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나라가 ‘송구영신’의 축제분위기로 들떠있던 지난해 12월 31일 늦은 밤. TV를 보던 국민들은 간만에 국회로부터 ‘속도감 있게’ 처리된 법률안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이라크 파병연장 동의안· 예산안 국회 통과.’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양대 ‘교섭단체’들이 오랜 진통 끝에 당장에 급한 예산안과 파병동의안 등을 통과시킨 것이다. 하지만 국가보안법 등 주요 개혁입법에 대한 처리는 올 2월로 미뤄진 탓에 17대 국회의 첫 해는 ‘알맹이 없이’ 끝마치고 말았다.
 
후유증은 크다.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열린우리당 천정배 원내대표가 일찌감치 사퇴한 데 이어, 이부영 의장도 3일 오전 사퇴 의사를 밝히는 등 여당 지도부가 자의반 타의반으로 집단사퇴함으로써 정초부터 정국이 요동치고 있다. 한나라당 역시 김덕룡 원내대표 등에 대한 사퇴압력이 가시화되는 형국이다.   
 
하지만 개혁입법만 바라보다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국민들과 달리 두 정당은 이번 국회를 통해 적지 않은 ‘전리품’을 확보했다. 이라크파병연장 동의안, 경제자유구역 법률안, 공무원노조 법률안 등이 그것이다.
 
▲ 31일 밤 국회가 본회의를 열어 이라크 파병연장 동의안 등을 통과시키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들 법률안에 대해 그동안 진보진영은 꾸준히 반대와 개정을 요구해왔으나 이날 국회에선 ‘일사천리’로 통과됐다.
 
이들 법률안은 특히 민주노동당 등 ‘비교섭단체’ 의원들의 강력한 반대토론에도 불구하고 넉넉한 스코어로 통과돼 보수양당의 ‘정치적 지향점’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이날 가장 먼저 처리된 것은 이라크 파병연장 동의안이었다. 표결 전 반대토론에 나선 것은 민주당 손봉숙, 민주노동당 권영길, 이영순, 열린우리당 임종인 의원이었다. 이라크파병 동의안의 경우 당초 의안토론 없이 바로 표결에 붙이기로 했으나 회의 시작 전 민주노동당 천영세 의원단대표의 토론 요청을 김원기 의장이 받아들여 ‘토론이나마’ 진행됐다.
 
민주당 손봉숙 의원은 “남의 땅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당사국 다음으로 최대의 파병을 감행하고도 대한민국은 평화를 지향하는 국가라고 자신할 수 있겠느냐”고 성토했다.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은 반대토론 중에 “그만하라”는 항의가 터져나오자 “세계 어느 나라에서 파병을 결정하면서 마지막 한 해 순간에 서서 차수 변경을 막기 위해서 토론도 허용하지 않고 이렇게 한 나라가 어디 있느냐”며 이는 “역사적 치욕”이라고 일갈했다.
 
이영순 의원 역시 파병연장안 통과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 스스로 헌법에 명시한 법 규정을 무시하고 침략전쟁의 앞잡이 노릇을 하게 되었고,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 국민 모두를 전범자로 만드는 심각한 일”이라고 비판했다. 교섭단체 소속으로 유일하게 반대토론에 나선 열린우리당 임종인 의원은 “국익을 위해서도 여기 국회에 계신 선배.동료 의원의 많은 반대표가 있어야 된다”며 양심투표를 호소했다.
 
하지만 이들 의원들의 반대토론에도 불구하고, 표결결과는 재석 278인 중 찬성 161인, 반대 63인, 기권 54인으로 파병연장동의안은 끝내 가결됐다.
 
진보진영이 ‘자본자유구역’이라며 강력히 반발한 ‘경제자유구역법’ 역시 순풍에 돛단 듯 처리됐다.
 
