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결실과 풍요의 상징. 절로 마음도 여유로워진다. 그래서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으라고 했나보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여성에겐 ‘고난’의 상징이요, 모두가 행복할 수 없는 것이 명절이다.

명절증후군. 우리 사회에선 몇 년 전부터 설이나 추석이 되면 심심찮게 등장하는 말이다. 어머니, 아내, 며느리, 딸이란 이름을 가진 이 땅의 여성에겐 명절이란 그저 스트레스와 고단함의 연속으로 되어 ‘증후군’이란 이름의 병명까지 얻게 된 것이다.

모두에게 풍요롭고 여유로운 명절은 불가능한 것일까. ‘평등’ 명절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성의 60% ‘명절은 노동절’

우리 사회의 여성들에게 명절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한국여성민우회가 지난해부터 명절에 대한 별도의 홈페이지를 열어두고 설문조사를 한 결과 23일 현재 ‘나는 명절이 이래서 싫다’란 질문에 모두 396명의 여성이 참여했는데, 이 중 59.0%(236명)가 ‘명절은 노동절’이라는 이유로 꼽았다. 그러나 남성 참가자 60명 가운데 28%(17명)만이 ‘노동절’이라는 이유를 선택했고 가장 많은 35%(21명)는 ‘교통대란’을 이유로 꼽았다.

반면 ‘나는 명절이 이래서 좋다’란 질문에 남녀 모두 1위로 ‘쉴 수 있어서’를 꼽았다. 하지만 응답률을 보면 여성은 37%(149명)에 그친 반면 남성은 여성의 2배가 넘는 63%(39명)에 달했다. 명절은 남성에게 쉬는 날이지만 여성들에겐 그렇지 못하다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했다. 여성들의 2위 응답은 ‘없다’(29%, 118명)가 차지해 명절이 여성에겐 결코 ‘좋은 날’이 될 수 없음을 보여줬다.
 
아직은 높은 벽, ‘평등명절’

“집에서는 가사분담이 잘 되는 편이에요. 나름대로 평등부부를 실천하고 있는 셈이죠. 하지만 명절만 되면 문젭니다. 시댁에 가면 시어머니가 남편이 가사일 하는 걸 싫어하니까요.”

한 여성단체에서 근무하는 이아무개씨(33)가 토로하는 말이다. 이씨는 올해 결혼 7년째를 맞지만 명절 때마다 겪는 일이라고 한다. 핵가족에서 대가족으로 넘어가면 문제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남편이 설거지라도 하려면 시어머니가 ‘됐다, 내가 하마’라고 한마디 하시거든요. 그때마다 어려워요. 남편도 슬슬 눈치를 보며 안 하려고 하고요.”

반대의 경우도 있다. 민주노동당 충북지부에서 상근하는 홍아무개씨(39)는 시아버님이 지역에서 사회운동을 하시기에 명절의 시댁 분위기는 오히려 좋다고 한다.

“몇 년 전 시아버님께서 명절 때 친정에 먼저 다녀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남편과 친정엘 먼저 갔는데요. 웬걸요, 친정아버지가 펄쩍 뛰시는 거예요. 뭔가 잘못돼서 온 게 아닌가 걱정을 하시는 겁니다.”

드문 경우에 속하겠지만 결과적으로 명절 때 여성에 대한 시댁이건 친정이건 인식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며느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미혼인 이아무개씨(30)는 명절에 집에 가면 홀어머니를 도와 오빠, 언니네 가족들이 오면 시중들기에 바쁘다. 본인도 혼자 자취생활하며 힘들게 직장생활을 하는데 명절마저 딸이란 이유로 집안일을 하려다 보면 보통 지치는 게 아니다. 
 
민우회·민주노동당 평등명절 캠페인

평등명절. 명절증후군이란 말이 유행을 타던 무렵 더 이상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을 방치해선 안 된다고 뜻을 모은 여성민우회가 지난 99년 추석부터 대안명절문화 만들기 ‘웃어라 명절’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다. 평등한 명절 만들기를 위한 첫 캠페인이었다.

여성민우회는 “여자도 남자도 아이도 어른도 며느리도 딸도 아들도 모두가 함께 일하고 함께 쉬는 신나는 명절을 만들고 싶다”고 이 캠페인의 취지를 밝혔다.

여성민우회는 평등명절을 지낼 수 있는 7가지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가족회의를 통한 명절계획 세우기 △남녀 역할 나누기 △시댁과 친정 구분 없는 명절 보내기 △음식과 차례상 간소하게 차리기 △조상모시기는 고인을 기리는 마음으로 △모두가 함께 하는 명절놀이 찾기 △이웃과 정을 나누는 명절 되기 등이다.
 

오정아 여성민우회 정보홍보팀 부장은 “지난 6년간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인식의 ‘환기’는 된 것 같아요. 여성의 명절 고통을 이해하게 된 거죠”라고 평가했다.

민주노동당도 지난해 추석부터 평등명절 거리캠페인을 시작했다. 올 추석을 앞두고는 25일 영등포역에서 세 번째 행사를 갖는다. 이번 행사에는 남성 국회의원들이 총출동해 앞치마를 두르고 부침개를 부치며 평등명절을 홍보할 예정이란다. 또 우리쌀로 만든 떡도 만들어 지나가는 시민들에도 나눠준다. 앞선 두 차례의 캠페인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호응이 꽤 높았다고 한다.

박용진 대변인은 “진보정당이 평등명절에 앞장서는 것은 당연하다”며 “당원과 시민의 자연스런 참여를 이끄는 등 인식 변화에 일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호주제 폐지 만큼 중요한 문화운동

그러나 평등명절이 생각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아직은 세대간, 남녀간 인식차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여성민우회의 경우 캠페인이 인식의 ‘환기’란 성과가 있었지만 근본적인 실천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오정아 부장은 “평등명절이 돼야 한다는 인식은 커졌지만 실천이 잘 안되는 게 문제”라고 지적한다. 가사분담을 해야 한다는 의식이 강해진 반면 대가족 안으로 들어가면 “좋기는 하지만 괜히 유난을 떨 필요가 있나”는 등의 이유로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오 부장은 “여성단체에서 정답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라며 “여성과 남성 모두 평등명절을 위해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사례를 많이 발굴하고 확산시키도록 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사례를 많이 접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인식의 전환과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겠냐는 것이다.

이혜순 전국여성노조 사무처장도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명절에 나타나는 문제는 결국 가족제도와 부딪히는 문제로 호주제를 폐지하자는 것만큼 평등명절도 큰 문화적 운동”이라며 “여성노조의 입장에서도 노조가 체계적으로 평등한 가족관계를 맺기 위한 프로그램 등을 준비해 조합원 교육에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평등명절이란 화두는 가족해체 시대에 근본적인 가족정책을 정립하는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구경숙 한국여성단체연합 정책부장은 “평등명절도 결국 가족 안에서 차별받으면서 돌봄노동의 주체인 여성의 사회참여와 평등한 가족관계를 지향하기 위한 것”이라며 “정부가 현재 검토하고 있는 새로운 가족정책은 단순한 인구정책적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민주적이고 평등한 가족정책이란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평등명절, 아직은 많이 더디다. 그러나 변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어떻게 그 속도를 내도록 할 것인가, 이번 추석 각 가정에서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내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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