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 기간에 의미심장한 뉴스가 보도됐다.
 
지난달 29일, 연합뉴스 등은 산업자원부 자료를 토대로 ‘불경기에도 고가품의 수입과 소비가 증가’했다는 요지의 뉴스를 소개했다.
 
내수침체가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가운데에도 골프채, 외제 승용차, 밍크코트, 요트, 골동품 등의 수입과 소비는 꾸준히 늘고 있다는 것이다.
 
산업자원부 자료를 보면 골동품의 경우 지난 7월까지 수입액이 793만8천달러로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87.1% 늘어났으며, 요트도 올들어 89만달러 어치가 수입돼 작년보다 48.5% 증가했다. 승용차 수입도 크게 늘어 지프형승용차는 132.6%, 세단형승용차는 15.6% 늘어났다.
 
고가품의 수입증가는 곧바로 매출증가로 이어졌다. 지난달 국내 주요 백화점의 전체 매출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고가품 판매는 9.7% 늘어나, 지난 6월 이후 3개월 연속 성장한 것으로 나타났다.
 
산자부 관계자는 이에 대해 “산자부에서 발표한 자료가 아니라 기자들이 직접 취재해서 쓴 것 같다”며 "내수불황 속에서도 고가품 판매는 꾸준히 늘어나는 소비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 것 아니겠느냐"고 담담히 말했지만, 문제는 그처럼 ‘담담’하지만은 않다.
 
이같은 보도는 결국 그간 정부관료와 학자들이 ‘주문’처럼 반복해온 주장-부유층의 지갑이 열려야 경제가 살아난다-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 때문이다.
 
지난 8월, 이헌재 경제부총리가 “부자들이 돈을 쓰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발언을 한 이래 부자들의 지갑을 열기 위한 정부 부처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골프장을 지어야 경기가 살아난다”는 ‘골프장 경기부양론’을 주장했다가 여론으로부터 ‘단기적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뭇매를 맞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지만, 이 ‘부자소비론’은 골프장 경기부양론과는 달리 여론의 상당한 지지를 얻었다. 총체적 난국에선 ‘있는 분’이 돈을 써야 한다는 단순논리가 먹힌 것이다.
 
정부는 즉각 특소세 폐지 등 부유층 대상의 감세정책을 단행했고, 언론은 부자들의 소비를 ‘노블레스 오블리주’ 마냥 칭송했다.
 
예컨대 이준 조선일보 경제부장도 지난 8월 18일자 칼럼에서 “일본의 부유한 노년층들에 의해 기모노(일본 전통 의상), 보석, 미술품 등 이른바 ‘부유층 3대 상품’의 매출이 올라가고, 고급 스포츠카 포르셰의 올 1~5월 판매대수도 작년 같은 기간보다 35%나 늘었음”을 예로 들며 “일본은 버블 붕괴 이후 1996년과 2000년에도 두 차례 경기 회복 국면에서 각각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일과성(一過?)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전문가들은 이번 세 번째 회복을 일과성이 아닌 장기적 상승 기조로 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고가품의 판매율 신장에 기대, 일본의 경기회복 움직임을 설명한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 부장의 주장대로라면 우리 경제의 앞날은 밝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부유층에 의한 골동품, 골프채, 외제 승용차 등의 수입과 소비가 꾸준히 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의 경제지표야말로 ‘청신호’ 아니겠는가.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극심한 내수침체의 여파는 한가위마저 앗아갔고, IMF 등 국제기구들은 잇따라 국내경제에 대해 어두운 전망을 내놓았다. 급기야 ‘부자소비론’의 당사자인 이헌재 부총리도 1일 오전 국내 경제의 잠재성장률이 5%대에서 4%대로 떨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부유층을 대상으로 하는 고가품의 수입과 판매가 꾸준히 늘었다는 보도가 무색할 지경이다.
 
부유층의 고가품 소비 증가에도 불구, 경기 침체의 가속화 현상은 결국 ‘부자들이 지갑을 열지 않아 경기가 어렵다’는 주장이 단순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함을 방증하는 것이다. 실물경제의 여러 지표 역시 이를 보여주고 있다. 한겨레의 보도에 따르면 지난 8월의 경우 연간 1천만원 이상 구매하는 백화점 VIP 고객(상위 2.5%)들의 소비는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재산이 10억원 이상 되는 부유층이나 의사·변호사·기업체 임원 등에게만 발급되는 플래티늄카드의 매출액도 떨어지지 않았다. 국민·비씨·삼성 카드측은 공히 지난해에 비해 매출액이 떨어지지 않거나 오히려 더 늘었다고 밝혔다.
 
이처럼 부자들의 소비가 줄지 않았고, 비록 고가품에 불과하지만 오히려 소비가 늘어났음에도 경제가 살아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심상정 의원(민주노동당)실 임수강 보좌관은 “부자들의 소비와 경제의 활성화는 동떨어진 이야기”라고 지적한다. “부자들이 쌀이나 가전제품을 소비하는 것과 ‘삼천궁녀의 서비스’를 소비하는 것이 같은 경제적 결과를 가져올 수는 없듯이 남아도는 재원을 공장을 짓는 데 사용하는 것과, 골프장을 건설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 성장 잠재력에 같은 영향을 끼친다고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부자들의 소비는 사치재에 한정되어 있어서 성장에 기여할 수 없다“며 ”오직 대다수 서민들의 소비확대만이 경제성장에 기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부자들이 그들의 ‘재산규모’에 맞먹는 소비의 규모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통계도 있다. 비씨카드의 경우 월평균 총매출액 10조원(지난 7월 발표) 중에서 고소득층인 플래티늄카드 고객의 매출액이 1897억원에 불과했다는 것은 이를 잘 나타낸다. 전체 매출액의 2%도 채 못 되는 수치다. 나머지 98%는 PDP TV나 외제 승용차와는 거리가 먼 ‘가난한 아빠’들이라는 이야기다. 결국 ‘부자들의 지갑’에 초점을 맞춘 정부의 경기부양책은 크게 빗나가 있는 셈이다.
 
부자들의 소비를 부추겼던 ‘세력들’은 부자 한 사람이 신문을 백부씩 구독하거나, 하루에 열끼씩 밥을 먹을 것이란 기대라도 했던 것일까. 결국 이들의 바람은 참으로 순진하거나 혹은, 교활한 것이라고밖엔 볼 수가 없다.
 
장기화된 경제침체를 벗어나는 길은 소수의 ‘부자 아빠·엄마’들이 아니라 다수의 ‘가난한 아빠·엄마’들의 지갑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말로 ‘포퓰리즘’이 절실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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