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를 깎는 자구안인가, 형식만 맞춰 제출한 미봉책인가. 」

6개 은행이 지난 9월 말 경영정상화 계획을 금융당국에 제출했지만 인력감축, 부실자산 정리 등 자구내용과 수위가 엇비슷한 수준에 맞춰진데다 노조와의 막판 절충 등에서 강도가 완화되는 등 당초 기대치를 밑도는 선에서 봉합된 인상이 짙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결과가 나온 데는 당국이 은행 정상화의 본질을 움켜쥔 채 각론만을 요구한 탓이 크다. 합병, 지주회사 통합 등 틀을 재편하는 대수술 작업이 남아 있는데도 은행들은 이 문제를 사실상 정부의 처분에 맡긴 채 수동적인 감량경영에만 자구안의 초점을 맞춘 셈이다.

합병을 하고 나면 얼마나 더 감원이 이뤄질지 불투명한 마당에 지금 감원계획을 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반론이 만만치 않다. 그래서 이달 중 진행될 경영평가위원회(위원장 김병주·서강대 교수)의 정상화계획 평가 자체가 무의미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경영정상화 계획의 한계=은행별로 제출한 경영정상화계획은 선뜻 고개를 끄덕일 파격적인 자구내용은 거의 없고 그야말로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된 것으로 나타났다.

한빛은행은 노사합의 과정에서 당초 계획보다 감원 수위를 낮춰 내년까지 1,500명(정규직 890명·비정규직 610명)을 줄이기로 했다. 먼저 합의한 외환은행이 정규직 430명, 비정규직 430명을 감원하기로 하자 비슷한 수위에 맞춰 감원비율을 하향조정한 셈이다. 물론 노조측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다른 은행들도 대부분 「더이상 인원을 줄이면 정상적인 영업이 어렵다」거나 「상대적으로 재무상황이 좋다」는 이유로 소극적인 입장으로 일관했다. 조흥은행의 감원계획이 200명 안팎, 평화은행은 전체 직원의 6%인 73명, 광주은행 138명, 제주은행 55명 등이다.

평화은행은 카드사업 부문을 SK그룹에 넘겨 자금을 확보하기로 결정해 관심을 끌었지만 당장의 재무지표를 호전시키는 데만 효과가 있을 뿐이다. 과연 알짜사업이 카드업을 포기하고 현재 국제결제은행(BIS) 비율을 높이는 게 은행의 경영을 정상화하는 것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이밖에 은행들은 올해와 내년 중 20조원 안팎의 부실자산을 정리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부실자산 정리 계획은 당초안(본지 9월29일자 1·3면 참조)과 큰 차이가 없고 그 방식도 매각·회수 등 은행별로 대동소이한 것으로 나타났다.

임금삭감, 보너스반납 등을 통해 퇴출직원들에 대한 위로금 재원 등을 마련하는 것도 은행별로 비슷하다.

◇합병·통합 배제한 자구안 무의미=문제는 은행들이 스스로 경영정상화의 기본틀을 짤 수 없다는 데 있다. 합병 또는 지주회사 통합 등의 근본적인 문제와 관련해 자주적으로 의사결정을 못하는 처지이기 때문에 자구계획 자체가 「헛손질」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예를 들어 올해와 내년의 인력감축 목표를 제시했다 하더라도 지주회사로 통합되거나 다른 우량은행과 합병이 단행된다면 계획 자체가 무의미해 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결국 은행들이 제출한 정상화 계획은 일정한 한계 속에서 끌어낼 수 있는것들을 일제히 끌어내 은행별로 차이가 없거나 당장 재무비율을 높이는 미봉책으로만 가득 채워지게 됐다.

◇경영평가위, 무엇을 평가할 것인가=제출받은 자구계획을 평가해 공적자금 투입 등을 결정하는 은행경영평가위원회는 과연 어떤 기준으로 자구안을 평가할지 의문이다.

은행이 정상화될지 여부를 판정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는 여전히 「잠재부실」이다. 은행들이 제시한 부실정리 계획과는 무관하게 얼마나 잠재부실이 남아있는지, 잠재부실이 현실화될 가능성은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생존능력과 경쟁력이 평가될 수밖에 없다.

이를 일일히 실사할 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 인원을 적당히 줄이고 당장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는 것만으로 정상화 계획을 평가한다면 해당 은행은 물론이고 「시장」을 납득시키기 어려울 게 자명하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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