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어른들께 야단도 맞았어요. 경기도 의왕 근처에 애 맡길 곳을 찾아 급하게 집을 구하고 있었는데 1층 전세값보다 지하 매매가가 더 싸더라구요. 돈도 없는데다 평생 집 살 능력이 안된다고 생각해서 사버렸어요. 전세값 오르는 것도 귀찮고….”
‘돈’을 몰랐던 재경위 ‘최우수의원’
그런 그가 국가 경제정책의 큰 틀을 입안하는 국회 재경위원회 ‘최우수 의원’으로 뽑혔다. 총 24명의 국회의원 가운데 언론과 NGO로부터는 1등, 피감기관으로부터는 2등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경제전문가로의 변신에 성공한 셈. 노동운동가에서 국회의원으로의 변신만큼이나 극적이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만족보다는 아쉬움과 불만이 더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
“현재의 국회 시스템으로는 절대 정부를 제대로 감시할 수 없습니다. 일하는 국회보다는 정쟁에 몰두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어요. 이래서는 의회 본연의 기능, 그러니까 실질적인 정부 견제가 불가능합니다. 국회의 근본적 개혁이 필요합니다.”
국회 개혁의 필요성에 대해 대부분 의원들이 공감하고 있지만 대처는 미온적이란다. 한 토론회 자리에서 심 의원은 6명의 보좌관을 데리고 3주 동안 모든 국정을 감사하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게다가 17대 의원들 역시 국감을 정쟁의 도구로 활용하고, 지역 이기주의 발언에 몰두했으며, 개인의 소신보다는 당리당략을 쫓지 않았는가.
“상시국감체제로 가야 합니다. 상임위를 소수정예화하고, 유관 상임위는 겸직하는 복수상임위 허용도 검토해 볼만 합니다. 정책청문회를 일상화하고 문제점이 발견되면 국정조사를 활성화해야 합니다.”
의원 혼자서 하기에는 어려운 일 아니냐는 질문에 심 의원은 “일단 제도개선에 대한 공감대를 넓히고 있다”고 답했다. 실제 재경위에서는 상임위 활성화가 공론화돼 있다고. 예를 들어 1/4분기에는 금융, 2/4분기에는 조세 등 의제별로 상임위를 진행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일각에서 제기되는 각 기관의 국실별로 국감을 진행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장·차관이 모든 권한을 행사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업보고 외에는 의미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다수당 되는 것보다 사회운동의 정치화가 더 중요”
심 의원은 새벽 5시에 기상, 의왕에서 버스를 타고 이수교에서 갈아타 6시40분쯤 여의도에 도착한다. 의원총회, 라디오 인터뷰 등 아침 7시부터 회의와 일정이 많이 잡히기 때문. 그리고 시간별 일정을 소화하고 밤 10시경, 늦을 때는 자정을 넘겨 귀가한다. 거의 살인적인 스케줄이다. 기존의 ‘놀고 먹는’ 국회의원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
“당선 전에는 저도 국회의원에 대한 인식이 ‘권력과 부패의 상징’이라는 보통 사람들의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어요. 그런데 막상 해 보니까 의원들이 과도한 특권이 많아서가 아니라 본연의 임무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이런 질책을 받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17대 국회는 정쟁적 요소도 남아 있지만 다른 한편 성실한 초선 의원들의 정책 중심적 활동도 뒤따르고 있어 변화 가능성은 있다고 봅니다.”
지난 국감에서 심 의원은 일관되게 노동자·서민의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해답을 찾고자 노력했다. 의회 역사상 이런 시도는 50년만에 거의 처음 이뤄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민주노동당이라는 진보정당의 원내 진출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의원단과 당이 따로 움직인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당과의 관계가 궁금했다.
“이제 겨우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와중에 초기 혼선은 불가피한 측면도 있어요. 의원 활동이 당으로 전달되고 이것이 다시 의원들에게 전해지는 순환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아직은 미흡합니다. 의원 개개인이 성실히 활동하고 당도 전략을 확충해 나가야겠지요.”
그러면서 심 의원은 ‘의원이 한 명만 더 있었어도…’라며 절박한 안타까움을 표했다. 지금 민노당 10명의 의원들은 각 1명씩 10개 상임위에 진출해 있다. 자신이 속해 있는 재경위에 민노당 의원이 한 명만 더 있었어도 의제를 나눠 훨씬 더 효과적으로 의정활동을 펼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소수정당으로서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면서 그는 의회내 기득권 블록과 맞서 있다. 의회 밖으로는 자본과 그에 일조하는 관료집단, 소수 특권세력이 맞물린 거대한 기득권 블록이 형성돼 있다. 이를 어떻게 이겨나갈 것인가.
“변혁은 이례적인 ‘사건’으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의회 내 변화는 우리 사회 각 분야의 의식화와 조직화, 개혁이 종합돼야 비로소 나타납니다. 민노당은 의회내 다수파가 되는 것보다 우리 사회 전반의 정치적 조직화를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런 토대가 의회공간에 반영되고 결합돼야만 진정한 진보정치가 가능해집니다.”
