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굴지의 반도체 생산 업체에서 서무담당 사무직으로 근무하는 이 아무개씨(33).

상업고등학교를 막 졸업하던 스무 살에 학업성적도 늘 상위권을 유지하고 관련 자격증도 착실히 취득해서 이 회사에 취직했다. 다른 대졸 남자사원들에 비하면 보잘 것없는 박봉이었지만 그래도 번듯한 대기업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너무나 꿈만 같았다.

그렇게 수년이 지나고 IMF 외환위기가 닥쳐왔다. 세계적인 반도체 시장 점유율을 자랑하는 회사였건만 구조조정의 회오리는 이 곳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제일 먼저 사무직 여사원들을 도급회사로 아웃소싱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해 실제로 몇 년 지나지 않아 그도 도급회사 사원이 됐다.

그런데 분명히 도급회사 소속인데도 하는 일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고 업무지시도 예전처럼 반도체 업체에서 그대로 받고 있었다.

반면 연봉은 400만원 이상이 줄어 든데다 심지어 구내식당 식대가 2배로 오르고 기숙사 이용에도 불이익을 받는 등 도급회사로 옮기면서 받는 차별은 갈수록 심해졌다.

그는 이 같은 차별이 회사 경영상의 어려움으로 자신들이 도급회사로 밀려 나면서 당연히 받는 불이익일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반도체업체가 가장 낮은 임금을 받던 여직원들을 먼저 구조조정하고도 그동안 수년 간 도급을 위장한 불법파견 형태로 자신들을 고용해 온 것을 알게 됐다.

게다가 현행 파견법에는 2년 이상 파견근로를 제공한 파견노동자는 사용사업주가 직접고용을 한 것으로 간주하도록 돼 있는데, 회사는 이 조항을 피해가기 위해 재분사를 하려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번에는 절망감부터 밀려왔다.

이상은 하이닉스반도체 하도급업체인 현대휴먼플러스 소속으로 근무하던 사무직 여성노동자의 이야기다. 이 곳의 여성노동자들은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조를 설립하고 불법파견과 차별대우 문제를 집단적으로 제기할 예정이다. 그런데 앞으로는 이 같은 일반사무직 여성노동자들이 불법파견 시비를 가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 정부가 파견업종 자체를 사무직을 포함해 전 업종으로 확대하는 입법안을 10일 발표해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규직이나 직접고용 계약직에서 가장 먼저 파견 등 간접고용으로 전환될 업무가 바로 여성노동자들의 주로 담당해 온 일반사무·서비스직이 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파견법이 시행 된 후 파견으로 전환된 노동자들은 대부분 청소용역, 간병인, 전화교환원, 사무보조 등에 종사하는 저임금 여성노동자들이었다.

하이닉스 같은 제조업체의 사무직 뿐 아니라 서비스업종인 호텔들도 룸메이드 여성노동자들을 불법파견으로 사용해온 사실을 노동부도 이미 여러 차례 판정한 바 있다.

양대노총, 전국여성노조, 여성단체연합, 여성민우회 등으로 구성된 여성노동연대회의는 “여성노동자들은 파견법이 제정된 후 제조업 사무업종들이 파견근로로 전환되면서 근로조건이 후퇴하고 고용이 불안해졌다”며 “그렇지 않아도 간접고용으로 내몰린 여성노동자들이 노동3권조차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데 파견업종이 확대되면 대다수의 여성노동자들은 파견노동자로 전락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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