민주노동당 현애자 의원은 “애초에 경제자유구역법의 취지는 외국인 이용 편의시설을 위한 조치로 시작했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체계 전반을 뒤흔들 수 있는 의료개방으로까지 변질됐다”며 “정부의 이 개정안은 사회적 합의도 안 된 졸속 법안”이라고 비판했지만 표결 결과 재석 245인 중 찬성 202인, 반대 28인, 기권 15인이었다. 민주노동당 의원 10명을 제외하면 반대가 18명에 불과한 ‘압도적 표차’로 가결된 것이다.
 
‘공무원노조법’과 관련해선 열린우리당 제종길 의원이 찬성토론을, 민주노동당 단병호, 한나라당 배일도 의원이 반대토론을 요청하고 나섰다.
 
단병호 의원은 정부가 제출한 공무원노조법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정부가 일선 공무원들을 개혁에 동참시킬 의사가 있다면 먼저 그들의 노동기본권부터 보장해야 한다”며 “이 법안은 폐기되어야 하고, 문제점들이 보완된 다른 법안이 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종길 의원은 이에 맞서 “공무원에 대하여는 일반 근로자가 누릴 수 있는 노동3권을 그대로 적용하기가 어렵다”며 “미국 일본 독일과 같이 선진국에서도 국가공무원에 대하여는 노동3권을 모두 인정하지 않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일부 권리에 대한 제한은 필요하다”고 반박했다.
 
배일도 의원은 반대토론에서 “공무원들이 집단행동을 했을 때 오히려 벌칙 규정을 강화해 놓은 법이 어찌 공무원의 노동3권을 찾아 주는 것이냐”며 “공존의 노사 관계를 이루려면 법이 현실에 맞도록 제정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공무원노조법 역시 표결에 붙여지자 찬성 193, 반대 48, 기권 18인으로 가결됨으로써 반대토론 의원들의 ‘호소’가 무색해졌다.
 
그런데 파병연장동의안, 경제자유구역법, 공무원노조법 등 국내외 민중의 삶을 직접적으로 유린하는 법률에 찬성표를 던진 의윈 중엔 이른바 ‘골수 개혁 성향’이라고 불러도 좋을 여당 의원들도 다수 포함돼 있어 씁쓸함이 더하다.<표 참조> 
 

파병연장 동의안에 찬성한 의원 중엔 김영춘, 김희선, 이미경, 장복심, 최성 등 당내에서 뚜렷한 개혁이미지를 과시해온 의원들이 포함돼 있다.
 
이른바 ‘여당 내 강경개혁파’로 분류됐던 김원웅, 우상호, 정청래 의원 등도 경제자유구역법에 대해선 모두 찬성표를 던졌다.
 
공무원노조법의 경우 여당은 더욱 일사분란한 모습을 보였다.
 
찬성표를 던진 의원 중엔 강경개혁파의 얼굴마담격인 유시민 의원을 비롯, 이인영, 이철우, 임종석 등 ‘스타급 386’들이 대거 포함돼 있다. 더욱이 당내에서 친노동계 입장을 피력해온 바 있는 우원식, 이목희 의원마저 찬성 표를 던진 것은 노동계에 대한 집권여당의 태도가 ‘결정적 국면’에서 어떻게 획일화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물론 노동자·민중을 배반하는 법률안에 찬성표를 던진 것은 열린우리당만이 아니다. 한나라당 의원 다수도 이런 ‘배반의 거수기’ 노릇에 동참했다. 하지만 이들 법률안 통과에 꾸준히 반대해온 민주노동당 등 진보진영 의원들이 자신들의 뜻과 달리 갈 땐 ‘한나라당 2중대’ 식의 공격을 퍼붓던 그들이, 결국엔 손에 손을 맞잡고 반민중적 악법을 통과시키는 풍경은 씁쓸하다.
 
경제자유구역법, 공무원노조법 등 민중들의 삶에 직결되는 법률안의 ‘무사통과’를 볼 때 더욱 그렇다.
 
1998년 정권교체 이후 최초로 ‘과반여당’이 등장한 17대 국회의 첫 무대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막이 내린 무대 위엔 ‘개혁’이라는 이름의 꼬리표만 유령처럼 남아 있다.

그래서도 우리는 그 ‘개혁유령’들의 이름을 또렷이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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