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로 '다이 하드'였다.
 
국제자유노련 아시아태평양지역본부(ICFTU-APRO)와 일본노동재단이 8월16일부터 31일까지 싱가폴에서 연 ‘제13차 고급리더십과정’은 아주 힘들었다.

일정이 너무 빡빡해서 힘들었다기보다 통역없이 영어로 진행되는 일정 때문에 나는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었다. 영어능력이 전제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한 나는 첫 날부터 심한 좌절감을 맛봐야 했다. 각 나라의 정치, 경제, 노동 등의 현안을 두고 분반토론으로 진행되는 이 코스에서 영어는 그야말로 ‘필수’였기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한’ 영어공부, 급기야 ‘분노’로

참가한 19개국 31명 가운데 영어실력의 하위그룹은 나를 포함해서 5~6명. 평소에 공부하는 것을 무척 싫어하던 나였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죽기살기로 공부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루에 100개 이상의 단어를 찾아서 해석하고, 분반토론 때 할 얘기들을 미리 영작하는 것을 끝마치면 보통 새벽 4시였다.

보름동안 나의 수면시간은 하루 평균 3~4시간. 사람들은 “Don't Worry”(걱정하지 마세요)라고 줄기차게 얘기했지만 그건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의 얘기이고 나는 ‘Worry’인데 어쩌겠는가.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않고 하루 종일 영어사전을 끼고 살았다.

절대적인 수면부족의 원인이 된 영어스트레스는 급기야 이 코스에 대한 ‘분노’로 발전했다. 일정이 거의 끝나갈 때쯤 나는 <싱가폴노총 미디어>랑 인터뷰를 했는데, 나는 그 때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국제연대’에 대해 얘기했다. 가장 어려운 나라의 돈 없고 빽 없고 못 배우고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노동자들이 그들의 상황을 가슴으로 절절히 얘기하는 것, 그것이 국제연대의 시작이어야 하는데 이 놈의 ‘영어’가 전제조건이니 못 배우고 가난한 노동자들이 어떻게 이 코스에 참가하겠는가.

나는 인터뷰 중에 “가진 것 없는 노동자들의 참여를 원천봉쇄하고 있다”며 흥분했고 여러 조건이 싱가폴보다 좋지 않은 곳에서 이 코스를 진행하더라도 통역을 보장해서 누구나 참석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괜히 나를 인터뷰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높거나’ 혹은 ‘낮거나’…가치관의 차이

이 코스에 참가한 사람들은 ‘높거나’ 혹은 ‘낮거나’였다. 나라가 잘 살거나, 못 사는 나라에서도 사회적 지위(직업)가 높거나, 아니면 나라도 못 살고 자신도 못 살거나. 쇼핑에 열을 올리는 뉴질랜드, 홍콩 등의 참가자가 있는 반면 인도네시아 참가자는 밥값을 아끼기 위해서 밥을 굶기도 했다.

불행한 것은, 참석자의 대부분인 잘 사는 사람들이 영어를 잘하기 때문에 분반토론을 주도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시각으로 보는 세상, 최저임금이나 성평등, 단결권 등을 위해 우리가 무슨 행동을 할 것인가에 대한 해법은 그저 ‘캠페인’, ‘정부에 대한 로비’ 등이 전부였다. 내가 말한 집회, 노동계급의 총파업 등은 그들에게는 아주 ‘과격한’ 발상일 뿐이었다.

분노스러운 강의도 있었다. 야콥이라는 싱가폴 사람이 “밖에 나가서 시위하는 것보다 교섭을 통해서 해결하는 것이 더 좋다”라는 요지의 강의를 했을 때 나는 너무 화가 났다. 몇 년째 파업율이 '0%'인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는 싱가폴노총의 가치관을, 노동자들이 분신자살하는 한국이나 노조지도자가 사형당하는 미얀마 같은 나라의 참가자들이 듣고 있는 자리에서 어떻게 저런 식으로 얘기할 수 있을까?

결국 나는 마지막 날 “어느 한 가지가 더 좋다는 식의 발언은 상당히 위험하다”고 말했고, 다른 강의에서 나온 '노조가 세계은행(IMF 등)에 참여해야 한다'는 발언도 "반대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사회를 바꾸기보다는 이 사회에 안주해서 뭔가 조금이라도 더 ‘얻어내려는 것’이 노조활동의 가치인양 얘기했고 나는 이것에 반대한 것이다.

‘올바른’ 국제연대의 필요성

여러 가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몇몇 나라들의 심각한 인권탄압, 노동탄압을 조금이라도 인식한 것은 내게 남은 거의 유일한 성과였다. 물론 이 코스가 가진 여러 가지 내용적인 문제점을 떠나서 이런 과정조차 경험해보지 못한 동남아시아 참가자들에게는 견문을 넓히는 좋은 경험이 됐을 수도 있고 내가 언어문제를 겪지 않았으면 더 좋은 평가를 내렸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코스의 계몽 수준의 노동운동, 국제연대를 놔둘 것인가,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아직도 내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이다.

자본은 세계화됐고 자본가들의 국제연대는 이미 현실이 됐는데 우리 노동자들의 국제연대는 아직 너무나 미비하다는 생각, 그렇기 때문에 더욱 올바른 국제연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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