“올바른 원칙에 입각한 공조, 계속돼야”
그는 민중과의 결합력을 강조했다. 여성·환경·인권·평화 등 시민사회 전 영역에서 사회운동이 일어나고 제도권내 의원들의 활동은 이러한 사회운동의 실천을 지원하면서 성과를 객관화시키는데 모아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직 현실은 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의 이른바 ‘정치공조’도 이런 현실적 배경 속에서 태어났다. 그는 ‘개혁공조’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소수당의 한계를 극복하고 제도권을 활용하기 위해 진행돼 왔습니다. 당리당략에 따른 합종연횡 같은 공조는 절대 아닙니다. 민주노동당은 정책에 기초한 ‘정책공조’가 원칙입니다. 한나라당과의 야당공조는 서민생활의 이슈화를 위한 ‘민생공조’였고 열린우리당과의 공조는 개혁의 내용과 원칙을 알리고 한나라당의 개혁후퇴를 폭로하는 ‘개혁공조’였습니다. 또한 소수정당간 공조는 다수당 운영에 대한 반격의 성격을 갖습니다. 앞으로도 정치공조는 특정 정당에 구애받지 않고 철저히 민주노동당의 정책에 기반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최근의 위헌정국에 대해서도 그는 같은 시각에서 설명했다. 수도권 과밀을 해소하고 균형발전을 이뤄야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지만 노무현 정부의 연기․공주 수도이전 프로그램은 마치 거대한 토목공사와 유사하다는 것. 사람들이 서울로 몰려드는 것은 교육·의료 ·문화·행정서비스 때문이므로 이를 개혁하는 종합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것이 민노당의 입장이다. 때문에 위헌 결정을 반기지만 관습헌법 논리를 동원한 것에 대해서는 납득할 수 없다는 다소 애매한 당의 입장이 나오게 됐다.
노동운동, 경제문제에 관심 기울여야
“당의 정책은 우리 사회 80%의 노동자와 서민을 위한 것입니다. 때문에 지금까지의 의제가 개혁중심이었다면 앞으로는 철저히 ‘민생’을 부각시키고자 합니다. 비정규직 문제와 임대차보호법 문제, 조세개혁, 쌀개방 등에 있어 해당 주체들의 투쟁과 연계해 민생법안 수호를 관철시킬 계획입니다.”
아울러 심 의원은 노동운동가들도 경제정책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줄 것을 당부했다. 지금까지의 노동운동이 기업 테두리 안에서 기업주를 상대로 싸우거나 정치투쟁으로 이어진 ‘사후적 투쟁’이었다면 앞으로는 경제정책의 입안과 그 파급효과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사전적 투쟁’에 보다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
“이번 비정규직 입법안만 해도 환노위를 중심으로 많은 문제제기가 있었지만 실제로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법안들은 그 전에 모두 재경위에서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물을 퍼내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물길을 막는 실천이 필요합니다.”
결혼, 노동운동 그리고 정치활동
국회의원이 되면서 그에게는 여가가 사라졌다.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한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과 남편, 셋이서 찜질방이라도 가고 싶지만 시간이 조금만 허락돼도 공부를 더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린다. 손낙구 보좌관의 말처럼 아무래도 그는 타고난 ‘욕심꾼’인 것 같다. ‘일 욕심꾼’.
그러나 세상에 태어나 ‘정말 잘했구나’ 싶은 일로 그는 ‘일’보다 ‘결혼’을 꼽았다. 그는 결혼을 ‘역사적 사회적 존재를 깨우쳐주는 의미 있는 길’이라고 표현했다. 결혼을 통해 사회의 한 온전한 인간으로서 다시 태어났고 세계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졌단다.
이런 맥락에서 결혼은 그에게 다가온 세 번의 인생의 전환점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나머지 둘은 로자 룩셈부르크 등 혁명가들의 전기를 읽으며 뛰어들었던 ‘노동운동’, 그리고 ‘국회의원’이 된 것이다.
그럼 그는 어떤 ‘심상정’으로 기억되고 싶은 것일까. 한 아이의 엄마? 노동운동가? 정치인? 그의 답은 이랬다.
“노동자 서민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 심상정으로 남고 싶습니다.”
-주요 약력-
1959 파주에서 태어남
1983 서울대 사대 역사교육과 졸업
1980~1981 구로3공단 소재 남성전기노동조합 교육부장, 강제사직.
1983~1985 구로1공단 소재 대우어페럴 미싱사로 일함. 노조결성 및 쟁의로 수배
1985~1986 구로동맹파업 주동자로 지명수배. 서울노동운동연합 결성 주도, 중앙위원장.
1987~1995 전노협 쟁의부장, 쟁의국장, 조직국장(1984년부터 10년간 수배).
1996~2001 민주금속연맹, 금속산업연맹 사무차장
2001~2003 전국금속노조 사무처장
2000~2002 민주노동당 당대회 부의장
현재 17대 국회의원, 원내 수석부대표
좋은 인터뷰를 통해 믿음도 생겼습니다.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