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우리당의 국가보안법 당론 변경을 둘러싼 ‘설왕설래’가 기존 연내처리라는 당론을 재확인하는 선에서 결론났다. 그러나 꿈쩍 않는 한나라당과 거듭 뒷걸음질만 쳐온 열린우리당의 기존 행보로 볼 때, 이 같은 결정에도 불구하고 대체입법론 등이 재부상할 가능성은 여전히 잠복해 있다는 지적이다.
 
김현미 열린우리당 대변인은 24일 오후 당 상임중앙위와 기획자문위 연석회의 결과를 브리핑하는 자리에서, “4대 법안을 연내에 처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4자회담’ 합의와 우리당 입장은 변함이 없고, 이를 4자회담을 통해 관철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 밝혔다.
 
회의에 앞서 기자회견을 자청, 당론 변경이 필요하단 뜻을 내비쳤던 민병두 당 기획위원장의 발언에 대해서도 “민병두 의원이 일부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회의에서 제안하려 했으나, 회의가 그런 얘기를 꺼낼 분위기가 아니었다”며 “민 위원장이 자신의 생각을 일찍 말한 것”이라는 말로 논란이 번지는 것을 차단했다.
 


김 대변인은 “우리당의 당론인 국보법을 비롯한 4대 개혁법안을 ‘4자회담’에서 관철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우리당 협상단의 입장”이라 거듭 강조하고, ‘4자회담’에 대한 점검과 중간보고 등을 27일 의원총회에서 다루기로 했다고 밝혔다. “당론변경 시에는 반드시 의총을 통해 결정한다”는 입장도 재확인했다.
 
이는 ‘4자회담’을 통한 협상이 한창 진행 중인 상황에서, ‘자발적인’ 당론변경으로 야당에게 밀려서는 안 된다는 당내 반발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부영 의장과 천정배 원내대표는 연석회의 직후 이러한 입장을 토대로 4자회담에 참석,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 및 김덕룡 원내대표와 협상에 들어갔다. 
 
열린우리당은 이로써 국보법 연내처리라는 기존 당론을 다시 한번 분명히 한 셈이지만, 27일까지 매일 거르지 않고 진행키로 한 ‘4자회담' 내내 이러한 입장이 흔들림 없이 확고할 것이라 예측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지금까지 한나라당이 취한 태도로 볼 때, 법 폐지불가란 기존 입장에서 전격 선회할 리는 만무하기에, 열린우리당이 초읽기에 몰리면 몰릴수록 당내에서 대체입법 등으로의 변화 움직임이 언제든 다시 불거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 당론을 유지하면서 합의시기만 연장될 경우, 국보법 논란은 내년 재보선 직전까지 이어져 열린우리당 독자 강행처리는 더 힘들어 질 수밖에 없을 듯하다. 지지율 면에서 이미 오래 전에 한나라당에 뒤쳐진 열린우리당으로선 표를 의식, 어떻게든 선거 전에 타협을 통한 활로를 찾으려 들 가능성도 크다. 지지층이건 비지지층이건 법안처리를 질질 끌수록 등을 돌린다는 걸 알기에, 대체입법을 통해서라도 연내처리하는 것이 최선이란 판단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지적이다. 이런 전망은 열린우리당이 ‘폐지 후 형법보완’이란 당론을 결정했을 때부터 진보진영 일각에서 제기돼 왔던 바다.
 
여기에 노무현 대통령의 23일 만찬회동 발언은 대체입법론자뿐 아니라 ‘4자회담’ 당사자인 이부영 의장과 천정배 대표의 짐을 한층 덜어줄 것으로 보인다. 이날 불거진 당론변경 움직임도 “몇십 년 된 어려운 법인데 하루아침에 되겠느냐” “차근차근 풀어 나가자”는 전날 노 대통령의 말에서 힘을 얻었다는 분석이다.   
 
천정배 열린우리당 원내대표가 24일 오전 비공개 대표단 회의에서, “대통령의 언급이 개혁입법 처리를 늦춰도 좋다는 의미는 아니었다”고 말했고, 김현미 대변인도 “원래 송년회 겸 내년 정국에 대해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는데, 어제 일정을 진행하다 보니 국회일정과 연관된 것처럼 생각하실 수 있는데 그것과는 무관하다”며 노 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된 발언이 아님을 강조했지만, ‘정치적 언술’인지 아닌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듯하다.
 
때문에 “국보법은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내야 한다”는 말로, 국보법 폐지를 둘러싼 당내 논쟁을 단박에 정리하며 폐지 후 형법보완으로 당론을 몰아갔던 노 대통령이, 이번엔 대체입법 등으로의 당론변경을 추동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상황이다. “국보법 논의는 어차피 대체입법의 언저리로 갈 곳이 정해져 있는 것 아니냐”며 “당내 상황과 4인회담 타협과정을 고려해볼 때 대체입법은 어차피 치러야 할 전쟁”이라 밝힌 당 관계자의 말도 이런 관측에 힘을 싣고 있다.
 
게다가 27일 의총에서 대체입법 등에 대해 재논의 한다는 계획도 당론 선회의 불씨를 남겨 두고 있다. 한 핵심 당직자는 “여야 4인 대표회담을 27일까지 가동키로 한 만큼 크리스마스 연휴기간에 한나라당과의 협상을 통해 국보법폐지 당론 관철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그 결과를 토대로 27일 상임중앙위 및 기획자문위 연석회의와 의원총회를 열어 국보법 처리에 대한 당의 입장을 결정할 것”이라 말했다.
 
이 때 한나라당과의 합의도출이 어렵다는 판단이 설 경우 열린우리당은 ▲김원기 국회의장에게 국보법 폐지안 직권상정 요구 또는 법 처리 내년 연기 ▲대체입법 ▲폐지 후 형법보완·대체입법을 놓고 자유투표에 회부하는 방안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할 방침이다.
 
이날 ‘4자회담’ 전에 열린 연석회의 결과에 대해 김현미 대변인이 “민병두 기획위원장 발언은 논의되지도 않았다”고 설명했지만, 실은 민 의원 제안을 두고 격론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대체입법안이라도 우리 내용을 담으면 될 것 아니냐”는 등의 발언이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불안하기만 한 ‘당론 재확인’이었던 셈이다.
 
여권이 자중지란에 빠진 사이, 한나라당이 보이는 행보도 의미심장하다. ‘찬.찬.찬’이란 제목의 논평을 통해 정부여당의 ‘입장 변화’를 조목조목 칭찬하는가 하면, 임태인 대변인 명의의 또 다른 논평 ‘한 걸음 한 걸음이 아름답다’는 “‘4자회담’이 진행되면서 날이 갈수록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을 보고 협상과 합의가 아름답다는 것을 느낀다”는 말로 ‘4자회담’의 의의를 적극적으로 평가했다.
 
임 대변인은 또한 “당리당략을 떠나 서로가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진정성을 가지고 협상에 임하면 풀리지 않을 문제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말도 덧붙여, 이미 국보법 처리를 둘러싼 양당간의 견해가 상당 부분 좁혀졌다는 관측을 가능케 했다. “국보법 찬양·고무 조항을 어떻게 처리할지만 빼면 여야의 입장은 거의 차이가 없는 수준까지 협상이 진행됐다”는 열린우리당 핵심 관계자의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열린우리당의 국보법 폐지 연내처리라는 기존 당론 재확인으로 향후 ‘4자회담’이 양당간의 격론으로 치달을 것인지, 한나라당 논평처럼 ‘아름다운 합의’에 이를 것인지, 27일 이후면 가닥이 잡힐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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