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경제인연합회는 2003년 8월의 자료를 근거로 우리나라의 비정규직 규모를 전체 임금노동자 중 22.3%인 316만 명이라고 본다. 그러나 노동계는 같은 시기 이 규모를 7백84만 명(55.4%)이라고 주장했다.
 
784만명과 316만명.
 
이 수치 만큼, 혹은 이 수치를 뛰어넘는 차이가 재계와 비정규 노동자들의 ‘거리’를 말해준다. 정부의 ‘책임방기’ 속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부여당과 그 어느 때보다 더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고 있지만, 결국 궁극적인 전선은 사용자측과 그어져 있을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재계와 사용자들은 ‘어떤 아름다운 세상’을 갈망하고 있는 것일까.
 
정부의 비정규직 개악안에 대한 노동계의 반발이 점점 거세어가던 지난 15일, ‘경총’ 소속의 주요기업 인사담당 임원들은 회의를 열고 다음과 같이 ‘충격적인’ 요구를 밝혔다.

첫째, 노동위원회 차별구제절차는 폐지.
둘째, 기간제 근로자의 경우 일정기간 경과 이유만으로 해고를 제한하는 규정은 삭제.
셋째, 파견제도에 일정 기간의 휴지기 도입 삭제.
 
경총은 차별구제절차에 대해 “차별 판단의 명확한 기준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차별구제절차가 마련될 경우 차별구제신청이 폭주되고, 노사간 혼란이 더욱 증폭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정 시간을 경과한 기간제 노동자에 대한 해고 금지 규정에 대해서도 경총은 “현행 해고 법제가 너무 경직된 시점에서 이 규정은 기업에게 더 이상 비정규직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라며 근로계약에 대해 법제도가 관여하는 것은 계약의 일반원칙을 심대히 훼손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논란이 되고 있는 3개월 휴지기 도입에 대해선 아예 “이번 정부 입법안 중 그나마 고용유연성을 어느 정도 고려했다고 생각되는 파견대상의 확대 규정을 완전히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이라고 규정하며 이는 곧 파견근로 형태를 사장시키려는 법안이라고 맞받았다.
 
경총의 이런 요구는 사실상 ‘완전무결’한 비정규직 확대·강화법안을 만들어달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안하무인’이다.  
 
뿐만 아니다. 총선 20일 후인 5월 5일, 상공회의소, 전경련, 한국무역협회,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등 5개 경제단체는 ‘최근의 비정규직 논의에 대한 경제계 입장’ 제하의 공동성명을 통해 “비정규직 문제가 당면한 경제회생의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이들은 예의 전가의 보도인 ‘정규직의 고임금’ 문제를 거론하며 “오늘날 비정규직 및 청년실업의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대두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며, 조합이기주의에 빠진 노동조합 역시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라고 걸고 넘어졌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날로 고도화되어 가고 있는 경제구조와 급속한 고령화 추이 등을 고려할 때 비정규직 활용은 시대적 대세”라며 딴소리를 한다. “여성과 고령자 등 경제활동인구에서 퇴장하는 계층을 다시 노동시장으로 흡수하고 불완전한 노동시장을 보완할 수 있는 방안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에선 정규직 때문에 비정규직 문제가 대두됐다더니, 뒤에선 비정규직은 ‘시대의 대세’라고 ‘자위’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계에 대한 엄포도 잊지 않았다. 이들은 “현재 수많은 중소기업이 열악한 경영환경에 처해 정규직의 고용마저도 위협을 받고 있는 실정”이라며 “비정규직 규모가 몇 %에 달해 비정규 공화국이라느니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해야 한다는 등·· 소모적인 논쟁을 중단하라”고까지 일갈했다. 이쯤 되면, 이들이 원하는 건 바로 ‘비정규직 그 자체’가 아닐까.
 
지난 7월 1일, 전경련이 내놓은 ‘비정규직 쟁점과 개선방향’이라는 보고서엔 재계가 비정규직 문제를 보는 시각이 노골적으로 담겨 있다. 이들은 ‘기업의 경쟁력 확보=비정규직은 필수’라는 등식 아래 비정규직을 ‘경제발전의 원동력’으로 격상시킨다.
 
이들은 자체 조사 결과를 인용하며 ‘비정규직의 처우가 나쁘다기보다는 정규직의 처우가 지나치게 높다는 응답(22.6%)이 정규직 처우는 적당하며 비정규직 처우가 지나치게 낮다는 의견(17.7%)보다 많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수치에서 알 수 있듯 기업 스스로도 이런 견해는 22.6%에 불과하다.
 
그러는 한편, ‘정규직 근로자의 조직몰입도 증가를 위하여 도입되었던 여러 제도들, 특히 복리후생비용은 기업에게 부담으로 작용’되고 있다며 앓는 소리를 내고 있다. 이들은 특히 정규직의 임금상승 원인을 ‘단체협상’의 영향이라고 지적하며 아예 노동조합의 존재 자체에까지 딴지를 건다.
 
이들 주장의 백미는 이른바 ‘인건비 대비 생산성’을 지적한 부분이다. 이들은 정규직의 고임금 문제를 거론하다 말고, 갑자기 ‘인건비 대비 생산성’을 들고 나오며 비정규직의 생산성이 정규직에 비해 떨어진다고 주장한다. 즉, ‘정규직이 더 열심히 일한다’는 것이다.
 
그러는 한편, 노조사업장보다 비노조사업장의 생산성이 더욱 높다는 주장을 거론하며 단체협상이 임금상승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비정규직의 낮은 임금은 낮은 생산성 탓이라고 돌리면서 정규직의 높은 임금은 단체협상 탓이라고 돌리는 것이다. 앞뒤가 맞지 않아도 한참 맞지 않는 이야기다.  
 
여기까지만 살펴봐도 이들 재계의 주장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을 만큼 단순하고 명쾌하다. 노조도, 정규직도 없는 그들만의 비정규직 세상. 차별 규제도, 해고금지 조항도 없는 사용자를 위한 법과 제도의 나라. 어쩌면 “이 법안대로라면 10년 후엔 정규직 노동자 씨가 마를 것”이라는 강문대 변호사(단병호 의원 보좌관)의 우려를 그들은 절실히 염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일 저들의 주장 혹은, ‘앓는 소리’가 이번 입법안에 대한 ‘절실한’ 반대가 맞다면, 우리는 ‘노동자 자본가 사이에 결코 평화란 없다’는 옛 노동가요를 되뇌일 수밖에 없다. 반대로 내심 정부의 입법안을 환영하면서도 겉으로만 반대의 ‘제스처’를 취하고 있는 것이라면, 재계는 그 얄팍한 수를 거둬들여야 한다.
 
노동자들의 분노는 결코 ‘제스처’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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