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명동성당 입구. 이 곳에는 ‘고용허가제 반대, 노동허가제 쟁취, 노동3권 보장’을 요구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이 30여명이나 있다. ‘강제추방 저지와 이주노동자 전면 합법화’를 요구하며 지난해 11월25일부터 시작된 노숙농성이다. 이 날로 벌써 306일째다.

이들은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한국에 온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투사’가 돼 있다. 앞으로 노동허가제 도입 등 정부가 외국인노동자들에 대한 차별과 탄압을 철회할 때까지 투쟁을 계속할 계획이다. 특히 지난 13일부터 시작된 ‘차별 없는 세상 만들기 걷기 대행진’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바쁘다.

미등록이주노동자 아노아르씨의 한국생활 8년

분주하게 움직이던 명동성당 노숙농성단 대표 아노아르씨(34·방글라데시)를 만났다.
한국에 온 지는 8년째. 그는 “탈모증세가 갈수록 심해진다”고 걱정한다. 2002년부터 노동운동에 뛰어든 이후 조직국장, 분회장, 지부장 등을 역임하면서 생긴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현재 평등노조 이주지부장.

“대표로서 일정을 구상하느라 늘 머리가 아프다. 한 달 계획을 미리 짜야 한다. 하지만 동지들이 열심히 투쟁을 전개하고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

아노아르씨는 지난 96년 ‘큰 돈을 벌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브로커에게 900만원을 주고 3개월짜리 관광비자로 말이다. 이후 7년 동안 자동차 부품 조립 공장, 섬유회사 등에서 일을 했다. “2~3개월만 일하면 900만원을 갚고, 더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브로커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하지만 실수였다. 열심히 일을 해서 큰 돈을 손에 쥔 후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며 결혼을 하고 나아가 작은 사업도 하려 했던 그의 꿈은 빠른 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우선 월급을 제때 받은 적이 없었다. 사장이 노골적으로 임금을 주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래서 중도에 회사를 그만 둔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미등록(불법체류)이주노동자라는 신분 때문에 하소연도 못했다. 몸이 아파도 병원에서 진료 한 번 받은 적이 없었다. 은행에서 통장을 만드는 것도 불법이라는 딱지 때문에 불가능했다. 사장으로부터 폭행은 다반사였다. 언어소통이 안 된다는 이유로 욕설과 폭행이 비일비재했다. 그는 지난 시간을 회고하면서 “죽고 싶었다”고 표현했다.

“내가 힘들게 일하고 있을 때 사장이 나를 노동자로서 보지 않고 불쌍한 사람, 가난한 나라의 사람, 노예 및 기계 등으로 생각할 때 가장 힘들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세상이 바뀔 것이라고 믿고 참아왔다. 하지만 지금 내 수중에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노아르씨는 현재 수입이 없다. 미등록이주노동자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일을 계속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고국인 방글라데시로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했다.

“고향에 있는 부모님과 가족들도 내가 한국에서 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 같다. 수입이 없어서 많이 힘이 들지만 자긍심을 느낀다. 지지해주고 연대해주는 한국 사람들과 함께 문제들을 하나 둘 해결할 때마다 보람을 느낀다.”

그는 ‘고용허가제’와 관련해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현재 한국 정부가 시행중인 고용허가제는 철저히 고용주인 사장 위주로 돼 있어서 인권탄압 발생소지가 크다. 또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일자리도 옮길 수 없어 고용허가제로 입국을 하더라도 결국 불법체류의 길을 선택할 가능성도 높다. 특히 두 달 안에 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떠나야 하는 취업규정도 문제다. 한국에 들어온 이주노동자들에 대해서는 한국 정부가 계속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닌가.”

지난달 17일부터 고용허가제는 실시됐다. 그는 “불법체류자 수가 오히려 더 늘고 있다”며 “고용허가제 실시 이후 평등노조에 보고된 것만 집계하더라도 자살한 이주노동자가 무려 15명이나 된다”고 말했다. 일자리도, 돈도 없는 상태에서 살아야 하는지 아니면 죽어야 하는지를 결정하지 못한 이주노동자들이 스스로 답답해하다가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자살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아노아르씨는 ‘차별 없는 대한민국’을 위해 작은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차별 없는 세상 만들기 걷기 대행진’에는 이런 각오로 참여하고 있다. 이 때문에 지난 13일 행사 때부터 꾸준히 대행진을 해 온 그는 대행진이 마무리되는 19일까지 모두 참가할 계획이다.

“개인적으로 한 노동자로서 인간대우를 받으며 한국생활을 하고 싶다. 차별도 없이, 탄압도 없이 살고 싶다. 대한민국이 차별 없는 나라가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아노아르 대표는 지금 직무대행이다. 한국 정부가 ‘토끼몰이식’으로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단속하는 과정에 당시 농성단 대표가 구속됐기 때문이다.

“우리의 투쟁이 승리로 끝나면 나는 그러나 미련 없이 한국을 떠날 생각이다.”
기자는 이를, 그가 투쟁이 승리하는 날까지는 명동성당을 지키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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