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들 말을 아꼈다.
 
소란스러운 통성명도, 떠난 이를 부르며 목놓아 통곡하는 이들도 없었다.
 
그저 그가 이 세상을 떠난 뒤 사람들이 그를 부르기 시작한 이름, ‘정든님’처럼 그렇게 그는 우리 앞에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정은임을 찾아가는 길은 가깝고도 멀었다.
 
9월 21일, 엠티촌이 밀집한 경기도 가평군 대성리역. 에서 맞은 편의 샛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걸어오르고서야 그의 유골이 묻힌 ‘북한강공원’에 이를 수 있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구암리 산 12-1번지. 멀리 흐르는 북한강을 내려다보이는 ‘납골묘지’가 그의 새로운 안식처였다.
 
이날은 MBC 아나운서이자, 이제 전설이 된 프로그램인 ‘FM 영화음악’의 진행자 정은임씨가 지난 8월 4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지 꼭 49일째 되는 날이다. 그는 단지 FM라디오 진행자로서뿐만 아니라, 한 노동자의 분신 소식에 슬퍼하고, 민중의 삶이 유린당하는 사회현실에 분노하던 우리 시대의 누이요, 동지같은 존재였다.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삶을 기억하는 많은 이들 속에서 그의 삶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북한강 공원 관리사무소에서 일하는 젊은 여성은 49재를 기리는 사람들이 한명씩 찾아올 때마다 일일이 위치를 설명해주었다. 그는 “장례식 이후부터 날마다 한두 명 이상은 꼭 찾아왔었다”고 알려준다. 그는 정은임씨 팬카페에 가입한 회원이기도 하다.  
 
이날 가장 먼저 정은임의 묘를 찾은 것은 팬카페의 한 회원이었다. 그는 새벽 다섯시 반, 자전거로 서울을 출발해 북한강 공원을 찾았다. 아무도 없는 묘소에서 그는 녹음해간 정은임의 영화음악을 들으며 눈물 지었다. 그는 생전에 정은임 씨가 보고싶었다던 ‘은사시나무’ 사진을 묘 앞에 붙여놓고 다시 홀로 돌아왔다.
 



 
49재 참배객들은 저마다 하나씩 준비한 선물들을 꺼냈다. 형형색색의 꽃들과 캔커피, 참이슬 소주, 포도쥬스 그리고 생전에 그가 좋아했던 그림들. 정은임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 회원은 물론, 이윤재, 홍은철, 차미연, 김정화 등 그의 직장동료인 MBC 아나운서들도 모두 절을 하고 술잔을 채웠다. 30여명의 참배객들은 짧게는 3-4년, 길게는 10여년 이상 어둡고 소외받은 이들에 대한 정은임의 따뜻한 목소리에 함께 젖던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에게 참배의 절차 같은 것은 필요치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곳에 온 이들이 모두 1990년대 ‘정영음’(정은임의 영화음악)의 애청자들만은 아니었다. 지난해 처음으로 정은임의 영화음악을 접했다는 대학 2학년생은 “은임 누나를 알게 되면서 ‘파업전야’를 알게 됐고, 그를 통해 전태일 열사를 알게 되었는데 은임 누나가 묻혀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모란공원에 전태일 열사가 묻혀 있다는 사실에 감회가 남다르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은임은 갔지만, 이렇게 사람들은 그에 대한 기억의 끈을 잇고 있었다. 
 
오후 4시경 49재를 봉행한 뒤 어스름이 찾아오는 시각까지도 사람들의 발길은 하나둘씩 계속 이어졌다. 서울에서 왔다는 한 386세대 직장인은 “아무도 없는 시간에 한번 찾고 싶어서 일부러 늦게 왔다”며 이렇게 말했다.
 
“평소 영화음악 프로그램이나, 정은임씨가 이야기하는 말들에 한번도 귀를 기울인 적 없던 언론들이 그가 죽자 ‘영화처럼 살다간 사람’이라며 요란스레 떠들어대는 것을 보고 기가 막혔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가 늘 이야기하던 것, 세상에 대한 따뜻함, 부조리한 것들에 대한 분노 같은 이야기들은 묻히고 말더군요. 반면에 어떤 이들은 또 그를 방송계의 진보적 투사 쯤으로 묘사하기도 하던데, 그것 역시 정은임씨를 욕되게 하는 거라고 봅니다. 그는 그저 우리들의 지친 마음을 위로해주던 누이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럼 조용히 보내줘야 안되겠습니까. 아마도 내년쯤 되면, 이런 호들갑은 금새 사라지고 정말 그를 기억하는 팬들만이 남아있겠지만요.”
 
그런 그의 말은 기자를 몹시 부끄럽게 했다. 49재 전날만 해도, 팬카페에 오른 한 애청자의 글- 영화음악 방송에서 올드보이의 박찬욱 감독과 “파병만은 막아야 한다”는 대화를 나누던 도중 박 감독이 “그러기에 권영길 후보를 찍었어야죠” 라고 말하자 정은임씨가 “그러게요”라고 답하며 미소 지었다는-을 보며 기자는 49재 이야기와 현실 정치의 이슈를 엮어 진보진영의 ‘입맛’에 맞는 기사를 만들어 볼 요량이었다.
 
그러나 이날 아무런 이해관계도, 계산도 없이 오직 그의 삶과 죽음을 기리기 위해 먼 길을 온 ‘사람들’을 보며 기자는 알량한 취재수첩을 덮어야 했다. 그 어떤 기사나 보도도 생전 정은임의 방송을 하나도 빠짐없이 녹음해 인터넷에 올려가며 그가 세상과 여전히 공유할 수 있게끔 하는 애청자들의 정성에 비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날 ‘정든 님’과 그의 고운 이들은 그렇게 또 기자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정은임씨가 사고를 당한 흑석동 삼거리엔 최근 한 애청자가 꾸며놓은 ‘추모전시물’<사진>이 서 있다. 49재 날, 이 전시물에 누군가 붙여 놓은 글귀를 소개하며 ‘기사는커녕’, 추모도 못되는 부끄러운 글을 맺는다.
 

 
‘작은 인연조차 맺지 않았던 사람이 떠나간 것 때문에
이렇게 그 빈자리를 크게 느낄 줄은 몰랐다.
밤마다 그 습기 머금은 목소리를 되새기고
늘 아름답게 느꼈던 그 야무진 생김새를 떠올리면서
가슴저려하며 눈물을 흘려도 역시 그가 떠나간 현실은 매정하다
어찌 서로 알고 지낸 인연만이 인연이랴.
그와 나의 관계는 늘 일방적인 것이긴 하였어도
그는 내게 언제나 거기 있어 좋은 사람이었다.
세상 구석진 곳에 대한 따뜻한 마음과 정의로운 것에 대한 갈망.
그리고 그가 좋아하던, 내가 공감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으마.
비소식 없이 무덥기만 하던 서울 하늘에
그날 밤, 잠깐이지만 세차게 비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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