나는 물론 통일이다. 더욱이 올해는 해방 60주년이자, 6·15 공동선언 5주년이 되는 해인 까닭에 그 의미가 더욱 남다르다. 한평생 통일문제를 연구해온 사학자 강만길 상지대 총장은 KBS와의 신년좌담에 출연, 새삼 “우리가 말하는 평화통일을 하려면 지금의 종속적 대미관계를 먼저 풀어야 한다”며 “2년 전 일어났던 거대한 촛불시위는 반미운동이 아니라 한미관계를 정상적인 관계로 가져가려는 탈미운동”이라고 규정한다.
 
“만약에 지금의 한미관계를 그냥 그대로 두고 통일을 하게 되면 북한 지역까지도 미국의 세력권 속에 들어가는 이런 통일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죠. 그런데 그거를 갖다가 과연 러시아나 중국이 허용할 수 있겠는가, 그런 통일이 되면 6·25 때 북진통일의 상황과 같은 상황이 되는데… 그걸 허용하겠는가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통일을 해야 되느냐, 이제는 남북이 협상을 해가면서 통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협상 통일은 전쟁 통일이나 흡수통일보다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나는 그걸 2단계로 나눠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첫 단계는 평화 정착단계라고 생각합니다. 이 땅에 지금 서 있는 2개의 국가를 어떤 방법으로 하나로 해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하게 되더라도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 만큼 평화가 정착이 돼야 하는 겁니다. 지금 6·15공동 선언 이후에 철도가 연결된다고 그러고 도로가 연결되었고, 공단이 열리고, 여러 가지 육로 관광길이 열리고 하는 거는, 이거는 평화 정착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보면 6·15 공동선언은 이미 통일이 시작된 것이다. 평화정착 과정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낙관적’으로 통일문제를 바라보는 노학자는 이야기 끄트머리에 후배들에게 하고싶은 말을 이렇게 정리한다. 어쩌면 이것이 그의 ‘낙관적 통일관’의 열쇠말일지도 모른다.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와 달라야 하고, 기성세대는 이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강만길 “평화통일 위해선 종속적 대미관계 먼저 풀어야”
 
때로는 수구세력 같은 ‘위악적 독설’을 내뿜다가도, 때로는 뒤통수를 치는 ‘직관적 깨달음’의 말을 툭툭 던지는 ‘칼의 노래’의 소설가 김훈. 그가 한국일보 문화부 후배들과 만난 자리에서 내뱉은 독설, 혹은 일침도 흥미롭다. 세밀한 여과장치를 통해 조심스레 걸러내야 할 말들이 적지 않지만, 무엇보다 그의 발언은 날 것 그 자체로 생명력이 있다.
 
김훈은 “'칼의 노래'에 대한 우리사회, 특히 정치권의 반응과 그 작품을 원작으로 한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 대한 느낌”을 말해달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단호하게) ‘칼의 노래’를 386 애들이 읽고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 때 배 2척 갖고 300척을 부순 것처럼 하겠다는 거야. 무지몽매에 빠진 거지. 이순신이나 되니까 한 거야. 걔들이 갖고 나가면 다 죽어. 12척과 300척은 현대 사회에서 적용이 안 되는 이야기야. 중세 이야기를 쓴 건데 어떻게 현대 지도자들이 그렇게 하겠다고 TV에다 대고 말하는 거야. 그걸 보고 눈물이 나오더라고. ‘미쳤구나. 요새 내가 글을 잘못 써 가지고 어린 것들 망치는구나’ 했어. 진짜로 내 소설을 읽는 건 고마운데, 적이 300척 갖고 나올 때 지도자라면 최소한 200척은 갖고 나가야지. 12척을 갖고 나가야 할 일이 없도록 해야지. ‘니들이 12척을 갖고 나가면 백전백패다’는 말을 TV에서 했는데 MBC가 빼버려 나만 바보가 된 거지. 얼마나 약 오르는지. 드라마? 안 봐. 처음 한번 봤는데 아동극 수준이야.”
 
그는 “회색분자가 많아야 좋은 세상이야. 회색과 중도가 깃발을 꽂지 않으면 우리사회는 어려워진다”며 “그 깃발 아래 기회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이지만 양심적인 사람들을 데리고 가야 해. 그러면 희망이 있다”고 일갈한다.
 
