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연말이 되면 한해를 돌아보면서 ‘다사다난(太事太難)’ 했던 해라고 회고한다.

일도 많고 어려움도 많았다는 뜻이리라. 올해 우리 노동계의 ‘다사다난’에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아마도 보건의료노조 산별교섭과 산별총파업일 것이다.

‘요즘은 조용해요?’ 언제부턴가 다른 연맹 간부들을 만나면 항상 듣는 인사말이다. 사실 올 보건의료노조 산별투쟁은 그 자체보다 그 이후 있었던 서울대병원지부의 반발과 산별협약 10장2조 논쟁으로 더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최근 어느 연맹 간부의 하소연은 보건의료노조 투쟁이 아직도 '진행 중'임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 연맹의 주요 과제는 대사업장의 산별 전환이다. 그런데 이들이 보건의료노조의 과정을 보면서 산별교섭이 대기업에게 일방적 손해를 끼치는 것으로, 그리고 산별교섭을 하면 더 시끄럽고 골치아픈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산별 전환에 소극적이다. 빨리 보건의료노조 투쟁 중 왜곡돼 알려진 부분이 있으면 해명하고 산별운동에 미친 성과와 한계, 그리고 과제가 잘 정리되면 좋겠다." 이런 질문과 하소연을 들으면서 올해 보건의료노조 투쟁은 단지 내부의 평가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전체 노동운동 진영 내에서 내부 논의 경과, 성과와 한계, 과제가 한번쯤은 객관적으로 공유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결론부터 말하자면 ‘보건의료노조는 요즘 조용하다’. 그동안 안밖에서 지속적인 문제제기가 있었지만 대의원대회(10장2조 폐기 반대 75%), 산별합의안 조합원 총투표(찬성 78%) 등을 통해 올 투쟁이 성과적으로 정리됐다. 물론 지금 조용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은 과제를 남겼다.
 
많은 이들이 현 단계 노동운동의 과제로 산별노조 건설과 산별교섭, 격차해소와 통일집중을 얘기하지만 이번 보건의료노조 투쟁과 평가과정을 보면 그것은 말처럼 쉬운 길이 아니다. 여전히 우리 내부에는 협소한 기업별 의식과 경제주의, 조합주의적 사고가 남아있었다. 특히 쟁점을 풀어가는 과정에서의 조직 민주주의 훼손과 공식 결정에 대한 불복종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번 산별투쟁은 우리나라 노동운동사에 있어 대단히 의미있는 사건이었다. 98년 우리나라 최초로 기업별노조에서 산별노조로 조직전환을 성공한 보건의료노동자들이 2004년에는 다시 최초로 진정한 의미의 산별총파업을 성사시키면서 그 힘으로 사쪽 단일대표단을 강제, 산별교섭을 쟁취했고 121개 병원의 규모와 특성 차이를 넘어 하나의 산별합의안을 만들어냈다.
 
특히 이번에 합의한 산별적 의제들 - 의료 공공성 강화를 위한 노사정특위 구성, 표준화된 주5일제 기준과 산업별 최저임금제 도입, 보건연대기금 조성 합의는 기업을 넘어 산업별 사회적 교섭을 통해 전체 병원노동자의 통일과 연대로 나아가는 교두보를 확보했다는 의미다.

무엇보다 눈여겨볼 것은 내부 주체의 질적 변화이다. 이번 투쟁을 통해 그동안 다소 정체상태를 보였던 산별운동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현장에서부터 새롭게 일어나고 있다. 1만명이 참가한 산별총파업이라는 혁명적 세례와 새로운 미래를 보는 ‘창’(산별교섭)을 확보한 보건의료노동자들은 다소 고통스러웠던 산별협약 논쟁을 거치면서 ‘간판만 바꿔 단 기업별노조의 연합이 아니라 연대와 확산의 산별운동은 어떻게 가능한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예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토론을 벌이고 있다. 하반기 두 차례 있었던 ‘산별학교’에는 각각 150명에 가까운 현장 전임간부들이 참석, 높은 관심과 열기를 그대로 보여줬다.

보건의료노조 2004투쟁을 통해 우리나라 산별운동의 이후 과제는 보다 분명해졌다. 이제는 당위적으로 산별노조 건설과 산별교섭을 주장하는 시기는 지났다.

‘어떻게 하면 가장 빨리 한국적 산별협약체계를 정착시킬 수 있는지’, ‘새롭게 만들어지는 산별협약과 기존 현장 단협과의 관계는’, ‘노동소득분배구조 개선과 내부 격차해소를 동시에 이룰 수 있는 연대임금정책은’ 등의 고민을 담아낼 수 있는 ‘산별협약정책’이 시급하다. 그리고 ‘보다 더 계급적인 산별운동을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미조직 비정규 투쟁을 어떻게 획기적으로 강화할 것인지’에 대한 조직적 결단이 필요하다.

우리가 올해 보건의료노조 투쟁을 ‘역사적인 투쟁’이라고 스스럼없이 부르는 것은 외형적인 성과를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다. 보건의료노조는 이번 투쟁을 통해 여전히 사업계획서와 주장 속에만 존재하고 있던 우리나라 산별운동을 ‘실천의 영역’으로 불러냈다. 또한 전체 노동계에 많은 논쟁을 촉발시켰다. 이런 논쟁이 산별운동 전진의 밑거름이 되기 위해서는 논쟁 그 자체의 결과보다는 내년 투쟁이 더 중요하다.

내년 민주노총 사업계획서에 나와있는 것처럼 이 땅의 노동자가 2007년 ‘산별의 바다’에서 다 함께 만날 것을 기대하면서, 2005년에는 보건의료노조 산별교섭을 딛고 모두가 한 걸음 더 산별로 다가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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