그리곤, 386과 우익을 한 도마에 올려놓고 잘근잘근 씹는다.
 
“386이 리더가 됐잖아. 근데 걔들은 사회의 물적 토대를 건설한 경험이 전혀 없는 아해들이야. 그래서 도덕적인 거지. 인간의 선의를 모아 가지고 현실을 개선할 수 있다는 낭만주의, 아름답지. 하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 거든. 엄청난 세금을 내고, 반드시 아들을 군대 보내는 것은 우익이거든. 우익에겐 세가지 즐거움(右翼三樂)이 있어. 세금 왕창 내고, 아들 최전방으로 보내고, 질서를 지키고. 아 그래야 우익이 완성되는 거 아냐. 그런데 강남에 잘 나간다는 성형외과 의사들이 소득세 50만원 나왔다고 항의하지. 그런 사회는 부숴야지. 나도 굳이 말하자면 중도우익이야. 칼의 노래의 성공으로 세금도 왕창 냈고, 아들 군대 갔다 왔고. 우익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고, 세상을 책임지는 거야.”
 
아마도 어떤 386들과 우익들은 김훈의 말을 ‘기회주의자의 요설’쯤으로 평가할는지 모른다. 그 만큼 그의 말은 불편하다. 하지만 개나 소나 ‘중도우익’이라고 떠벌이는 세상에서 “강남에 잘 나간다는 성형외과 의사들이 소득세 50만원 나왔다고 항의하지. 그런 사회는 부숴야지”라고 퍼붓는 그야말로 ‘양심’을 가진 중도우익이라고 평한다면, 이 역시 과도한 평가일까.
 
말보다는 ‘살아보임’으로써
 
여러 ‘명사’들의 이야길 길게 소개한 끝자락에 한명 덧붙이고 싶은 사람은 어떤 ‘무명’의 아버지다. 그는 ‘제43대 도전 골든벨 우승자’인 지관순양(20)의 아버지, 지의준씨(60)다.
 
가난한 집의 딸로 태어나 초등학교 입학마저 힘들었던 지양이 고생 끝에 골든벨까지 울리자 세상은 가난한 소녀의 ‘성공 미담’으로 떠들썩했다. “개천에서 용 났다” 식의 호들갑 뒤에서 그 아버지는 이렇게 덤덤히 이야기한다.
 
“관순이가 골든벨을 울린 건 기쁜 일이지만, 사람 되는 일보다는 공부에 더 관심을 기울일 것 같아 걱정입니다. 공부를 잘 한다고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관순이에게 한번도 공부하라는 말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저도 생활보호대상자이지만, 몇 년 전부터 오리를 사육하며 사육장에서 나오는 오리알을 인근 의료원과 요양소 등지의 환자들에게 나눠주고 있습니다. 그래서도 관순이가 학자보다는 의인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살면서 공부 좀 했다 하는 사람 치고 곡학아세하지 않고 제대로 사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세상에 대학생은 많지만 의인은 없습니다. 본인이 공부를 계속하겠다면 막지 않겠지만 어떤 일을 하더라도 묵묵히 봉사하는 삶을 살았으면 하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이같은 관순양 아버지의 이야기에 대해 문화비평가이자, 출판기획자인 김규항씨는 “그 아버지는 제 딸을 단지 말로 가르친 게 아닐 것이다. 말로는 그렇게 되기 어렵다”며 존경의 뜻을 표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닌 삶’이라는 김규항씨의 ‘말’을 소개하며 길고 긴 새해의 이야길 접을까 한다. 
 
“세상에 가난한 아버지는 많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가난하면서도 자식에게서 존경받는 아버지는 없다. 영혼이나 사랑까지 사고파는 세상에서 가난한 아버지는 자식의 인생을 해치는 죄인에 가깝다. 그러니 지관순 양과 그 아버지의 경우는 참 특별하다. 딸을 초등학교에 못 보낼 만큼 가난한데다 ‘의인’이니 ‘곡학아세’니 하는 지사적 언어(요즘 젊은이들이 구리디 구려하는)를 사용하는 아버지와 2004년의 딸 사이에 흐르는 믿기 어려운 존중은 말이다. 한 가지만 짐작한다면 그 아버지는 제 딸을 단지 말로 가르친 게 아닐 것이다. 말로는 그렇게 되기 어렵다. 그는 제 딸에게 ‘살아 보인’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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